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이씨, 진성이씨 문순공 퇴계 이황(文純公 退溪 李滉)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산 24-20
문순공 퇴계 이황(文純公 退溪 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유학자로 주자성리학을 심화, 발전시켰으며 조선 후기 영남학파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수(陶搜).
증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12세 때 작은아버지 송재 이우(松齋 李堣)로부터<논어 >를 배웠고
20세경에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주역〉등의 독서와 성리학에 몰두했다.
1527년(중종 22) 27세에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급제했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와 교유하며 학문을 논하였다.
1534년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된 이후 박사, 전적, 지평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 충청도어사 등을 역임하고
1543년(중종38)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1548년 단양군수를 거쳐 풍기군수로 옮겼다.
풍기군수 재임 중 전임군수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과 서적(書籍)과 학전(學田)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실현했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549년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退溪)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아호를 퇴계(退溪)라 하며 이곳에서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1552년 성균관대사성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하며 하계(下溪)에 은거하면서 학문 연구와 저술, 후진 양성에 몰두했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이로부터 7년간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길렀다.
1568년(선조1) 대제학, 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중용〉과 〈대학〉에 기초한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그 뒤 선조에게 정자(程子)의 〈사잠 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 西銘〉 등을 진강(進講)했으며
그의 학문의 결정인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선조에게 바쳤다.
1569년 낙향했다가 1570년 병이 깊어져 70세의 나이로 졸 하였다.
일흔 살의 나이로 그가 죽자 선조는 슬퍼하며 3일 동안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면서
1570년(선조3) 영의정에 추증하고, 1576년(선조9) 문순(文純)이란 시호를 내렸다.
退陶 晩隱眞城李公之墓
퇴도 만은진성이공지묘
退陶 晩隱眞城李公之墓
퇴도 만은진성이공지묘
皇明 隆慶六年 十一月 日 後學 通政大夫工曹參議知製敎 高峯奇大升
명나라 융경6년(1572년) 11월 일 후학 통정대부공조참의지제교 고봉기대승
謹記進士之進高峯 家諱故別作저
근기진사지진고봉 가휘고별작저
萬曆五年丁丑(1577년)二月 日立 成均生員 琴輔 謹書 丁丑後三百二十九年(1905년)乙巳 十月 日攺立
만력오년정축이월 일립 성균생원 금보 근서 정축후삼백이십구년을사 십월 일개립
문순공 퇴계 이황 묘소 측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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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이황 맏며느리 봉화금씨 묘소(退溪 李滉 長子婦 奉化琴氏)
퇴계이황 맏며느리 봉화금씨(退溪 李滉 長子婦 奉化琴氏)
조선시대의 유학자 퇴계 선생의 맏아들 이준(李寯)의 아내는 봉화금씨(奉化琴氏)였다.
퇴계는 맏며느리를 맞을 때 상객(上客)으로 사돈댁에 갔는데,
사돈댁 집안사람들로부터 미천한 가문이라며 외면과 홀대를 받았다.
당시 봉화금씨 집안은 5대에 걸친 벼슬이 이어져 명성이 드높은 집안이었다.
퇴계가 맏아들의 혼례를 끝내고 사돈댁을 떠나자, 봉화금씨 일가 친척들이 이렇게 따져 물었다.
“우리 가문의 규수는 어느 명문가에라도 시집을 보낼 수 있는데 하필이면 진보이씨 라는 집안에 시집을 보낸단 말이오?
그런 사람이 이 집안에 앉아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문을 더럽힌 셈이오.”
그러면서 퇴계가 앉았던 대청마루를 물로 씻어내고 대패로 깨끗이 밀어버렸다고 한다.
후에 그 이야기가 퇴계 집안에 알려지자 이번에는 모욕감을 느낀 퇴계 문중에서 들고 일어나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니라며 야단이었다. 그때 퇴계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사돈댁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지 우리가 관여할 바 아닙니다. 가문의 명예는 문중에서 떠든다고 높아지는 것도,
남들이 헐뜯는다고 낮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가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도 예를 지키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가 형편없는 가문이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며느리를 맞았으니 그런 일로 말썽을 일으키면 새 며느리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이니 그만두시지요.”
