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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신륵사,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흥법사지 삼층석탑,진공대사탑비,봉서정,육우당

종교

by 碧巖 2014. 10. 29.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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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발용(勃鏞)

[출처] 가을비 우산속에서 아름다운 폐허를 만나다.

[작성자] 상락 태영 글 인용

가을비 우산속에서 아름다운 폐허를 만나다.

일시 : 2013. 11. 02() 08: 30

                                                   봉미산 신륵사 일주문

神勒寺 신륵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절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미륵(彌勒) 또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웠으므로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절이름을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다층전탑이 있는데, 이 탑 전체를 벽돌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절이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나옹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入寂)하였기 때문이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 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이 호상(護喪: 초상 치르는 모든 일을 주장하여 보살피는 것)을 했던 일들이 그것이다.

 3개월 뒤인 1376(우왕 2) 815일에

절의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함께 이루어졌다.

 

이때 대전(大殿조당(祖堂승당(僧堂선당(禪堂종루(鐘樓동익당(東翼堂서익당(西翼堂

남행랑(南行廊향적당(香積堂) 등의 많은 건물이 신축되거나 중수되었다.

 그리고 나옹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선각진당(禪覺眞堂)도 건립되었다.

 

, 1382년에는 2층으로 된 대장각(大藏閣)이 건립되면서 간행한 대장경 1부를 봉안하였다.

대장경 불사(佛事)를 발원한 것은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이색이 그 뜻을 계승하여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간행하였다.

신륵사의 승려 무급(無及)과 수봉(琇峯)이 중심이 되고

그 제자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시주를 모았는데, 200여 명이 이 불사에 참여하였다.

 

이 중에는 각운(覺雲신조(神照자초(自超) 등의 고승들과

최영(崔瑩조민수(曺敏修최무선(崔茂宣) 등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1381년에 각주(覺珠)가 금자(金字)로 제목을 쓰고 각봉(覺峯)은 황복(黃複)을 만들었으며,

12월에 성공(性空)이 함을 만든 뒤

1382년 정월에 화엄종 소속 사찰인 영통사(靈通寺)에서 교열한 다음 4월에 배에 실어 신륵사에 봉안하였다.

 

또한, 대장각 안에는 대장경과 함께 권희(權僖)가 조성한 비로자나불상(毘盧遮那佛像)

홍의룡(洪義龍)이 죽은 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한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

그리고 강부인(姜夫人)이 시주를 얻어 조성한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을 봉안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으로 이 절 또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영릉(英陵 : 세종의 능)이 여주로 이장된 1469(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성종 3) 2월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다.

 

그 뒤 이 절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되었다.

1671(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중건하였고,

1700(숙종 26)에는 위학(偉學)과 그의 제자 우안(宇眼천심(天心) 등이 삼존상을 중수했으며,

이어서 1702년에도 중수하였다.

1726(영조 2)에는 영순(英淳) 등이 동대에 있는 전탑을 중수했는데, 당시에 세웠던 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1796(정조 20) 영돈녕 김이소(金履素)와 예조판서 민종현(閔鍾顯) 등이 중수를 시작하여

이듬해 범중각(泛中閣식당을 지었으며, 가자첩(嘉資帖) 50여 장을 하사받았다.

1858(철종 9)에는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하여

불전(佛殿선료(禪寮종루 등을 중수하였고, 1929년에는 주지 성인(性仁)이 명부전(冥府殿)을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금당(金堂)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당(祖師堂명부전·심검당(尋劍堂적묵당(寂默堂봉향각(奉香閣칠성각(七星閣종각(鐘閣구룡루(九龍樓) 등 있다. 이 가운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극락보전은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1797(정조 21)에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고,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신중탱화·감로탱화와 1908년에 조성한 지장탱화가 있으며,

1773(영조 49)에 주조한 범종(梵鐘)이 있다.

그리고 극락보전 정문 위에는 千秋萬歲(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나옹의 친필이라고 구전되고 있다.

