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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평양조씨 보본단(報本壇),조정숙공사당기,조춘(趙椿),조득립(趙得立),조홍유(趙洪裕),조형(趙瑩),정숙공 조인규(貞肅公 趙仁規),조서(趙瑞),조굉(趙宏),조천미(趙千䆊),충숙공 조련(忠肅公 趙璉),문정공 조덕유(文靖公 趙德裕),조윤선(趙允瑄),문극공 조후(文克公 趙珝),조충신(趙忠臣),고려충신 조견(趙狷)과 망경대(望京臺)

구름에 달

by 碧巖 2025. 10. 1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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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조씨  보본단(報本壇)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27

고려충신 송산 조견 선생과 망경대(松山 趙狷, 望京臺)

고려충신 조견선생(1351~1425)은 이곳에 설단봉향(設壇奉享)한 평양조씨 시조 조춘(趙椿)의 8세손이고, 청계사를 중창한 조인규(趙仁規,문하시중,정숙공)의 증손이다. 공의 초휘는 윤(胤)이고 호는 송산(松山)이며 시호는 평간공(平簡公)이다.

공의 여조(麗朝)벼슬은 지신사(知申事,도승지)까지 올랐고, 여조말 조정에서 공의 굳은 지조를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영남안렴사(관찰사)로 외직케 하고, 이태조(李太祖)가 개국하자 공은 통곡하고 두류산(頭流山,지리산)으로 들어가 이름도 견(狷)으로 고치고 字도 종견(從犬)이라 하였으니, 이는 나라가 망해도 죽지 않음이 개와 같고, 또 개는 옛 주인을 알아보는 의(義)를 취함이다.

이태조가 공의 절개를 찬양하고 재주를 아껴서 호조전서의 벼슬을 내렸으나 공은 끝내 사양하고 서산의 고사리캐기(백이숙제의 절의)를 원한다 하며 곧 청계사로 은거하고, 상봉인 망경대(望京臺)에 매일 올라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통곡을 하다가, 서쪽 약100m 아래 바위굴인 “마왕굴” 일명 “오망난이굴”에서 흘러나오는 찬물로 갈증을 달래던 곳이다.

망경(望京)은 원래 만경(萬景)이라 하여 이곳에 오르면 눈아래 만경이 전개된다는데서 유래한 이름이었으나, 공께서 이곳에 올라 개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하여 세인들이 망경대(고려의 서울을 바라보던 곳)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태조가 공의 형인 조준(趙浚,文忠公)을 대동하고 청계사로 찾아갔으나 상견(相見)되지 않아, 군신지간(君臣之間)이 아닌 옛 정의에 의한 붕우지예(朋友之禮)로 상견을 청하여 서로 읍만하고 마주앉아 새 조정에 나와 도와주기를 간청했지만, 공의 굳은 지조는 금석과 같아서 가히 뺏을 도리가 없다 하고, 청계산의 한 면을 공을 위해 봉(封)하고 석실(石室)을 지어 그의 정절(貞節)을 기리라 하였다. 지금의 원통동(圓通洞) 석축이 남아 있는 곳이 바로 그 터이다.

공은 곧 양주 수락산 기슭의 한 마을(현 의정부 송산마을)로 은거하자, 그 분과 뜻을 같이 하던 여말 충신들이 그 곳으로 모여 은거 생활을 하다가 공은 75세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후세에 공이 살던 곳을 그 분의 호를 따서 송산이라 부르고 있고, 살던 터에는 유허비(遺墟碑)를 세웠으며, 그 마을에 지역 사림들이 송산사(松山祠,경기도 문화재 제42호)를 중건하며, 송산공을 주벽으로 하여 여섯분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양주에도 정절사(旌節祠,사천서원)를 세워, 송산공, 남을진(南乙珍) 두 분 선생을 모시고, 6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사림들이 매년 제사를 올리면서 그 분의 충절을 추모하고 있다.

