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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자동서원(紫東書院),남와 강설(南窩 姜渫),기재 강여호(耆齋 姜汝㦿),학암 강석구(鶴巖 姜錫龜),호은 강이화(湖隱 姜履和), 진주강씨

구름에 달

by 碧巖 2025. 12. 12.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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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자동서원(紫東書院)

경북 김천시 조마면 강곡4길 132 (강곡리 797)

임금에게 직언 마다하지 않은 대쪽같은 선비정신 오롯이

자동서원(紫東書院)은 광해군(光海君,1608~1623재위)때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한 남와 강설(南窩 姜渫)과

문신이자 학자였던 그의 아들 기재 강여호(耆齋 姜汝㦿),

그리고 후손인 학암 강석구(鶴巖 姜錫龜)와 호은 강이화(湖隱 姜履和)를 배향한 서원으로

자양산(紫陽山) 아래 동쪽에 앉았다고 해서 강당을 자동서원이라 칭하였다.

서원은 약 100여 평의 땅에 담장으로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을 구분하였으며,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이 일자(一字)로 배치된 형태이다.

강학 공간에는 강당과 대문이 남아 있다.

경거당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사당인 상의사(尙懿祠)가 있다.

조선 정조4년인 1780년 진주강씨의 이곳

조마면 입향조인 강설(姜渫)과 강여호(姜汝호) 부자를 모시는 세덕사(世德祠)가 건립되었으며

정조17년인 1793년에 원모재(遠慕齋)가 건립되었다.

순조11년인 1811년에 자양사(紫陽祠)로 개칭되었으며

순조 17년인 1817년 강당이 지어졌으나

고종5년인 1868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3년 다시 건립되며

학암 강석구(鶴巖 姜錫龜)와 강이화(姜履和)를 추가 배향하였다.

대문에는 제창문(濟蹌門)이라는 현판이,

강당에는 자동서원(紫東書院)이라는 현판과

함께 경거당(敬居堂)과 육영재(育英齋), 양선재(養善齋)란 현판이 걸려있다.

사당인 상의사(尙懿祠)의 외삼문에는 제명문(齊明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외삼문 앞에는 자동서원 수호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제창문(濟蹌門)

선비들이 아름답게 모인다.

자동서원(紫東書院)

경거당(敬居堂)

공경하는 분들이 계시는 곳

경거당기(敬居堂記)   야성 송준필(冶城 宋俊弼)

육영재(育英齋)

영재들을 가르친다.

양선재(養善齋)

공부하며 인성을 함양한다.

진주강씨 김천 찰방공파의 역사적 전개와 자동서원(紫東書院)

2024년 한국서원학회 춘계학술대회

배자예부운략(排字禮部韻略)

‘예부운략’은 중국 송나라 때 예부의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해

간행한 ‘운서(韻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시험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고려 시대부터 수입하여 간행하였고 조선 시대에도 여러 차례 간행하였다.

이 ‘배자예부운략’은 조선 숙종 4년인 1678년에 간행한 목판본이다.

전체5권 가운데 1~3권만 전해지며, 1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조선 중기의 문신 기재 강여호(耆齋 姜汝痺,1619~1683)가

1678년에 숙종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으로 전해지며,

1권 첫머리에 나오는 책 이름인 내제명(內題名)에

왕의 하사품임을 나타내는 선사지인(宣賜之印)이 찍혀 있다.

 

‘운서(韻書)’: 한자의 운(韻)을 분류하여 일정한 순서로 배열한 책

자동서원수호사적

제명문(齊明門)

몸을 정갈하게 하여 마음을 밝게 한다

상의사(尙懿祠)

진사 남와 강선생(進士 南窩 姜先生)

남와 강설(南窩 姜渫, 1583~1651)

조선 인조 때 의병장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정보(淨甫) 호는 남와(南窩)이다.

조부는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을 역임한 강부(姜符)이며

부친은 참봉(參奉)을 지낸 강해로(姜海老)와 모친 고성이씨(固城李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충남 회덕 자운동에서 출생했다.부인은 김천 구성 광명리(기를마을)의

감호 여대로(鑑湖 呂大老,1675~1720) 선생의 딸을 맞이했고

1612년(광해군4) 임자(壬子) 증광시(增廣試)에 입격해 진사(進士)가 되고

1628년(인조6)에 처향(妻鄕)인 김천 구성 광명(기를마을)으로 낙향했다.

이후 성주의 한강 정구(寒岡 鄭逑,1543~1620)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여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갔을 때 지인(知人)이 다가와

돈이 있으면 과거에 합격할 수 있다고 공에게 접근하여

회유하기에 벼슬이 사람을 욕되게 한다 하면서

과거를 포기하고 내려왔다.

이후 1634년(인조12) 향중의 유림의 협조를 얻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김산향교(金山鄕校)의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을 재건했고,

아들 강여구(姜汝龜)와 강여호(姜汝痺)가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복원했다.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향내 유림에서는 의병장(義兵將)으로 추대해 서울로 진격하던 중

남한산성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슬퍼하면서 돌아왔다.