퇴계는 사돈댁의 괄시를 일체 불문에 부치고 새로 맞이한 며느리를 극진히 사랑하였다.
금씨 며느리는 시아버님의 넓은 도량과 덕에 크게 감동하여 한평생 높이 받들어 모시다가 훗날 퇴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시아버님 생전에 내가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죽어서도 시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나를 시아버님 묘소 아래에 가까운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어
금씨의 묘는 지금도 퇴계 선생의 묘소 아래에 있다.
이처럼 사돈댁의 괄시를 넓은 도량으로 포용하고 지극히 아껴주는 시아버지의 인품에 감복한 봉화금씨(奉化琴氏)는
내조의 덕을 쌓고 지극한 효행으로 한 가문의 명예를 빛나게 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훗날 퇴계 선생의 비문은 당시 선성삼필(宣城三畢)로 이름 높았던 봉화금씨 집안의
매헌 금보(梅軒 琴輔, 퇴계 선생의 장형 이잠(李潛)의 손녀사위)가 쓰는 등 두 가문의 관계는 그 후 더욱 돈독해졌다.
그리고 퇴계 선생의 사돈인 훈도 금재(琴梓)의 두 아들도 퇴계의 문인이 되었다.
//퇴계와 둘째 며느리 류씨//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의 첫째부인 김해허씨는 둘째 아들 이채(李寀)를 낳고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둘째아들은 경상도 의령의 외가에서 키웠는데 몸이 워낙 약했지만 혼기가 되어 류씨 집안의 부인과 혼사를 치루었으나
퇴계가 단양군수를 지내때 21살의 둘째 아들 이채(李寀)가 자식도 없이 세상을 떠나 며느리 류씨는 청상과부가 되었다.
퇴계 선생은 홀로 된 어린 며느리가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라는 유교적 규범에 얽매여
남은 인생을 쓸쓸히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며느리에게는 너무 가혹하다고 느꼈고,
둘째 며느리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리었다.
퇴계 자신 역시 태어난지 7개월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홀어머니가 평생 7남매를 뒷바라지하느라 당신을 희생하며 살아오신 것을 보았기에 더욱 측은했는지도 모른다.
애처로운 며느리에 대한 퇴계의 근심은 점점 깊어갔다.
게다가 당시에는 ‘보쌈’이라는 일종의 약탈혼도 종종 있던 시대였다.
홀로 된 여인을 강제로 보에 싸서 납치해 아내로 삼던 풍습이었는데,
퇴계는 혹시라도 둘째 며느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 집이나 사돈집 양쪽이 다 난처해질 것 같아서
밤이 늦도록 며느리가 기거하는 후원 별당을 돌면서 보살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밤이었다.
후원을 한 바퀴 돌고 있는데, 며느리 방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며느리가 누군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깊은 밤, 홀로 된 어린 며느리 방에서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란 말인가?’
‘야심한 밤에 며느리가 외간 남자를 불러들인 것일까?
우리 며느리가 그럴 아이는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퇴계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점잖은 선비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퇴계는 며느리의 방 안을 엿보지 않을 수 없었다.
며느리 방 앞까지 가서 창호지 틈으로 방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며느리는 짚으로 만든 남편 모양의 허수아비 인형에 옷을 입혀 놓고는
그 앞에 술상을 차려 놓고 그 인형과 마주앉아 산 사람에게 하듯 말을 건네고 있었다.
“여보, 한 잔 드세요.”
며느리는 한참 동안 그 남편 인형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다가 흑흑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날 밤, 퇴계 선생은 가슴이 아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도대체 윤리는 무엇이고 도덕은 무엇인가?
사람이 만든 규범에 갇혀 저 젊은 며느리가 밤마다 눈물로 세월을 지새우며 평생을 수절해야 한단 말인가?
