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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萊鄭氏 정부(鄭符), 정흠지(鄭欽之) 묘역

구름에 달

by 碧巖 2015. 5. 14.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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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정씨 교서랑공파 파조인 정보의 5세손 정양생(鄭良生)

공신에 책록되고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정구(鄭矩)는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이고,   셋째 아들이 정부(鄭符)(배위 고성이씨)이다.

그의 집안은 아들 정흠지(鄭欽之)와 손자 정갑손(鄭甲孫정창손의 의해 크게 이름을 날렸다.

정흠지는 태종 11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이조참판·대사헌·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정갑손은 세종 때 벼슬길에 올라 우찬성에 이르렀다.

그의 동생 정창손은 세조의 집권에 참여한 공으로

세조와 성종 대에서 대사헌·대제학·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 2등이 되어 봉원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단종 복위 음모를 고변한 공으로 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이후 대사성·대제학 등을 겸직하고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그 후 익대 공신 3등에 오르고, 성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이 되고, 좌리공신 2등이 되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는 문장에 뛰어나 고려사(高麗史)’세종실록(世宗實錄)’ ‘치평요람(治平要覽)’ 편찬에 참여했다.

정창손의 아들 정괄은 좌의정에 올랐으며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정양생의 셋째 아들이 정부(鄭符)묘역 (배위 고성이씨)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원래는 광릉에 있었으나 세조 승하후 예종때 세조의 묘를 쓰고자 총8기의 묘를 남양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정흠지(鄭欽之)묘역1378(우왕 4)1439(세종 21). 배위 전주최씨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요좌(堯佐).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고려 감찰대부(監察大夫) 양생(良生)이고,

아버지는 부()이며, 어머니는 이희필(李希泌)의 딸이다.

진사성균시에 합격한 뒤 음사(蔭仕)로 벼슬이 지평에 이르렀다.

1408(태종 8) 좌정승 하륜(河崙)을 탄핵하다가 먼 곳에 유배되었다.

그 뒤 풀려나와 141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조정랑·병조정랑·좌헌납을 거쳐 1416년 장령이 되었다.

이 때 좌의정 박은(朴誾)이 정탁(鄭擢)과 노비문제로 송사를 일으키자,

박은을 탄핵하다 미움을 받아 배척당하여 4년 동안이나 등용되지 못하였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이 되고,

이어 집의·지형조사(知刑曹事대언(代言)을 거쳐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기밀(機密)을 관장하였다.

그 뒤 이조참판·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에 오르고,

충청·전라·경상 3도의 도순무사가 되어 연해의 주군(州郡)의 성터를 심정(審定)하였다.

1435(세종 17) 함길도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새로 설치한 회령 등 4()의 수비에 공헌하고,

어머니의 병환으로 돌아와 중추원사가 되어 죽었다.

사람됨이 풍채가 좋고 밖으로는 유화하나 내심은 강직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였는데, 특히 사기(史記)·한서(漢書)를 잘 외었다.

일찍이 황보인(皇甫仁)과 함께 진설(陣說)을 지어 올렸고,

천문에도 밝아 세종의 명으로 역법(曆法)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정희손 묘역   배위 고흥류씨

정윤핍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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