이 현판은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보물 제180호로 지정된 조사당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중앙에 나옹,

좌우에 지공(指空)과 무학(無學)의 영정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정면 3칸의 맞배집인 명부전 내부에는 목조지장삼존(木造地藏三尊)을 비롯하여

시왕상(十王像)과 판관(判官) 등 총 29구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적묵당은 선원(禪院) 구실을 한 건물이고,

심검당은 강원(講院) 구실을 하는 정면 6칸의 자형 건물로 선각당(禪覺堂)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심검당 바로 옆에는 극락보전의 분수승(焚修僧)이 거처하는 3칸의 봉향각이 있고,

봉향각 뒤쪽에는 칠성탱화와 산신탱화·독성탱화가 봉안된 칠성각이 있다.

 

이 밖에도 신륵사에는 보물 제225호로 지정된 대리석재의 다층석탑,

국내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전탑인 보물 제226호의 다층전탑(多層塼塔),

고려 말기의 대표적 부도양식을 띤 보물 제228호의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비천(飛天)과 용이 새겨져 그 형태가 매우 아름다운 보물 제231호의 석등,

1379년 나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보물 제229호의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대장각을 세운 연유를 기록한 보물 제230호의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가 있다.

 

이 밖에도 절의 동쪽 강변 바위 위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경내의 서쪽 언덕에는 부도 2기가 있다.

삼층석탑은 나옹을 화장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탑이고,

부도는 원래 조사당 뒤쪽에 있던 것을 196611월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나 누구의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들 부도 중 둥근 탑신을 가진 부도는 근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8각 탑신을 가진 부도는 고려시대의 부도형식에서 퇴화된 여말선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이전할 때 사리함이 발견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또한, 나옹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옆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6각의 정자가 있다.

그 전에 지어진 것은 1972년의 홍수로 떠내려가고, 그 뒤 삼층석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누각의 이름인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인데, 그를 추념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또한 구룡루는 1689(숙종 15)1749(영조 25), 1860(철종 11)에 각각 중수된 기록이 있다.

<다음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나옹선사(懶翁禪師:1320-1376)의 마지막 자취가 남은 강가 언덕의  강월헌(江月軒)에서.

 

조사당(祖師堂) 뒤쪽 외진 언덕에 자리잡은 보제존자 나옹화상의 부도탑과 석종비를 보고

보물 제229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碑)

비문은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이 짓고명필 유항(柳巷) 한수(韓脩: 1333-1384)가 쓰고,

  비문의 글씨를 더듬어 전삼사좌윤 김구용(金九容: 1338-1384)이라 각인된 글자를 보고 

  당시 이 일을 추진하고 법회에 참여했던 분들의 명단속 많은 이름자들을 학인하니...

 

신륵사 극락보전(極樂寶殿)다층석탑(多層石塔)

1379(우왕 5) 5월에 유항(柳巷) 한수(韓脩: 1333-1384)는 왕명을 받고,

나옹 선사의 비문을 쓰기 위해 여주 신륵사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뜻밖에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 1338-1384)의 내방을 받습니다.

개경에서 이별하고 몇 년만에 만나니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김구용은 언사(言事)로 죽주로 유배되었다가 여주로 옮겨 한거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니까요.

한수는 척약재의 안내로 여강에 배를 띄우고 음주와 담소로 지난 날의 회포를 풀며

척약재 승주래방 음주중(惕若齋乘舟來訪飮舟中)이라는 시를 지어 마음에 담습니다.

척약재(김구용) 승주래방 음 주중(惕若齋乘舟來訪飮舟中)

한수(韓脩)

驪江煙雨泛扁舟 여강 안개 비에 조각 배를 띄우고

隨意隨流或泝流 뜻대로 물따라 내려가기도 거슬러 올라가기도

千點岡巒同暗淡 천 점 봉우리는 모두 다 수묵 빛

兩邊花木各淸幽 양 옆 꽃나무들 각기 맑고 그윽하네.

魚因知樂潛相趁 고기들도 낙을 알아 물에 잠겨 서로 따르고

鳥識忘機近尙浮 새는 저 안 잡을 줄 알고 가까히 가도 그대로 있네

不有詩仙居此地 이 고장에 살고 있는 詩仙(척약재) 곧 아니면

豈能爲此畫中遊 이 멋진 그림속 놀음 어찌 볼 수 있었으랴.

