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이씨 예조참판 우당 이택(雨堂 李澤)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하저리 산58-1
예조참판 우당 이택(雨堂 李澤,1509~1573)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자는 택지(澤之),호는 우당(雨堂),1509년(중종4)~1573년(선조6)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예문관검열, 동지중추부사, 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8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곡(哭)하고 벽용(擗踊,슬피 울며 가슴을 치고 몸부림치다)하는 것이
어른처럼 의젓하다고 하여 칭찬을 받았다.
1531년 중종26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8년 30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은 활쏘는 사예(射藝)에도 묘(妙)를 얻어 무인들도 감히 다투지 못하였다.
가히, 문무를 겸비한 재능이라 하였다.
항상, 4명의 아들을 경계하며 말하기를 "악덕을 저질러 선조를 욕 되게 하지 말라."
또한, 출세할 화끈한 손길은 있었으나
공은 바람으로 씻었으며 법망(法罔)이 빈틈이 없었으나 거기에 걸리지 않았다.
충청,전라,황해,경상,함경관찰사를 지내고 경기관찰사에는 두 번이나 역임하고,
한성좌윤을 지낸 후 예조참판에 올라
능히, 여섯 도의 관찰사가 지냈으나 살림은 윤택한 적이 없었다.
공의 임종(臨終) 때에는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사람은 반드시 죽게 마련인데 죽는다고 슬퍼할게 무엇이냐?
다만, 늙으신 어머니가 마음 쓰인다."고 하였다.
평생 동안 청렴과 간결을 숭상하였으며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
문장에 능하여 해서를 잘 써서 해서체(楷書體)의 명필이라 하였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수록되었으며,
작품으로는 경기도 양주에 있는 예조참판임추모비(禮曺參判任樞慕碑)가 있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가 찬한 묘비명이 전한다.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의 개발로 묘소와 함께 이전하여 온
예조참판 우당 이택(雨堂 李澤) 묘비석과 손자 경기관찰사 이구(李逑)의 묘비석
禮曹參判固城李公諱澤之墓 貞夫人密陽朴氏 貞夫人全州李氏祔
예조참판고성이공휘택지묘 정부인밀양박씨 정부인전주이씨부
예조참판 우당 이택(雨堂 李澤) 묘역 후경
예조참판 우당 이택(雨堂 李澤) 묘지명, 율곡 이이(栗谷 李珥) 찬
공의 휘(諱)는 택(澤)이고, 자(字)는 택지(澤之)로, 철성(鐵城, 고성(固城))의 세족(世族)이다. 고려(高麗) 말엽에 문하 시중(門下侍中) 문정공(文貞公) 이암(李嵒), 호(號) 행촌(杏村)이란 분이 있었는데, 필법(筆法)이 절묘해서 송설(松雪) 조맹부(趙孟頫)와 엇비슷하였다. 행촌의 손자 이원(李原)은 우리 태조(太祖)ㆍ태종(太宗)ㆍ세종(世宗)을 두루 섬겨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러 태평 재상(太平宰相)이 되었는데, 호는 용헌(容軒)으로, 이분이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 이지(李墀)는 벼슬이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에 이르렀으며, 할아버지 이육(李陸)은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시문(詩文)을 잘하여 ≪청파집(靑坡集)≫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아버지 이교(李嶠)는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공의 귀(貴)로써 병조 참판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어머니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절도사(節度使) 하성군(夏城君) 성수재(成秀才)의 딸인데 정덕(正德) 기사년(己巳年, 1509년 중종 4년) 9월 25일(갑인)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보통 아이보다 특이하였으며, 겨우 8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곡(哭)하고 벽용(擗踊)하는 것이 어른처럼 의젓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자라서 학업에 힘써 게으름을 피우지 않아 가정(嘉靖) 신묘년(辛卯年, 1531년 중종 26년)에 성균관(成均館)에 선보(選補)되고, 무술년(戊戌年, 1538년 중종 33년) 중종[中廟]의 시학 취사(視學取士) 때 비로소 처음 벼슬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승진하여 박사(博士)에 이르렀으며, 신축년(辛丑年, 1541년 중종 36년)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하여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을 겸직하였으니, 이는 공이 사대 문서(事大文書)를 잘 썼기 때문에 항상 승문원의 직책을 겸한 것이다. 공조(工曹)ㆍ예조(禮曹)ㆍ병조(兵曹)의 좌랑(佐郞),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를 역임하고, 또 공조ㆍ형조ㆍ병조ㆍ호조의 정랑(正郞),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을 역임하였다.