공의 묘소는 성남시 여수동에 있고, 공의 묘비에 고려 관직만 쓰라는 유훈을 남겼으나, 이조에서 내린 벼슬을 새겨 세웠다가 천둥번개가 내려쳐서, “조공지묘(趙公之墓)” 넉 자만 남겨 보존되고 있다. 공의 묘역 앞에는 근년에 신도비도 새로 세워졌다.

공의 불천위신주(不遷位神主)를 모신 사당은 공주시 우성면 보흥2리에 중건되어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 8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정숙공 사당기(趙貞肅公 祠堂記)

지정(至正)으로 언년을 고치던 봄 곡(穀)이 정동막(征東)에 있을제 찬성사 조공(贊成事 趙公)이 그 조카 평원군(平原君)과 가전(家傳)을 가지고 와서 나의 글을 청하며 말하기를 「선군(先君) 정숙공(貞肅公)의 공로가 사직에 있어 덕이 뒷세상에 전해야 할 것인데 비록 산소에 지명(誌銘)이 있기는 하나 신도(神道)에 비가 없고 가승이나 국사(國史)는 사람들이 얻어 보기가 어려우니 오래 되면 인멸되고 매몰되어 아는 이가 없어질까 두렵고 또 선군이 일찍기 집 뒤에다 당을 짓고 평소에 거처하는 처소로 하고 지원(祗園)이라고 이름하였다. 이제 그 가운데에다 선군의 화상을 걸어 모시고 시절따라 제사 지내고 네모난 돌을 뜰 가운데에 세우고 그 공덕을 갖추어 새겨서 자손들로 하여금 익혀 듣고 새겨들어 선군의 뜻을 저버리지 말고 선군의 훈계를 잊지 아니하게 하려하니 그대는 사양하지 말라」하나, 그때에 내가 마침 임기가 차서 도하(都下)로 돌아오게 되었으므로 그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였다. 이제 정숙공의 아들 삼장법사 선공(旋公)이 지팡이를 연산(燕山)에 머무르고 있으므로 매양 나를 보면 그 일을 말하게 되고 또 말하기를 「비록 부도의 법을 배우기는 하지만 호천망극한 부모의 은혜를 어찌 감히 잊을 수 있겠는가」하고 그 하는 말이 더욱 간절하고 그 청하는 것이 더욱 근실하니라 곡(穀)이 이에 대강 서술하노라. 세상이 생긴지가 오랜지라 한번 태평하면 한번 소란하였는데 근래에 당나라가 쇠약해짐에 오계(五季)가 크게 소란하였고 요(遼)와 금(金)이 송나라와 남북으로 분열되어 싸우고 다투는 것이 그치지 아니하여 민생이 심히 도탄에 빠졌으나 하늘이 경사스런 운수를 열어주어 성인이 계속해서 나고 이름난 신하가 무리로 나와서 육합(六合)을 하나로 통일하고 여러 뜻을 정하였으며 문궤(文軌)를 같이 하고 풍속을 고쳤으니 주역에 이르기를 「크구나 건원(乾元)이어 만물이 의지하여 시작해 나온다」하였음은 오직 원(元)나라가 그러한 것이다. 정숙공이 고종(高宗)二十四년 정유년에 낳았는데 그때에 겨우 변채(汴蔡)를 거두었으므로 천하가 거의 정하여졌으나 남쪽으로 정벌하고 북쪽으로 토벌하는 것이 채 끝나지 아니하였고, 본국은 비록 이미 화친하였으나 권신(權臣)에게 제재되어 도읍을 강화로 옮기고 술직(述職)하는 것을 제때에 하지 아니하여 원병(元兵)이 국경을 누르니 이 역시 나라의 운명이 안위에 처한 기회요. 사람 마음이 향하거나 배반하려는 즈음이다. 풍속과 습관이 옮기고 변하기 시작하여서 삼한이 다시 시작되는 때이라, 그런 때를 당하여 이(夷)와 하(夏)가 처음으로 통하게 되니 위의 덕을 선포하고 아래로 정을 통하게 함에는 통역하는 사람에 의뢰하게 되거늘 공이 한어(漢語)를 잘하고 언변에 능숙하다하여 발탁되어 높이 날리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평화로운 복장으로 조정에 나서서 빈객들과 말을 통하였고 끝내는 임금을 높게 하고 백성을 보호하여 사직의 신하가 되었으니 공의 일생을 보면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지원(至元) 기사년에 충렬왕이 세자로서 들어가 보일적에 공이 쫓아갔었고 갑술년에 원제의 딸을 이강(釐降)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는데, 그 면류관 앞에 들어가 대하면 이되고 해되는 것을 역력히 진술하고 나와서는 기설(旣設)을 지고는 어렵고 험한 일을 갖추어 겪으면서도 권간(權姦)을 주륙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고 도읍을 회복하여 나라를 바르게 하였다. 모퉁이의 백성으로 희희낙락하게 베개를 편히 베고 이제까지 이르게 하였음은 공의 공로가 많은 것이다. 