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유씨 강원도관찰사 개산 유석(皆山 柳碩)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산 5-6
강원도관찰사 개산 유석(皆山 柳碩) 묘소 측경↑ 후경↓
강원도관찰사 개산 유석(皆山 柳碩) 신도비
유석 선생 묘 및 신도비
朝鮮國故通政大夫守江原道觀察使兼 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 晋州柳公 神道碑銘并序
조선국고통정대부수강원도관찰사겸 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 진주유공 신도비명병서
崇政大夫 行判中樞府事 趙絅 撰
숭정대부 행판중추부사 조경 찬
通訓大夫 前行三陟府使 許穆 書 并篆
통훈대부 전행삼척부사 허목 서 병전
유석 신도비(柳碩神道碑) 조경(趙絅)
1690년 지금의 안산시 부곡동에 유석(柳碩, 1595∼1655년)의 사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이다. 용주 조경(龍洲 趙絅,1586~1669)이 짓고, 미수 허목(眉叟 許穆,1595~1682)이 쓰고 전을 하였다. 자는 덕보(德甫) 호는 개산(皆山)이며,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아버지는 사옹원정(司饔院正)을 지낸 성산 유시회(星山 柳時會)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서 상주판관(尙州判官)을 지낸 권길(權吉,1550~1592)의 따님이다. 1625년 31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사간원 등의 관직을 역임한 뒤 강원감사를 지냈다. 성품이 강직하고 문장을 잘 지하여, 남곽 박동열(南郭 朴東說,1564~1622)이 그의 변려체(騈儷體) 문장을 소동파(蘇東坡)의 경지에 들어갈 만하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병자호란 때 척화파인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1570~1652)을 통렬히 논박하기도 했다. 부인은 경주이씨로 승지 이정혐(李廷馦)의 딸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비문을 통해 개산 유석(皆山 柳碩)의 이력과 당시 정치적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유공(柳公)의 휘는 석(碩)이요, 자는 덕보(德甫)이며, 호는 개산(皆山)이니, 만력 을미년(1595년)에 출생하시어 다음 을미년(1655년)에 돌아가셨다. 선계는 진주에서 나왔으며 조의 휘는 격(格)으로서 정언을 지냈다. 부친은 휘가 시회(時會)로서 사옹원 정을 지냈으며, 부인은 안동 권씨로 임진왜란 때 순국한 상주판관 길(吉)의 따님이다.
공의 사람됨이 강직한 것은 타고난 품성이었다. 우뚝 서서 독자적으로 행한 지조를 가지고 문장을 지었던 것도 역시 그의 사람됨이었다. 선배인 남곽 박동열(南郭 朴東說,1564~1622) 같은 이는 공께서 지은 변려문을 평하여 가히 소장공(蘇長公)의 문하에 들어갈 만하다고 칭찬하였다. 또한 공은 정사에도 뛰어난 능력이 있어 인조대왕을 거의 30년 동안 모셨고 효종대왕을 칠년 동안이나 섬겼다. 두 임금의 지우를 받아 은총을 입음이 결코 적었다고는 할 수 없겠다.
을축년(1649년)에 왕자 기(琪)께서 문망(文罔)을 당하니 공이 이르기를 “포속(布粟)의 노래는 한 문제도 싫어하였거늘 하물며 지금에 와서 그러한 말을 올릴 수 있겠느냐?” 하고 항소를 올려 극언을 하였다. 이에 조정대신들의 물의가 사방에서 분분히 일어나 공을 공격하였으나 상께서는 오히려 비답하기를 “공의 언론이 정직하다.” 하니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신하를 알기로는 임금만한 이가 없다.”고 하였다.
정축년(1637년)에 이르러 왕께서 호적들에게 굴욕을 당함이 말도 못할 정도였다. 상서 김상헌(金尙憲)은 본래 뛰어난 절의로서 스스로 기약하고 있었으나 마침내 왕보다도 자신의 이해만을 우선한다는 평을 면치 못하였다. 이때 공은 장령으로 있었는데 이를 가차 없이 논박하였다. 공의 일생이 예구(羿彀) 중에 있었던 것은 이 두 가지 일 때문이라고 한다.