을사년(乙巳年, 1545년 인종 원년)과 병오년(丙午年, 1546년 명종 원년) 사이에는 시의(時議)를 따르지 않다가 좌죄(坐罪)되어 수년 동안 산직(散職)으로 옮겨졌다. 정미년(丁未年, 1547년 명종 2년) 여름에 육진(六鎭)에 흉년이 들어 조정에서 바야흐로 북쪽 변방을 진념(軫念)하였는데, 공에게 어루만져 방어하는 재능이 있다고 하여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을 거쳐 통정 대부(通政大夫)를 제수해서 온성 부사(穩城府使)에 제배(除拜)하였다. 기유년(己酉年, 1549년 명종 4년) 여름 병으로 체직(遞職)되었는데, 떠나온 뒤 백성들이 매우 사모하였다. 의주 목사(義州牧使)ㆍ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ㆍ병조 참지(兵曹參知)를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전직하여 좌승지(左承旨)로 승진하였다.
을묘년(乙卯年, 1555년 명종 10년)에 특별히 가선 대부(嘉善大夫) 품계를 더하여 함경 남도 절도사(咸鏡南道節度使)에 제배하였다. 그 후 관찰사(觀察使)를 일곱 번 지냈으니, 청홍도(淸洪道)ㆍ전라도(全羅道)ㆍ황해도(黃海道)ㆍ경상도(慶尙道)ㆍ함경도(咸鏡道)와 경기(京畿) 두 번이다. 도승지(都承旨)를 한번 지내고,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를 한번 지냈다.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한 번, 참판을 두 번 지냈으니 형조와 예조이다. 만력(萬曆)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년) 예조 참판으로 있다가 병 때문에 면직되고, 그해 9월 29일(병오)에 집에서 졸(卒)하니, 향년 65세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부의(賻儀)와 치제(致祭)를 의례(儀禮)대로 하였다. 12월 15일(신유)에 광주(廣州) 갈마리(葛麻里) 선영(先塋) 옆에 장사하였다.
공은 천성이 온화하고 행실이 평이하여 사람을 대하는 것과 일 처리에 경계(境界)를 두지 않았다. 관직에 있으면서 염근(廉謹)함을 숭상하고, 집에서는 검약(儉約)을 숭상하여 세리 분화(勢利芬華)에 급급해 하지 않았다. 공은 물러나 집으로 돌아와서는 교유(交遊)를 좋아하지 않았고, 벼슬이 아경(亞卿)에 이르렀으나 골목에 거마(車馬)가 없어 마치 한미한 선비 같았다. 그래서 집사람들이 찾아오는 손님이 없음을 조롱하면, 공은 “손님이 없는 것이 나의 참다운 즐거움이다.”라고 하였다.
행촌(杏村)의 후손 가운데는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이 알려진 분이 많았다. 공은 필세(筆勢)가 호건(豪健)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며, 시(詩) 역시 전아(典雅)하였으나 남과 수창(酬唱)함이 적어 세상에 전하는 것이 없다. 사예(射藝)의 묘(妙)를 얻어 무인(武人)들도 감히 다투지 못하였으니, 가위 문무(文武)를 겸비한 재능이라 하겠다. 항상 여러 아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악덕(惡德)을 저질러 선조(先祖)를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만년에는 여강(驪江)가에다 작은 별장을 지어 벼슬에서 물러나 살 계책을 했으나 어머니가 늙으시어 결행(決行)하지 못하였다. 임종(臨終) 때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사람은 반드시 죽게 마련인데 죽는다고 슬퍼할 게 무엇이냐? 다만 늙으신 어머니가 마음쓰인다.” 하였고, 또 나랏일을 걱정하여 말하기를, “나는 이제 어쩔 수 없게 되었다만, 너희들은 마땅히 알아두거라.”라고 하였다.