처음 조정에서 보낸 흑적(黑的)이 감정을 품고 말을 만들어서 분란을 일으키려 이미 원제에게 잘못을 듣게 하였던 것과 탐라와 평양 사람이 내군(萊郡)으로 직속하여 도리어 그 주인을 짖었던(吠) 것과 유둔(留屯)해 있는 장교들의 떼어먹고 해하는 이를 곧 모두 파면해서 가게 하였고, 그 뒤 유리하는 백성과 노략 당하여 요동과 심양에 붙들려 있는 자를 모두 제 나라로 돌아오게 한 것이라든가, 간사한 신하들이 의존을 제창하여 두 번째 일본을 정벌하자하고 그로하여 군의 큰 일이 벌어진 것을 기회로 우리나라를 먹고 해롭게 하려는데 그 일을 중지시킨 것도 모두 공이 애써서 잘 대답한 힘이었다. 무릇 왕이 공을 보내서 주청(奏請)함에는 <원제에게> 곧 불러들여 보고 위무하기를 참으로 흡족하게 하며 말하는 바를 일찍 들어주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세조(世祖)가 한 번은 이르기를 「그대는 중국 사람이 아닌가, 어떻게 그렇게 아뢰고 대답하는 것이 상세하고 명석한가. 말하는 거라든가 행동하는 것이 조금도 동쪽나라 사람같지 아니하다」하였으니 장하다. 중흥의 공을 따진다면 공의 위에 나갈 자가 없을 것이다. 공의 휘는 인규(仁規)요 자는 거진(去塵)이니 평양군사람으로 아버지의 휘는 형(鎣)이니 금자광록대부 추밀원부사를 증식하였고 어머니 이씨는 내원숭(內園丞) 문간(文幹)의 딸로서 토산군부인(土山郡夫人)을 봉하였다. 부인의 꿈에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더니 얼마 있다가 태기가 있어 공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남달리 뛰어났고 장난하고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더니 좀 자라 글읽기를 알면서부터 대강 뜻을 통할뿐으로 곧 그만두고, 가서 군사 직무에 종사하여 처음에는 하급간부로 시작하여 여러번 승진하여 장군이 되고, 지합문사(知閤門事)가 되고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고 좌승선(左丞宣)이 되어 네 번째 승진하여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銀靑光綠大夫 樞密院副使)가 되고 또 승진하여 어사대부 태자빈객(御史大夫 太子賓客)이 되었고 빈객에서 금자광록대부지 문하성사(金紫光綠大夫知 門下省事)가 되었다가 곧 평장시랑(平章侍郞)으로 승진되었는데 경인년에 특별히 가의대부 고려왕부 단사관(嘉儀大夫 高麗王府 斷事官)에 임명하고, 이어 금으로 된 호부(虎符)를 내어주어서 그 능한 것을 표창하였고, 임진년에 시중(侍中)을 더하였으며 대덕 을사년에 또 다시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로 승진되었다가, 정미년에 나이가 많음으로 사직할 것을 청하여 공신 칭호를 하사하고 평양군(平壤君)에 봉하고 군부(郡府)를 설치하고 사무관원을 두게 하였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그 집에 가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였는데 이듬해에 병이 나자 아들이 이름있는 의원을 청하여 보게 하니 공은 말하기를 「내가 머리 올려 상투를 짜면서부터 나라일에 봉사하여 나이 이제 七十이 넘었고 벼슬이 一품에 이르렀다. 또 죽고사는 것은 명(命)이 있는 것인데 의원이 어떻게 한다는 것이냐」하였다. 그때에 여러 아들이 모두 원(元)에 가 있고 오직 충숙공만이 옆에 모시고 있었으므로 말씀하기를 「그 나라를 다스리려면 먼저 그 집을 다스려야 한다. 옛날에도 형과 아우가 있다. 실로 서로 좋아함보다 나은 것이 없으리라고 이르지 않았느냐. 네 집에는 동기(同氣)가 많이 있으니 삼가 화내고 다투지 말라. 남의 웃음거리가 되리라. 너의 형제가 다오거든 갖추어 기록하였다가 훈계하고 그것을 가법(家法)으로 삼으라」하고 四월 二十五일에 병이 위독하므로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단정히 앉아서 운명하니 나라의 여러 선비와 시민들이 쫓아가서 곡하면서 말하기를 「공이 평생 정직하다고 들었더니 이제 그대의 죽는 것을 보며 바로 살아 있을 때를 알 수 있노라」 하였다.