윤리와 도덕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을 잃은 저 아이를 평생 수절시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규범에 인간이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
퇴계 선생은 ‘저 아이를 가두고 있는 윤리라는 굴레에서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이황(李滉)은 평생 한 지아비만 섬겨야 한다는 조선의 법을 어기고 며느리를 재혼시켜 주고자
며느리 류 씨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귀가(歸家)가 늦어진다는 억지 트집을 잡아 집에서 내쫓았습니다.
쫓겨난 며느리 류 씨는 친정으로 가는 도중 자결을 하려다
친정아버지에게 건네라는 시아버지의 서찰이 생각나서 읽어 보게 되었고 서찰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었습니다.
'이것을 전하면 친정에서 너를 재가시켜 줄 것이다. 행복을 바란다'라는 내용으로
며느리의 장래를 위해 걱정하는 시아버지의 간절한 사랑과 바람이 담겨 있었습니다.
여러 해가 흐른 뒤, 어느 날 이황(李滉)은 한양으로 가다가 날이 저물어 어느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녁상도 아침상도 모두 이황(李滉)이 좋아하는 반찬으로 식사가 차려졌고,
간이 입에 아주 딱 맞아 너무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길 떠날 준비를 하는 이황(李滉)에게 집주인은 한양가는 길에 신으라며 잘 만들어진 버선 한켤레를 건네어서
신어보니 이황(李滉)의 발에 꼭 맞았습니다.
이황(李滉)은 그제야 둘째 며느리가 이 집에 사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잘 정돈된 집안과 주인의 사람됨을 보니 '내 며느리가 고생은 하지 않고 살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황(李滉)은 며느리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재가해서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며 행복한 마음에 길을 떠났고 며느리 류 씨는 떠나는 시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일을 놓고 유가의 한편에서는 오늘날까지도 퇴계를 비판하고 있다고 한다.
‘선비의 법도를 지키지 못하고 윤리를 무시한 처사이다.’
허나 다른쪽에서는 “퇴계야 말로 윤리를 깨트리면서도 윤리를 지켜낸 사람이다"....
퇴계이황 맏며느리 봉화금씨 묘소후경(退溪 李滉 長子婦 奉化琴氏 墓所後景)
//진보이씨 진성이씨 문순공 퇴계 이황(文純公 退溪 李滉, 1501~1570) 가계//
시조 6대조 봉익대부 증 밀직사 이석(李碩)
5대조 판전의시사 송안군 이자수(松安君 李子修)
고조부 군기시부정 이운후(李云侯)
증조부 선산도호부사 이정(李禎)
조부 증 이조판서 노송정 온혜 이계양(老松亭 溫惠 李繼陽, 1424~1488)
부친 증 좌찬성 이식(李埴, 1463~1502)
모친 증 정경부인 의성김씨,
모친 증 정경부인 춘천박씨, 박치(朴緇)의 따님
숙부 관찰사 송재 이우(松齋 李堣, 1469~1517)
녀 문장공 우복 정경세(文莊公 愚伏 鄭經世, 1563~1633)
녀 문정공 동춘당 송준길(文正公 同春堂 宋浚吉, 1606~1672)
형님 이잠(李潛)
형님 훈도 이하(李河)
형님 이의(李漪)
형님 정민공 온계 이해(貞愍公 溫溪 李瀣)
형님 이징(李澄)
문순공 퇴계 이황(文純公 退溪 李滉, 1501~1570)
초배위 정경부인 김해허씨, 진사 허찬(許瓚)의 따님,
재배위 정경부인 안동권씨,
차남 이채(李寀, 1527~1548) 무후
장남 군기시첨정 이준(李寯, 1523~1583)
배위 봉화금씨, 훈도 금재(琴梓)의 따님
손자 사온서직장 몽재 이안도(夢齋 李安道,1541~1584)
배위 열녀 공인 안동권씨
손자 학생 이순도(李純道)
손자 군자감정 증좌승지 동암 이영도(東巖 李詠道, 1559~1637)
증손자 수졸당 이기(守拙堂 李岐, 1591~1654)
10대손 고계 이휘녕(古溪 李彙寧)
13대손 하정 이충호(霞汀 李忠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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