공의 초취(初娶)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주부(主簿) 박동(朴董)의 딸인데, 딸 하나를 낳아 봉사(奉事) 김가빈(金可賓)에게 시집갔다. 재취(再娶) 이씨(李氏)는 종실(宗室) 광복 부수(廣卜副守) 휘(諱) 존영(存英)의 딸이며 중의 대부(中義大夫) 가은군(加恩君) 이빈(李份)의 손녀이다. 부인은 정덕(正德) 을해년(乙亥年, 1515년 중종 10년) 4월 12일(기해)에 출생하였는데 공의 배필이 된 30여 년 동안 부도(婦道)를 극진히 다하고, 웃어른을 섬기고 아랫사람을 어루만져 환심(歡心)을 샀다. 살림을 잘 꾸려나가 아이들을 기르면서 근심 띤 얼굴로 공의 평소 뜻을 흔드는 일이 없었는데, 을축년(乙丑年, 1565년 명종 20년)에 공보다 먼저 졸서(卒逝)하였다. 4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이경(李磬)은 일찍 죽었고, 다음 이연(李碾)은 무과(武科) 출신의 판관(判官)이요, 다음 이제(李磾)는 찰방(察訪)이요, 다음 이지(李砥)는 진사(進士)이다. 장녀는 유몽표(柳夢彪)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윤희굉(尹希宏)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사인(士人)이다. 김가빈은 3녀 1남을 낳았는데, 장녀는 박계희(朴繼禧)에게, 다음은 최오봉(崔五鳳)에게, 다음은 진사(進士) 신광필(申光弼)에게 각각 시집갔고, 아들은 어리다. 이경은 2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상시손(尙蓍孫)에게 시집갔으니 현감(縣監)이며, 다음은 심효겸(沈孝謙)에게 시집갔으니 진사이다. 이연은 1남을 낳았으니 이구(李逑)이며, 이제는 4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이적(李適)ㆍ이운(李運)ㆍ이섬(李暹)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이지는 2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유몽표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유호(柳浩)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윤희굉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공을 장사지낸 이듬해에 그 고자(孤子)가 나 이이(李珥)에게 비명(碑銘)을 청하였다. 나는 늦게 태어나서 공과 종유(從遊)하지 못하였고, 공의 만년에야 비로소 인접(引接)을 받아 사리를 분별하는 데 거스르지 않음을 완상하였을 뿐, 그 천심(淺深)을 달리 엿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윽한 빛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할까 두려워서 여러 차례 사양했으나, 해를 넘기도록 더욱 부지런히 청하였다. 생각하건대, 내가 일을 살피게 된 이래 당국(當國)한 재상(宰相)들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자기들이 좋아한 사람을 좋게 말하여 끌어들이는 데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 조화(造化)도 빼앗을 만하므로 아첨하기를 하휴1)(夏畦)보다 더하는 자들의 어깨가 서로 연이어졌으나 공은 한번도 그들의 문전을 찾아 벼슬의 지름길을 구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비록 빛나는 명성은 없었지만 화기(禍機)는 밟는 데 이르지 않았으니, 스스로 염담(恬淡)을 지키는 자가 아니면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이는 명(銘)할만한 일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눈처럼 깨끗하니 어찌 쉽게 검어지며, 돌처럼 단단하니 어찌 쉽게 깨어지랴? 오직 명예(名譽)만을 추구하므로 진실하게 실천하지 못하네. 공은 외화(外華)로 치닫지 않고 조용히 세상을 사셨네. 출세할 화끈한 손길 있었으나 공은 바람으로 씻었으며, 법망이 빈틈 없었으나 공은 거기에 걸리지 않았네. 유연하게 벼슬을 물러나서는 자기 힘으로 살아나갔네. 여섯 도의 관찰사가 되었으나 살림은 윤택한 적 없었다오. 나는 공을 청렴하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은 공이 못났다고 하네. 깨끗했으나 과시함이 없었고, 부드러워도 굽힘이 없었네. 임종이 무슨 말 남겼는가? 어머니 생각과 나라 걱정이었네. 어찌 이 명(銘)을 새겨서 숨은 덕 천명(闡明)하지 않으랴?
예조참판 우당 이택(雨堂 李澤) 묘역 측면 상단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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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참판 우당 이택(雨堂 李澤)의 묘역 옆의 묘소??
이 묘소가 우당 이택의 차남 순안현령 이연(李碾)의 묘역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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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택(雨堂 李澤)의 묘역 측면의 석물없는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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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이씨 응봉재(鷹峯齋)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하저길 61-48(하저리 489-2)
응봉재(鷹峯齋)
고성이씨 봉안당(奉安堂)
봉안당(奉安堂)
//고성이씨 예조참판 우당 이택(雨堂 李澤) 가계// 중원구 도촌동 산156-3에서
7대조 회양부사 철성부원군 문헌공 이우(文憲公 李瑀)
6대조 문하시중 문정공 행촌 이암(文貞公 杏村 李嵓,1297~1364)
5대조 밀직부사 문경공 평재 이강(文敬公 平齋 李岡) 광주시 목동 219, 241-4
고조부 철성부원군 양헌공 용헌 이원(鐵城府院君 襄憲公 容軒 李原,1368~1429)
증부조 돈녕부정 증 예조참판 사암 이지(思菴 李墀,1420~1486) 사암공파 파조
조부 병조참판 문광공 청파 이육(文光公 靑坡 李陸,1438~1498)
부친 증 병조참판 이교(李嶠)
모친 경주김씨, 부장 김균(金鈞)의 따님
예조참판 우당 이택(雨堂 李澤,1509~1573)
초배 정부인 밀양박씨, 주부 박훈(朴薰)의 따님, 육1녀
재배 정부인 전주이씨, 종실 광평부수 이존영(廣平副守 李存英)의 따님,
가은군 이빈(加恩君 李份)의 손녀
장남 이경(李磬)-조몰(早歿)
차남 순안현령 이연(李碾)
손자 경기관찰사 이구(李逑)
배위 정부인 남양홍씨, 진사 홍원(洪遠)의 따님
삼남 진사 이제(李磾)
손자 이괄(李适,1587~1624)
사남 진사 이지(李砥), 출계 안혜공 평구 이명규(安惠公 平邱 李名珪,1497~1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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