관람을 마치고 시간은 흘러 법천사지(法泉寺址)로 이동합니다.

신륵사에서 문막을 거쳐 49번 지방도를 타고 22쯤 달려 부론면 법천리에 도착하였습니다.

725(성덕왕 24)에 창건되었으며,

고려 문종 때 지광국사(智光國師)가 이곳에 머물면서 대찰(大刹)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조선 초기에는 유방선(柳方善)이 머물면서 강학(講學)하였으며,

이 때 수학한 한명회(韓明澮강효문(康孝文서거정(徐居正권람(權擥) 등이

탑에 그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습니다.

그 뒤의 역사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중창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驪州神勒寺 多層石塔 여주신륵사 다층석탑

이 석탑은 백색 대리석으로 조성한 방형 평면의 석탑으로 2층의 기단부를 구성하고

그 위에 중적(重積)한 탑신부를 받고 있는 점은 신라나 고려시대의 일반형 석탑의 기본수법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재(部材)의 세부조형에 있어 전혀 양식을 달리하고 있다.

소규모의 석탑으로서 기단부부터 탑신부에 이르기까지 각 층의 부재를 모두 1매석씩으로 구성하였으므로

그 재료가 구하기 어려운 백색 대리석인 데에 기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기단부는 지대석 위에 구성되었으며 지대 상면에는 4변의 상면에 단엽의 복연화문(覆蓮華文)이 조각되었는데

그 배치양식이 중앙에서 모퉁이로 향하면서 사형(斜形)으로 되는

고려시대의 연화문 배열수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법을 보이고 있다.

하층기단 면석은 매우 낮으며 각 모서리에는 양쪽에 형식적인 우주형(隅柱形)이 모각(模刻)되었고,

그 사이 4면에는 파상(波狀)의 문양이 조식되었다. 면석 위의 하층기단 갑석은 유달리 두꺼워서 중후한 느낌을 주며,

각 면에 장식적인 표현이 있어서 둔중함은 면하고 있다.

, 측면에는 한 줄의 띠로 된 굽을 두르고 그 상하면에 단판(單瓣)으로 앙(()의 연화문을 새겼으며

다시 하면에는 1단의 각형 받침을 새겼다.      그리고 상면에는 1단의 각형 굄을 마련하여 상층기단을 받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모든 장식적인 의장에서 다소나마 둔중한 느낌을 감소시키고 있다.

상층기단 면석에는 화형(花形)과 연주문(連珠文)으로 장식한 우주형의 모각이 있고

 각 면에는 용문양을 조각하였는데 수법이 능숙하다.   따라서, 용 주위의 구름 문양도 우아하여 구름과 용이 잘 어울린다.

상층기단 갑석은 하층기단 갑석을 뒤집어놓은 듯하며, 상면은 평평할 뿐 아무런 탑신굄대도 없이 탑신부를 받고 있다.

측면에는 상단에 이르면서 굽의 띠를 돌리고 하단에는 하면에 이르기까지 연화문을 조각하였는데,

단엽으로 각 면에 9판의 앙련을 조각하였다.

탑신부는 현재 8층옥신까지 원형대로 남아 있고, 그 위의 옥개석과 옥신석은 8층의 바로 위의 것이 아니다.

각 층의 옥신에는 양쪽에 우주가 있을 뿐 다른 조식이 없다.

그리고 각 층의 체감이 적은 편이고, 특히 옥신석이 매우 낮아져 두께가 옥개석의 두께와 비슷하다.

그러므로 다소 불안정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이 석탑이 다층이므로 더욱 그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옥개석은 평박하나 하면의 받침은 아주 낮게 새겼고 상면에는 옥신굄인 각형 1단이 각출되었으며,

낙수면의 경사가 극히 완만하여 둔중함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추녀 밑은 수평으로 전개되다가 모퉁이에 이르러 위로 들리어 전각에 반전이 표현되었는데,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함에 따라 우동(隅棟: 탑의 옥개석의 귀마루)도 거의 수평이며 전각의 반전도 약해져서

경쾌한 느낌을 감하고 있다. 상륜 부재는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이 석탑은 일부에 고려시대의 양식을 남기면서도 여기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양식을 볼 수 있다.