부고가 왕에게 올라가니 왕이 「하늘도 무심하여 원로를 남겨 주지 아니하였다」고 탄식하며 부의하고 장사지내는데 예절을 더하게 하고 시호를 정숙공(貞肅公)이라 내려 주었다. 배필되는 이는 사재경(司宰卿) 조온여공(趙溫呂公)의 딸로서 五남四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서(瑞)로 과거에 급제하여 특별히 회원대장군 고려부도원수 삼사사(懷遠大將軍 高麗副都元帥 三司使)로 임명되어 시호를 장민공(壯敏公)이라 하였고 둘째는 연(璉)으로 벼슬이 중의대부 왕부단사관 첨의찬성사(中議大夫 王府斷事官 僉議贊成事)에 이르렀는데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라 하였고 또 셋째는 연수(延壽)로 춘관(春官)에 급제하여 특별히 소용대장군 관군만호 삼사사(昭勇大將軍 管軍萬戶 三司使)에 임명되었고

넷째는 의선(義旋)이니 특별히 정혜원통 지견무애 삼장법사(定慧圓通 知見無碍 三藏法師)의 호를 하사한

 천원연성사주지 겸 본국형원사주지 복국우세 정명보조 현오대선사 삼중대광 자은군

(天源延聖寺住持 兼 本國瑩原寺住持 福國佑世 靜明普照 玄悟大禪師 三重大匡 慈恩君)이요.