부인 경주 이씨는 승지 정혐(廷馦)의 따님인데, 공과는 덕으로서 결합하여 일남 일녀를 두었다. 아들 명천(命千)은 장가를 들자 바로 죽었고, 딸은 군수 홍주(洪柱)에게 출가하였다. 계자 만최(萬最)는 진사이니, 승지 안후열(安後說)의 사위이다. 공은 종제인 응교 영(潁)의 셋째아들인 명천(命天)으로서 후사를 잇게 하였던 바, 명천은 19살 때 진사에 합격하였다. 공이 몰하자 안산 부곡리(釜谷里) 간좌(艮坐, 동북을 등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 후 칠년이 되던 해에 진사께서 자당 이부인의 명으로 공의 행적과 경력을 기록하여 나에게 와서 부탁하기를 “오직 집사라야만 내 남편을 안다 할 수 있기에 감히 묘도의 글을 청하옵니다.” 하였다. 나는 도의상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마침내 서를 쓰고 명을 다음과 같이 쓴다.
유씨는 진주에서 나왔으며 시조는 휘 정(挺)에서 비롯되었다.
홍림(洪林)은 벼슬이 추밀이었는데 현달함은 다른 사람들이 따르지 못하였다.
참으로 훌륭하였도다. 양화는 고려조에 크게 이름을 날리었다.
그 후손들도 계속 이름을 떨쳤도다.
오대를 지나 종식은 가문을 빛내고 은덕이 많아 후손들에게 그 영광을 돌아가게 하였다.
사간원에서는 언론으로 이름을 떨치니 누가 이에 짝할 것인가?
후사를 이은 장공(長公)은 진사에서 출발하여 여러 차례 수령을 지냈는데 으뜸가는 치적을 뉘라서 다하리오.
힘겹게 삼품에 올라 사옹원의 장이 되었다.
열문에서 배필을 구하여 공을 낳았도다.
공은 어려서부터 뛰어나서 풍골이 준정하였다.
과거에 합격하니 때는 그의 나이 아주 어렸을 때이다.
의정부에서 활보하니 남들이 모두 바라보았도다.
을축년(1625년)에 봉장(封章) 올리니 지극한 마음은 붉었도다.
왕에게 간쟁하는 것 무엇이 잘못이랴? 너그러이 법이 관대하였도다.
임금의 가르침 아름다우나 여러 사람은 더욱 시끄러웠다.
나아갈 길은 막힐지언정 바른 말은 그만두지 않았다.
정묘년(1628년)에 서쪽 오랑캐가 쳐들어왔는데
공은 그때 산직(散職)에 있었으나 분조(分朝)로 달려가 안부를 물었네.
난리는 평정되었건만 어찌하여 적소가 가로놓였단 말인가!
누구만 같지 못하여 골짜기에 매어둔단 말인가.
성균관을 거쳐 말을 탔으니 어찌 적신지탄(積薪之歎)을 응하리,
개성에 경력으로 가니 관장이 방자하고 헐뜯었다.
죄인이 되었다가 바로 풀리니 어찌 밝은 날이야 없겠는가?
정축년에 사유(師儒)를 제수 받아 관에 나아가니 사람들은 그가 늦게 옴을 한탄하였네.
백부(栢府, 사간원)는 공직이라 언론은 강직하였는데 어떻게 말을 아니하랴?
교만하고 임금을 속임은건 공이 가장 미워하는 바인데
아! 지금에 와서 수탄(袖彈)을 쏘는 것은 옛날과 같지 않구나!
세전(袖彈)도 놀라 봉명과 같다고 비답 내렸네.
잇달아 세차게 나왔으나 공의 명성을 누가 다투겠는가?
돌이켜 보매 공의 재주와 슬기는 세상에서 참으로 버리기 어렵도다.
들어가면 교서를 짓고 나오면 포장을 받았네.
영광의 공적은 창창하여 더욱 빛났도다.
흉년에 진휼하니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그로 인해 연명하였던가!
이로서 대농(大農)이 진언하니 품질 오름은 이 때문이다.
예악을 관장하였고 용후(龍喉)와 기성(騎省)과 수조(水曺, 공조)를 출납하시었다.
비록 아려(亞旅, 상대부)로 있었으나 주관을 버리지 않았다.