그 후 조부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경학(經學)에 전심했으며

1780년(정조4)에 유림의 청원으로 조마 강곡에 위치한 자동서원(紫東書院)에

 배향됐다.행장(行狀)은 입재 정종로(入齋 鄭宗魯,1738~1816)선생이 쓰고

현손인 학암 강석구(鶴巖 姜碩龜,1726∼1810)공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으며

묘소는 김천 감천면 용호리(복호마을) 고당산자락에 있다.

판결사 기재 강선생(判決事 耆齋 姜先生)

기재 강여호(耆齋 姜汝痺, 1619~168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계숙(啓叔), 호는 기재(耆齋).

아버지는 진사 강설(姜渫)이며, 어머니는 감호 여대로(鑑湖 呂大老)의 따님이다.

1619년 셋째아들로 김천 구성 광명(기를)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여 침식을 잊을 정도로

학업에 열중하여 스승이자 삼종조(三從祖)인

복천 강학년(復泉 (姜鶴年,1585~1647)은

후세까지 가문을 빛낼 아이라고 지극히 사랑했다고 한다

1654년(효종5) 식년문과에 급제해 이조좌랑을 거쳐

사간원정언과 사헌부장령을 거쳐

판결사를 지냈으며 외직으로 함경도 종성부사(鍾城府使)를 역임했는데

재임 중 임금이 공에게 직언을 요청하자 시폐(時幣) 수천언을 문장으로 진언했다.

외직으로 있을 때는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특히 강진현감 재임 시에는 백성들의 소송을 간결하고

공정하게 처리하여 고을 백성들을 덕(德)으로써 교화시키니

백성들이 감화되어 칭송이 자자했다.

특히 종성부사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공의 “행장에는

아무 물건도 없었고 오직 침구만 있으니 은혜 입은 백성들이

하루라도 제집에 모시지 못함을 죄송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1675년(숙종1)에는 수찬(修撰)과 응교(應敎)로 있으면서

임금에게 충언을 드려 숙종이 가납(嘉納)한 것이 많았다.

1677년(숙종3) 임금에게 상소하기를 첫머리에는 덕을 닦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 재아를 해소하고 하늘에도 응답하는

근본이 됨을 말하고 중간에는 요역이 번다한 것과 죄수가

오래 적체된 매우 외람된 벼슬을 공과에 맞지 않게 시행하는 것과

호패(號牌)는 마땅히 시행해야 한다는 것들을 말하고

끝에는 또한 육진(六鎭)과 군민(軍民)의 폐해를 말한 것으로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포상하고 상소를 묘당(廟堂)에

내렸는데 묘당에서는 채택하는 바가 없었다.

1679년(숙종5)에 장손의 혼사 비용에 쌀 4섬을 변통해 달라는

집안의 전갈을 받고는

사사로운 내 집안의 손자 혼사 비용에 공금을 축낼 수는 없다

하고는 그저 웃고 말았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효종. 현종. 숙종의 3대의 임금을 모시되 청백리로서

사심 없이 충언을 서슴지 않았고 만년에는 향리로

낙향해 선친의 유훈을 이어 김산향교(金山鄕校)의 동재와 서재를

완공하여 향토의 인재 육성에 크게 이바지했다.

1780년(정조4) 유림의 청원으로 김천 조마 자동서원(紫東書院)에

배향됐으며 행장(行狀)은 눌은 이광정(訥隱 李光庭,1674~1756)이 쓰고

묘갈명(墓碣銘)은 김천찰방을 역임한 간옹 이헌경(艮翁 李獻慶,1719~1791),

글씨는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1713~1791)이 썼으며

묘소는 김천시 감천면 용호동(복호마을) 고당산자락에 안장되어 있고

유집으로 ‘기재집(耆齋集)’이 전한다.

 

우윤 학암강공(右尹 鶴巖姜公)

학암 강석구(鶴巖 姜碩龜 17261810)=

본관은 진주(晉州)이며자는 낙서(洛瑞)  호는 학암(鶴巖))이다.

아버지는 증(贈) 이조참판(吏曹參判)인 강진환(姜震煥)과

여헌(旅軒) 선생의 현손(玄孫)인 옥산장씨(玉山張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김천 구성 광명(기를)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함과 자질이 뛰어나 보통 아이들과 차이점이 많았다.

놀기를 좋아하여 여러 아이와 냇가에서 놀다가 사람 두골이 있는

것을 보고는 여러 아이가 놀라 달아나거늘 공은 홀로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두골을 옷가지로 싸서 묻으니 그 일을 전해 들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공을 기이하게 여겼다.

그 후로는 독서에 잠심하여 종일토록 그치지 않으니

부친이 공의 병이 날까 두려워 서책을 모두 치우기를 반복한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1768년(영조44)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합격했으며

같은 해에 영조 임금으로부터 어필(御筆)을 하사받았는데

今年臘月中旬日 甲戌干支誦戮莪

부모가 안 계심을 한탄하는 시경의 편명이다.