다섯째는 위(瑋)인데 지금 중대광 첨의찬성사(重大匡 僉議贊成事)로 있고 큰딸은 좌승선(左承宣) 노영수(盧穎秀)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강절평장(江浙平章) 오마아(烏馬兒)에게 시집갔으며, 셋째는 대호군(大護軍) 백효주(百孝株)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호부시랑(戶部侍郞) 염세충(廉世忠)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몇 되는데 원수의 큰아들은 굉(宏)이니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교부령(典校副令)에 이르렀고 다음은 천사(千𥛴)이니 진사에 급제하여 지금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으며 또 다음이 천유(千裕)이니 지금 원윤(元尹)이 되어 있고, 딸은 안길왕(安吉王) 야아길니(也兒吉尼)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판서(判書) 김경직(金敬直)에게 시집갔으며 또 다음은 연덕대군(延德大君) 진(璡)에게 시집갔다. 단사관의 큰아들 사민(斯民)은 지금 낭장(郎將)이 되어 있고, 다음은 덕유(德裕)는 지금 봉의대부 왕부단사관 판전의시사(奉義大夫 王府斷事官 判典儀寺事)가 되어 있고, 다음은 윤선(允瑄)이요, 또 다음은 보해(普解)니 머리를 깎고 중천태교선(中天台敎選)이 되어 있고, 딸은 만호(萬戶) 권형(權衡)에게 시집갔으며, 그 다음은 우상시(右常侍) 김상린(金上璘)에게 시집갔다. 만호의 큰 아들은 충신(忠臣)이니 지금 선무장군 관군만호 삼사좌윤(宣武將軍 管軍萬戶 三司左尹)이 되어 있고 다음은 신(信)이요. 딸은 낭장(郎將) 김휘산(金暉山)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상호군(上護軍) 윤지표(尹之彪)에게 시집갔다. 찬성사의 아들 흥문(興門)은 지금 소부윤(少府尹)이 되어 있다. 외손도 몇명 되는데 큰딸의 아들 탈(頉)은 지금 경양군(慶陽君)에 봉해 있고 딸은 판서 허부(許富)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삼사사(三司使) 김상기(金上琦)에게 시집갔다. 셋째딸의 아들 충윤(忠胤)은 지금 전리좌랑(典理佐郞)이 되었고 딸은 상호군 이권(李權)에게 시집갔으며 그 다음은 별장(別將) 김오만(金五萬)에게 시집갔다. 넷째딸의 큰아들은 효신(孝臣)이니 지금 삼사좌윤으로 있고 다음은 불노(佛奴)는 지금 익정시승(翊正寺丞)이 되어 있고 딸은 호군 민현(閔現)에게 시집갔다. 증손 이하는 매우 많으므로 다 기재하지 아니하였다. 공은 성질이 명랑하고 민첩하며 외양이 웅장하고 크며 말이 적고 풍채가 아름다웠다. 물건에 접촉할 때 관대하고 화평하며 일을 대하면 강직하고 정대하여 四대의 임금을 도와서 장하게도 원로가 되었다. 성품이 또 착한 것을 좋아하여 시여(施與)해 주는 것을 기뻐하였으며 더욱 불교에 독실하여 청계불사(淸溪佛寺)를 창건하고 임금을 위하여 복을 축원할 때 묘전(妙典)을 금으로 쓰고 해장(海藏)을 먹으로 판박이고 불상을 그림으로 그린 것을 이루 다 기록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집을 다스리는 데에 이르러서는 엄격하고 이들 가르치기를 옳은 것으로 하여 공이 늙기 전에도 자손들이 많이 달관명사(達官名士)가 되어서 중외(中外)에 널리 있었고, 이미 죽은 뒤에도 모두 가훈을 따라서 효도하고 우애하기를 화락하게 하여 사람이 딴말을 하지 못하니 시구(鳲鸠)의 평균함과 척령(脊令)의 어려움을 급히 보아 주는 것에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보통 사람의 정은 오래되면 날로 잊는 것이건만 공이 죽은지 삼기(三紀)가 넘건만으 그런데도 또 인멸되지 아니할 것을 생각하여 죽은 이 섬기는 것을 산 사람처럼 하는 것이 이 같으므로 이를 기록하노라.

추기(追記)

조정숙공사당기는 원래 서기1342년 가정 이곡(稼亭 李穀)이 글을 짓고 왕수성(王守誠)이 전자(篆字)로 제자(題字)를 써서 서기1344년에 정숙공께서 창건한 청계사 경내(境內)에 세워졌는데 여러번의 병화에 시달려 지하에 묻혀 백비상태(白碑狀態))로 되어있던 것을 발견하여 현재위치에 보존하여 왔다. 자손들 가운데 백비가 된 것을 통탄(痛歎)하고 개역수비(改易竪碑)를 위해 대사헌공파 태호(台鎬)의 아들 한웅(漢雄)과 한남(漢男)이 비용을 봉헌하고 서기1996년 10월에 제모(除摹)하여 원비옆에 세웠다. 이 역문판은 본비가 한문으로 되어있는 비문을 우리의 후세들이 알아보기 어려우므로 국가기관에서 국역(國譯)한 것을 다시 이 판(板)에 새겨 위선사업에 앞장서 주었다.

 

조정숙공 사당기(趙貞肅公 祠堂記), 정숙공 조인규(貞肅公 趙仁規, 1237~1308)

정당문학 문효공 가정 이곡(文孝公 稼亭 李穀,1298~1351) 짓고, 

예부상서 문소공 왕수성(文昭公 王守誠,1296~1349) 쓰다.