영동을 관찰할 때 문득 국상을 당하니,
용호(龍胡)가 막북에서 물여우처럼 틈을 엿보아
복구지법(僕區之法)을 행한 것처럼 간특한 자들을 적복(摘伏)하였다.
국원(國原)에서는 수염을 떨쳐 일어나고
금성에서도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고 세금을 고르게 하여 빠짐이 없도록 하였다.
입 다물고 사는 것이 어찌 해로울 게 있으랴?
돌아와 문을 닫고 한가하게 살면서 겨우 「한거부(閑居賦)」를 읊으면서
기나긴 밤 탄식으로 세월을 보냈다.
공의 수립한 바는 내행(內行)을 근본으로 삼았다.
삼생(三牲)의 봉양이 있고 온 집안도 모여들었다.
어려운 세상을 살았는데 세도의 부정과는 타협하지 않았다.
온 세상이 백안시하였으나 알아 준 이는 저상(渚相)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밀어준 것이 무엇이 있느냐
말로만 추켜 주었을 뿐인 것을! 그러나 이것은 모두 명이 아니겠는가?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불후한 행적이 있는데 묘는 작은들 어떠하랴!
나는 지금 빗돌에 새길 명을 쓰고는 있지만 그 말이 흡족하지 못함을 탄식하도다.
선비 정부인(貞夫人) 이씨는 정유년(1597년)에 출생하시었으며 본적은 경주이다. 부친은 승지 정험(廷馦)이요, 조부는 사직령 탕(宕)이요, 증조는 진사 달존(達尊)이요, 외조는 군수 오이순(吳以順)이다. 정부인은 어려서부터 법문에서 젖어 익히 의를 들었으며 16세에 출가하니 거동이 조용하고 틀이 잡혀 자연히 큰사람의 운치가 엿보였다. 온화한 덕성은 조금도 악착스러운 데가 없었다. 일을 처리함에는 물정에 맞게 하였으며 식견은 뛰어나 뚜렷이 통달한 선비와 같은 곳이 있어 선군께서도 간혹 의심쩍은 일이 있으면 곧 물어서 결정하곤 하였다. 누이동생 영인(令人)이 일찍 홀로되어 집안도 빈궁하고 의지할 곳도 없으니 여종을 보내어 생계를 돌보게 하였고 이웃에 집을 빌려주어 왕래가 편케 하고 조석 음식이나 여름 겨울 옷가지를 모두 집에서 마련하여 영인이 걱정하지 않도록 하였다. 여러 종들을 무애하여 정의를 다하였으니 모든 일이 이와 같았다. 을유년(1645년)에 외아들을 잃고 슬퍼함이 병이 되었고 을미년(1655년)에는 가장의 상을 당하여는 채소와 미음으로만 들면서 예법에 지나쳤으나 변함없이 십수 년을 지냈다. 내가 입양하였을 때에 나이 이미 장성하였었으나 기출과 다름없이 애교가 두루 지극하였다.
경신년(1685년)에 내가 지례(知禮)로 귀향을 가게 되었는데 신유년(1681년) 사월에는 배소로 따라와 우연히 한열증(感寒熱)에 걸려 임시 거처에서 세상을 뜨시니 향년 85세이셨다. 틀림없이 불초한 불효가 하늘에 닿아 천리 길을 흔들리면서 오셔서 하잘것없는 질병으로 돌아가시니, 이 아픔은 하늘과 땅이 다하도록 끝이 없을 것이다. 10년 후에 나는 은혜를 입어 시임 이조판서가 되고, 선고에게 이조판서와 예에 따른 겸직을 증직하게 되었다. 나는 아들이 없어, 판서 명현(命賢)의 아들을 데려와 이제 팔세이고, 딸 셋은 세마 조구완(趙九畹), 강학(姜㰒), 진사 목천임(睦天任)에게 출가하였다. 조구원은 사자를 두었는데, 아직 어리고 홍만최(洪萬最)는 지금 공조 낭청이며 칠자를 두었는데, 중정(重鼎)과 중현(重鉉)은 다 같이 승문원 정자이다. 선비(先妣)의 세계와 자손들의 관작이 비문 지을 때 기록되지 않았기에 불초자 명천(命天)은 눈물 흘리며 추기한다.