한편, 대리석에서 오는 질감으로 인하여 각 부의 조각은 한층 우아한 맛을 더하고 있다.

신륵사의 창건연대에 대하여는 신라시대로 올라간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존유물은 모두 고려 중엽 이후의 것이고,

1472(성종 3)에 여러 당우(堂宇)를 재흥한 사실로 보아 이 석탑도 이 시기에 건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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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전체가 옛 절터였다는 법천사는 현재 발굴중에 있다.

11세기의 고승 지광국사(智光國師)의 부도탑비인 현묘탑비(玄妙塔碑: 국보 59)

 

구름무늬 위에 놓인 거북의 머리는 용의 모습이요등껍질엔 임금 왕() 자가 줄지어 새겨져 있다.

 

 

거대한 몸체 양 옆면의 용무늬는 그 어떤 석조 예술품보다 더 섬세하고 화려한 조각으로 치장되어 있다.

                    ▲법천사 지광국사부도탑비인 현묘탑비(국보 59) 옆면

 

석탑 일부와 광배, 연꽃무늬 받침대 등 각양각색의 석물들을 건물터 한쪽에 모아 놓았다.

화려했던 법천사의 옛 모습을 그리며, 흥망성쇠의 허망함도 함께 보는것 같다.

동정(東亭) 염흥방(廉興邦: ? - 1388)

법천사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척약재 김구용은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 왔으니

당시에 법천사 가는 길은 배를 타야 했고, 강을 건너 가서는 다시 말을 타고 절까지 이동해야 했을 것이다.

이곳 스님은 귀한 분들을 대접하기 위해 멀리 조각배를 띄워 술과 안주를 구해 왔고,

밤이 깊도록 몇 순배의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면서 서로 느낀 정회(情懷)를 이야기하면서,

다음날 아침 밤새워 술을 마신 惕若齋東亭 두 선생은 취기오른 몸을 이끌고 법천사에서 돌아옵니다.

앙암진으로 가는 길에 말 위에서 깜막 졸았으나 늙은 말은 절둑거리며 가는 길을 알아서 잘도 갑니다.

 

謁東亭相公  동정(東亭)상공(염흥방)을 뵈었더니

會法泉僧以扁舟載酒而來 夜深痛飮  마침 법천사의 스님이 조각배에 술을 싣고 와서 밤 깊도록 실컷 마셨다.

東亭有詩云   동정 상공이 시를 짓기를

 

短棹煙波僧載酒 작은 돛대 아지랑이 물결에 스님은 술을 싣고

蹇驢風雪客吟詩 다리 저는 나귀 눈보라에 나그네는 시를 읊다.

相逢一夜情無極 서로 만난 하룻밤의 정()도 끝이 없어

更約仰嵒芳草時 다시 앙암(仰嵒)의 향기로운 시절을 약속하네.

 

予亦次韻 나도(척약재) 차운(次韻)하였다.

扁舟未禁別離情 조각배로 이별의 정()을 금치 못하여

盡醉分携水上程 모두 취해 물위의 길로 이끌려 나뉜다.

老馬也能知主意 늙은 말은 그래도 주인의 뜻을 알아서

睡中還繞碧波行 조는 중에도 오히려 푸른 물결을 돌아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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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법사지(興法寺址) 삼층석탑(보물 464)

 

고려사937(태조 20),

당시 왕사(王師)였던 진공대사 충담(眞空大師 忠湛: 869-940)이 입적하자 940년 진공대사의 부도탑이 있는 흥법사에

태조 왕건이 직접 비문(碑文)을 지어 진공대사탑비를 세웠다는 기록으로 흥법사가 신라 때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넓은 축대가 있고, 삼층석탑(보물 464)과 몸체가 없어진 우람한 거북상과 화려한 지붕돌의 조각이 인상적이다.

 

척약재 김구용이 안렴사 하륜(河崙: 1347-1416) 에게 준 시에

뜰 앞에는 끊어진 비석이 거친 이끼에 묻혔는데라는 구절을 보면,

탑비는 이미 고려말 이전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절터 주변은 토지는 개인의 명의로 되어 있고...