중국 원나라의 시인으로 여러번 예부상서에 올랐으며

요,금,송나라(遼,金,宋)등의 삼사편찬에 참여 자정대부 하남행성좌승을 지냄 

                           서기 1996년 10월 일 평양조씨대종회장 조재우(趙載愚) 記

 

평양조씨 보본단(報本壇)

平壤趙氏第一世 高麗金紫光祿大夫 樞密院副使公 椿之位

평양조씨제일세 고려금자광록대부 추밀원부사공 춘지위

1세조  조춘(趙椿)

平壤趙氏第二世 高麗乾陵直 追封興祿大夫 尙書右僕射公 得立之位

평양조씨제이세 고려건릉직 추봉흥록대부 상서우복야공 득립지위

2세조  조득립(趙得立)

平壤趙氏第三世 高麗散員 追封金紫光祿大夫 樞密院副使

判都僉議典理司事公 洪裕曁配高氏之位

평양조씨제삼세 고려산원 추봉금자광록대부 추밀원부사

판도첨의전리사사공 홍유기배고씨지위

3세조  조홍유(趙洪裕)

平壤趙氏第四世 高麗別將 贈金紫光祿大夫 樞密院副使

吏部尙書 上將軍公瑩曁 配土山郡夫人 祥原李氏之位

평양조씨제사세 고려별장 증금자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이부상서 상장군공형기 배토산군부인 상원이씨지위

4세조  조형(趙瑩)

平壤趙氏第五世 高麗 宣忠翊戴補祚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金紫光祿大夫 守太尉

判中書門下吏兵部事 上將軍 平壤府院君 諡貞肅公 仁規曁 配興陽郡夫人 漢山趙氏之位

평양조씨제오세 고려 선충익대보조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수태위

판중서문하이병부사 상장군 평양부원군 시정숙공 인규기 배흥양군부인 한산조씨지위

5세조 정숙공 조인규(貞肅公 趙仁規)

平壤趙氏第六世 高麗檢校贊成事都元帥 平壤君 諡莊敏公瑞 配淸州韓氏之位

평양조씨제육세 고려검교찬성사도원수 평양군 시장민공서 배청주한씨지위

6세조 평양군 장민공 조서(莊敏公 趙瑞)

平壤趙氏第六世 高麗壁上三韓三重大匡 都僉議贊成事 上護軍 諡忠肅公 璉曁

配上洛郡夫人 安東金氏 繼配孔巖郡夫人 陽川許氏之位

평양조씨제육세 고려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찬성사 상호군 시충숙공 련기

배상락군부인 안동김씨 계배공암군부인 양천허씨지위

6세조 첨의찬성사 충숙공 조련(忠肅公 趙璉)

平壤趙氏第六世 高麗門下侍郞平章事 守司空右僕射寶文閣大學士

上將軍 諡文克公珝曁   配金氏 繼配光山金氏之位

평양조씨제육세 고려문하시랑평장사 수사공우복애보문각대학사

상장군 시문극공후기  배김씨 계배광산김씨지위

6세조 상장군 문극공 조후(文克公 趙珝)

平壤趙氏第七世 高麗正議大夫 秘書監翰林侍讀充史館修撰官 典校副令知制誥公 宏之位

평양조씨제칠세 고려정의대부 비서감한림시독충사관수찬관 전교부령지제고공 굉지위

7세 전교부령 조굉(趙宏)

平壤趙氏第七世 高麗密直副使公 千䆊曁 配慶州金氏之位

평양조씨제칠세 고려밀직부사공 천미기 배경주김씨지위

7세 밀직부사 조천미(趙千䆊)

平壤趙氏第七世 高麗奉翊大夫版圖判書上護軍 贈忠勤亮節宣威佐命翊贊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金紫光祿大夫門下左侍中 版圖評議司事判典理尙書寺事 領孝思觀事 平壤府院君

