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하동-은열공 강민첨 사적비(殷烈公 姜民瞻 事蹟碑),

구름에 달

by 碧巖 2024. 9. 29. 22:11

본문

728x90

은열공 강민첨 사적비(殷烈公 姜民瞻 事蹟碑)

경남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673

殷烈公賜牌之區   斗芳洞壑之門

은열공사패지구   두방동학지문

은열공 강민첨 사적비(殷烈公 姜民瞻 事蹟碑)

高麗推誠致理翊戴功臣 金紫興祿大夫兵部尙書 知中樞院事兼 太子太傳 殷烈公姜民瞻將軍 事蹟碑

고려추성치리익대공신 금자흥록대부병부상서 지중추원사겸 태자태전 은열공강민첨장군 사적비

고려사절요의 은열공 강민첨(殷烈公 姜民瞻,963~1021)

고려사에 따르면 진주(晉州) 진강현(晉康縣) 출신이며

나이나 아버지의 이름은 나와있지 않고 목종 연간에 과거에 급제했다.

 

1010~1011년 제2차 여요전쟁 시기에는 애수진장(隘守鎭將)이었다.

애수진은 지금의 함경남도 문천시 또는 고원군 인근이다.

이는 동북면의 지명이므로 통주 전투에서 고려군이 대패하자

동북계의 군대가 서경으로 전환 배치될 때 같이 서경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경 전투 중 동북면 군대가 궤멸하자 통군녹사 조원(趙元), 낭장 홍협(洪叶)·방휴(方休) 등과 함께

서경에 남아 조원(趙元)을 병마사로 추대하고,

신사에 점을 쳐보니 길한 점괘를 얻었다며

병사와 백성들을 독려하고 서경을 끝까지 지켜내는 공로를 세웠다.

 

1012년 현종3년에 도부서 문연(文演), 감찰어사 이인택(李仁澤), 전중시어사 조자기(曺子奇) 등과 함께

해안 방어 부서인 도부서(都部署)의 일원으로서 동여진(東女眞)의

동남 지방(청하현, 영일현, 장기현) 침략을 막아내기도 했다.

1016년에 내사사인이 되어 내사문하성에 들어갔다.

 

1018년~1019년 제3차 여요전쟁 시점에는 대장군이었다.

상원수 평장사 강감찬을 보좌하는 원수로서 삼교천 전투, 귀주 대첩에서 거란군을 무찔렀다.

1019년 응양상장군 주국(柱國, 훈위)이 되고

1020년(음력 1019년) 우산기상시가 되어 내사문하성 낭사의 최고위직에 오르고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이 되었다. 이어 (음력 1020년) 병부상서, 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021년 졸한 후 태자태부가 추증되었다.

1025년 강민첨(姜民瞻,963~1021)의 아들 강단(姜旦)과

하공진(河拱辰, ?~1011)의 아들 하칙충(河則忠)에게 관직이 더해졌다.

1046년 벽상공신이 되었다.

 

은열공 강선생 실기에 따르면

고려사(절요)나 금석문에 나타나지 않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963년 11월 29일 강주(康州, 진주의 옛 이름) 개경향(開慶鄕)에서

아버지 원윤 강보능(姜甫能)과 어머니 거창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84년 9월                                                   

朔寧人 崔寅巑 謹撰 二十六世孫 姜亨植 謹書

삭녕인 최인찬 근찬 이십육세손 강형식 근서

//은열공 강민첨(殷烈公 姜民瞻) 가계//

아버지 원윤 강보능(姜甫能)

어머니 거창신씨

            은열공 강민첨(殷烈公 姜民瞻, 963~1021)

                자 태자태사 강단(姜旦)

                        손자 밀직부사 강항(姜恒)

                        손자 예빈경 강보(姜輔)

                                증손자 상락부원군 강보문(姜輔文)

                                            현손 한림시강 강운익(姜雲翼)

                                증손자 좌정승 강정협(姜貞叶)

                                증손자 판사 강정길(姜貞吉)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