 

                   ▲ 비신이 없는 진공대사탑비의 거북좌대 우람한 이수

 

1378(우왕4) 12, 여주에서 한거하던 척약재 김구용(金九容: 1338-1384)

당시 강원도 안렴사로 부임한 하륜(河崙: 1347-1416)에게 글을 보내 이 곳 흥법사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한다.

성균관에서 이학을 같이 공부했고, 요승 신돈 측의 인물들을 탄핵하는데 함께했던 20년 지기이다.

두 선생은 서로 술잔을 권하며 옛 이야기와 안부를 묻기도 하고, 때론 정치 현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정적이 흐르면 관현(管絃)을 연주하기도 하면서...

밤이 늦어서야 하륜이 돌아가고  하룻밤을 이곳에서 쓸쓸하게 보내야 했던 척약재는

동지 섣달 기나긴 추운 밤을 쉽사리 잠자리에 들지 못하며,  흥법사 주변 영봉산 자락에 힌 눈은  쌓이는데,

 

다음날 아침 강원도 안렴사 하륜이 고기와 술을 보내왔다.

쓸쓸이 추운 밤을 지새운 척약재 김구용은 얼큰하게 취하여 돌아오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하륜에게 보낸다.

 

馬上吟得二詩 奉呈河廉使말위에서 시 두수를 읊어 안렴사 하륜에게 받들어 드리다.

 

梵宮寥落臘天寒  절간이 쓸쓸하고 섣달 날씨는 차가운데

飮破三壺信馬還  세 항아리의 술을 마시고 말을 믿고 돌아오네.

大醉哦詩雙耳熱  크게 취하여 시를 읊으니 두 귀가 화끈화끈한데

不知新雪擁千山  새로 내린 눈이 온 산을 감싼 것은 알지 못하네.

一夜平原興未闌  하룻밤 들판에서의 흥이 끝나지 않았는데

更期山寺作淸歡  산사(山寺)에서 즐길 것을 다시 기약하네.

庭前斷碣埋荒蘚  뜰 앞에는 끊어진 비석이 거친 이끼에 묻혔는데

似欲郞官着意看  마치 낭관(郞官)이 뜻을 붙여 보려는 듯하네.

 

 

흥법사 탐방을 마치고 귀경 길에 여주 금사면에 있는

둔촌(遁村) 이집(李集: 1314-1387)의 봉서정과 척약재 김구용의 육우당터를 찾아 보았다.

석탄유고(이존오李存吾: 1341-1371)에 실려있는 1679년에 조석주가 지은 고산사 상량문에 보면...

서쪽 방향으로  넓고 큰 들판에 넘는 해 낮으막하네, 우리고을 옛 부터 군자 많으니,

육우(척약재)의 남긴 터는 봉서(둔촌)와 근접했다네. 라는 구절이 있다.

하지만 현재의 봉서정도 옛터가 아닌, 근대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복원했다고 한다.

 

                                        ▲ 둔촌 이집 선생의 봉서정

 

.                                                               육우당(六友堂) 추정터

 

금사 파출소 주차장에 주차시키고, 길 건너 금사공원으로 오르니,

정상에 산신당이 있고, 강가로 조금 내려가면 언덕에 보호수인 600년된 은행나무가 서있다.

옆에 조그만 채소 밭이 있는데 이곳이 옛 '육우당터'로 추정되는 곳 이라고 한다.

내려다 보는 여강(驪江)의 경치가 아름답다.

 

어질구나, 그대가 여섯을 벗함이여, 진실로 초월하게 속세를 벗어났네.

()달은

()산 언덕에 비치고

()바람이 슬슬 불어오니

()강에는 절로 물결이 이네.

()꽃의 말은 더욱 아름답고

()눈 녹은 물은 차를 끓일 수 있네.

원재(圓齋) 정추(鄭樞: 1333-1382)가 멋지게 찬사한 육우당부(六友堂 賦)의 한 대목이다.

 

둔촌 이집 선생이 육우당을 부러워 하며 지은 시에

강루에 높다란 곳이 그대의 거처인데,

언덕 사이로 마주 보이니 십 리 남짓 하네.

노를 저어 오고 감이 빈번해야 할터이니,

이쯤에다 나도 역시 초가 한 칸 지으려네.” 라고 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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