諡文靖公 德裕曁 配卞韓國夫人 高敞吳氏之位

평양조씨제칠세 고려봉익대부판도판서상호군 증충근양절선위좌명익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문하좌시중 판도평의사사판전리상서사사 영효사관사 평양부원군

시문정공 덕유기 배변한국부인 고창오씨지위

7세 판도판서 문정공 조덕유(文靖公 趙德裕)

平壤趙氏第七世 高麗銀靑光祿大夫 版圖判書三司使 判開城府事 允瑄曁 配瑞山柳氏之位

평양조씨제칠세 고려은청광록대부 판도판서삼사사 판개성부사 윤선기 배서산유씨지위

7세 판개성부사 조윤선(趙允瑄)

平壤趙氏第七世 高麗管軍萬戶三司左尹 平壤君公忠臣之位

평양조씨제칠세 고려관군만호삼사좌윤 평양군공충신지위

7세 삼사좌윤 평양군 조충신(趙忠臣)

정숙공 계자시와  보본단 사적비

趙貞肅公 戒子詩(조정숙공 계자시)--출전 동문선(出 東文選)

事君當盡忠

사군당진충==임금을 섬김에는 마땅히 충성을 다하며

愚物當至誠

우물당지성==일에 임하여는 마땅히 지성할지니

願言動宿夜

원언동숙야==원컨대 밤낮을 부지런히 하여

無忝爾所生

무첨이소생==너를 낳아준 이를 욕됨이 없게하라

 

평양조씨 보본단 사적비(平壤趙氏 報本壇 事蹟碑)

 

정숙공 사적비

평양부원군 정숙공 조인규(貞肅公 趙仁規,1227~1308)

//평양조씨 직계 계보//

1세 추밀원부사 조춘(趙椿)

2세 상서우복야 조득립(趙得立)

3세 전리사사 조홍유(趙洪裕), 배위 고씨(高氏)

4세 이부상서 상장군 조형(趙瑩), 배위 토산군부인 이씨, 내원승 이유분(李有芬)의 따님

5세 평양부원군 정숙공 조인규(貞肅公 趙仁規,1227~1308)

      배위 흥양군부인 한산조씨, 사재경 조온여(趙溫呂)의 따님, 동정 조벽(趙璧)의 손녀

6세 평양군 장민공 조서(莊敏公 趙瑞, ?~1313)

      배위 청주한씨, 중찬 한강(韓康)의 따님, 사경 한광윤(韓光胤)의 손녀

          7세 전교부령 조굉(趙宏)

          7세 밀직부사 조천미(趙千䆊),

         배위 경주김씨, 흥령군 김우창(興寧君 金宇昌)의 따님

6세 첨의찬성사 충숙공 조련(忠肅公 趙璉,1259~1322)

       배위 상락군부인 안동김씨, 도첨의사사 상락군 김흔(上洛郡 金忻)의 따님,

                                                   상락공 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의 손녀

       배위 공암군부인 양천허씨, 중찬 문경공 허공(文敬公 許珙)의 따님

          7세 판도판서 문정공 조덕유(文靖公 趙德裕,1314~1352)

                 배위 변한국대부인 고창오씨, 첨의평리 영익공 오의(榮益公 吳誼)의 따님)

                  8세 전리상서 개성부윤 조후(趙煦)

                  8세 삼사좌사 조정(趙靖)

                  8세 영의정 문충공 송당 조준(文忠公 松堂 趙浚,1346~1405)

                  8세 안렴사 평간공 송산 조견(平簡公 松山 趙狷,1351~1425)

         7세 판개성부사 임정 조윤선(林亭 趙允瑄)

                배위 서산류씨, 태상경 류성계(太常卿 柳成桂)의 따님

6세 문극공 조후(文克公 趙珝)

       배위 김씨, 평장사 상장군 김유지(金由祉)의 따님

       배위 광산김씨, 광산군 김도(光山君 金瑫)의 따님

          7세 삼사좌윤 평양군 조충신(趙忠臣)

6세 삼장법사 순암 조의선(三藏法師 順菴 趙義旋,1283~?)

6세 평양부원군 장경공 조위(莊景公 趙瑋,1287~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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