이 어필첩 오른쪽 위에는 하사한 기록과 오른쪽 아래에는

직접 임금의 글씨를 감춘 것을 9년 뒤 병신년에 열람하니

임금님의 향기가 아직도 남아 있으나 선어(仙馭)를 잡아 보지

못하니 슬픔으로 눈물이 흐릅니다.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기록하여 자손 대대로 보배로 삼노라 라는

1776년 9월 21일 쓴 발문이 있고

왼쪽 위에는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1713~1791)이 쓴

발문이 있어 한층 더 어필의 품격을 높이고 있다.

1786년((정조10)에 사헌부정언이 됐다.

1789년(정조13)에는 부사과와 승정원 좌승지를 역임하면서

서원(書院)을 함부로 세워 백성들에게 폐가 많음을 상소하다가

조정의 미움을 받아 귀양지에서 하세한

동부승지를 역임한 옥천 조덕린(玉川 趙德隣,1658~1737)을 위해

죄를 풀어 줄 것을 상소해 강직함을 드러냈다.

1796년(정조20) 임금에게 바른 학문을 밝혀 풍속을 두껍게 하고

과거의 폐단을 혁신하여 선비들의 습속을 바르게 하는 등

10개 조목의 시정안의 상소를 올려 비답(批答)을 들었으며

1797년(정조21) 봄에 정조의 명으로 향례합편(鄕禮合編)과

형약(鄕約)을 반포(頒布)하라는 윤음(綸音)을 모든 군(郡)과현(縣)에 내려

고루 행하게 하여 국가를 다스리는 도움이 될 방법으로 삼으려 했다.

1805년(순조5) 한성우윤을 역임하고

다음 해에는 부총관에 1809년(순조9) 한성좌윤에 제수됐으나

부임하지 않았다.관직에 있으면서 나라에 어려움이 있으면

녹봉 받기를 부끄러워했으며

1810년(순조10) 향년 85세로 하세하니

임금이 자손 대대로 청백리 집안으로 이어가라하면서

제문과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했다.

그 후 1923년 유림의 청원으로 자동서원(紫東書院)에 배향됐으며

행장(行狀)은 강고 류심춘(江皐 柳尋春,1762~1834)이 쓰고

묘지명(墓誌銘)은 지애 정위(芝厓 鄭煒,1740~1811)가 짓고

묘갈명(墓碣銘)은 매당 이만우(梅堂 李晩佑)가 지었으며

구성 출신 여재동(呂載東)이 썼다.

묘소는 김천 남면 초곡리 봉화산자락에 위치하며

유집으로 ‘학암집(鶴巖集)’이 전한다.

호은 강공(湖隱 姜公)

호은 강이화(湖隱 姜履和,1741~1828)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혜(子惠) 호는 호은(湖隱)

기재 강여호(耆齋 姜汝痺)의 동생인

강여구(湖隱 姜汝榘)의 현손이며

아버지 강일복(姜日復)과 어머니 아주신씨(鵝州申氏) 사이에서

김천 구성 광명(기를)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관후하고 응중(凝重)하여 보는 이들이 크게 기대했다.

효심이 깊어 조석으로 부모에게 문안을 드리는 등 어린 나이에

문장이 탁월하게 드러나 명성이 인근 고을까지 파다했다.

입재 정종로(立齋 鄭宗魯,1738~1816)와 도의로서 사귀었으며

특히 성리학에 전념하여 출세에 마음을 두지 않아

세 번이나 현감(縣監)에 천거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전국의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면서 유유자적한 삶을 영위했다.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저서로는 ‘정주학논설(程朱學論說)’,

 ‘천문지리(天文地理)’, ‘명승지답사기(名勝地踏査記)’등의

유집으로 필사 초고본 10권이 전하고 있으나 간행되지는 못했으며

문장이 ‘재남문집(霽南文集)’, ‘근암집(謹庵集)’ 등에 실려 전한다.

1923년 유림의 청원으로 자동서원(紫東書院)에 배향됐다.

묘소는 김천 증산면 황항리 마을 앞산에 안장돼 있다.

교지   강석구 위통훈대부승정원좌부승지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1800년 2월3일

 

//진주강씨 김천 찰방공파 판결사 기재 강여호(耆齋 姜汝㦿) 가계//

고조부 증 좌승지 강구상(姜龜祥)

증조부 김천도찰방 강부(姜符)

조부 능서랑참봉 강해로(姜海老)

부친 진사 남와 강설(南窩 姜渫,1583~1651),   강여구(姜汝龜)

       판결사 기재 강여호(耆齋 姜汝㦿,1620~1682),   학사공 15세,   은열공 20세

          자 강필형(姜必亨), 강필창(姜必昌), 강필태(姜必泰), 강필중(姜必中), 강필준(姜必儁)

              손자 증 이조참판 강진환(姜震煥)

                 증손자 이조참의 학암 강석구(鶴巖 姜錫龜,1726~1810)

교지 강석구위 가선대부 한성부우윤,  1805년 4월18일

//진주강씨 김천 찰방공파 호은 강이화(湖隱 姜履和) 가계//

5대조 진사 남와 강설(南窩 姜渫,1583~1651)

고조부 강여구(姜汝龜)

 

부친 강일복(姜日復)

       호은 강이화(湖隱 姜履和,1741~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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