강원관찰사 개산 유석(皆山 柳碩)의 장남 판중추부사 퇴당 유명천(退堂 柳命天)
판중추부사 퇴당 유명천(退堂 柳命天,1633,인조11∼1705,숙종31)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사원(士元)이고 호는 퇴당(退堂)이며 본관은 진주다.
1672년(현종13) 40세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1675년(숙종1) 남인이 집권하자,
정언, 헌납이 되고, 이듬해 교리, 동부승지, 대사간, 부제학을 거쳐,
1677년 대사성, 이조참의, 이듬해 좌부승지가 되었다.
1680년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경신대출척으로 파직되고,
이듬해 음성에 귀양 갔다가, 1683년 풀려났다.
1688년 강계부사, 1689년 기사환국으로 공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좌참찬, 우참찬, 예조판서, 제학, 이조판서가 되었다.
1691년 판의금부사, 이듬해 호조판서, 지경연사가 되고
1693년 한성판윤,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694년 숙종 20년 62세에 숙종의 폐비 민씨(閔氏) 복위운동을 둘러싸고
소론이 남인을 몰락시킨 갑술옥사로 파직되고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1699년 5년간의 유배에서 풀려나다.
1701년 장희빈의 오빠인 장희재(張希載,1651~1701)와 공모하여
인현왕후를 모해하려 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나주 지도(智島)에 안치되었다가, 1704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강원도관찰사 개산 유석(皆山 柳碩)의 손자 초원 유모(椒園 柳模)
퇴당 유명천(退堂 柳命天)과 초원 유모(椒園 柳模) 묘역후경
전면으로 영동고속도로 안산시 부곡동 부분
강원도관찰사 개산 유석(皆山 柳碩)의 증손자 휴재 유경용(休齋 柳慶容)
휴재 유경용(休齋 柳慶容) 묘역 후경
강원도관찰사 개산 유석(皆山 柳碩)의 현손 문인화가 통덕랑 근재 유신(勤齋 柳賮)
근재 유신(勤齋 柳賮)의 배위 공인 남양홍씨
通德郞晉州柳賮妻 恭人南陽洪氏墓
통덕랑진주유신처 공인남양홍씨묘
參軍公墓在 峝子坐
참군공묘재 동자좌
강원도관찰사 개산 유석(皆山 柳碩)의 5대조 한성부참군 유팽수(柳彭壽)
6대조 사복시정 유영정(柳永貞)
7대조 공조참판 유종식(柳宗植)
강원도관찰사 개산 유석(皆山 柳碩)의 고조부 별제 유윤(柳潤)
증조부 진사 유영문(柳榮門)
조부 정언 청만 유격(晴巒 柳格)
부친 사옹원정 성산 유시회(星山 柳時會,1562~1635)청문당,
//진주유씨 강원도관찰사 개산 유석(皆山 柳碩) 가계//
7대조 공조참판 유종식(柳宗植)
6대조 사복시정 유영정(柳永貞)
5대조 한성부참군 유팽수(柳彭壽)
고조부 별제 유윤(柳潤)
증조부 진사 유영문(柳榮門)
조부 사간원정언 청만 유격(晴巒 柳格)
부친 선산부사 성산 유시회(星山 柳時會,1562~1635), 청문당,
모친 숙인 안동권씨 상주판관 권길(權吉)의 따님
숙부 증 이조판서 기정 유시행(朞丁 柳時行)---진안위 유적(晋安尉 柳頔=정정옹주)
강원도관찰사 개산 유석(皆山 柳碩)
배위 정부인 경주이씨, 승지 이정험(李廷馦)의 따님
자 판중추부사 퇴당 유명천(退堂 柳命天,1633~1705), 생부 사인 유영(柳潁)
배위 정부인 한산이씨, 재배위 정부인 고령신씨, 재취위 정부인 한양조씨,
손자 초원 유모(椒園 柳模), 전주이씨, 파평윤씨 창녕성씨
증손자 휴재 유경용(休齋 柳慶容,1718~1753) 전주이씨
현손 문인화가 통덕랑 근재 유신(勤齋 柳賮,1748~1790) , 공인 남양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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