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안옹주(貞安翁主), 청성위 안도공 심안의(安悼公 沈安義)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양지리 산16
조선 제4대 임금 세종의 서차녀이며, 생모는 숙빈 이씨(淑嬪 李氏)이다.
1453년(단종 1), 단종이 강맹경에게 명하여 사족 자제 중에 배필을 찾게 한 끝에
관찰사 심선(沈璿)의 아들 청성위(靑城尉) 심안의에게 하가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단종은 이에 면포 6백필로 집을 사서 하사하였다.
1461년 10월 16일 흉서하였으며 이에 세조는 사흘간 조회를 중지하고
쌀·콩 1백 석과 종이 2백 권, 백저포(白苧布)·면포(綿布) 각 10필, 베[布] 60필을 부조하였다.
정안옹주의 남편인 심안의는 성종 7년인 1476년에 39세의 나이로 죽었다.
시아버지 : 청송 심씨 관찰사(觀察使) 심선(沈璿)
부마 : 청송 심씨 오위도총부도총관 청성위 심안의(五衛都摠府都摠管 靑城尉 沈安義, 1438~1476)
장남 : 심언(沈?)
장녀 : 최맹사(崔孟思)에게 출가
심안의(沈安義, 1438년 ~ 1476년) 관찰사 심선(沈璿)의 아들.
정안옹주의 남편. 본관은 청송(靑松). 시호는 안도(安悼)
1453년 정안옹주와 혼인하여 순의청성위(順義靑城尉)에 봉해졌다.
계유정난 이후 김종서의 집을 받았다가 다시 민신의 집을 받았다.
1455년(세조1)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1등에 녹훈되고,
1461년에는 흥인문수장(興仁門守將), 1464년 도진무(都鎭撫)·좌상대장(左廂大將),
1467년 오부장(五部將), 이후에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지냈고,
1469년(성종 즉위) 광덕의빈부의빈(廣德儀賓府儀賓)에 올라, 1476년에 졸하였다.
복성군 이미(福城君 李嵋, 1509~ 1533)조선 제11대 임금 중종의 서자이자 장남이다.
생모는 경빈 박씨(敬嬪 朴氏)이며, 정부인은 군부인 파평 윤씨(郡夫人 坡平尹氏)이다.
본명은 미(嵋), 성은 이(李), 본관은 전주(全州),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1509년 9월 28일 당시 숙의였던 박씨의 소생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학수(鶴壽)이다.
본래의 작호는 서성군(瑞城君)이었으나 1517년 복성군으로 개봉되었다.
장경왕후가 세자를 낳고 죽은 뒤 경빈 박씨는 아들을 세자로 책봉시키려는 야망을 가졌다.
마침 1527년 세자의 생일에 쥐를 잡아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입‧귀‧눈을 불로 지져서
동궁의 북정 은행나무에 걸어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경빈 박씨가 혐의를 받아 작호를 빼앗기고 폐서인이 되어 상주의 본가로 내쳐졌다.
1533년 어머니 경빈 박씨가 사사된 뒤 조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복성군의 제거를 주장했으며
이를 거부하던 중종도 결국 복성군의 사사 주청을 받아들였다.
1533년 6월 18일(음력 5월 26일) 사사되었다.
복성군이 사사된 뒤, 두 누이 혜순옹주와 혜정옹주도 작호가 박탈되어 폐서인되었으며
혜순옹주의 남편 광천위 김인경은 유배되었다.
하지만 김안로의 아들 김희가 사건을 조작한 진범으로 밝혀져 신원되었다.
경빈 박씨(敬嬪 朴氏, ? ~ 1533년)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의 빈(嬪),
본관은 밀양. 중종반정을 주도한 정국공신 박원종의 수양딸로,
친아버지는 경상도 상주 지방의 사족 출신인 박수림(朴秀林).
연산군 재위 시절에 흥청으로 선발되어 궁에서 지내다가 진성대군(훗날의 중종)의 눈에 들었고,
중종반정 이후 박원종의 수양딸이 되어 왕으로 즉위한 중종의 정식 후궁이 되었다.
경빈박씨의 박원종 수양딸이란 것은,
같은 박씨로 박종화의 역사소설에서 경빈을 박원종의 친척으로 그리고 있어서다.
하지만, 경빈은 밀양박씨이고, 박원종은 순천박씨로 본관이 다른 집안이다.
예전 밀양박씨 가문에서, 이를 수정해야 한다는 설명이 들은 책을 발간한 적이 있는데 경복궁에 보관되어 있다.
1533년 6월 15일(음력 5월 23일) 사사되었다.
1509년, 숙의(淑儀) 시절에 중종의 장자 서성군(瑞城君, 후에 복성군이 됨)을 낳았고,
1512년에 혜순옹주를, 1514년에 혜정옹주를 출산하며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
1515년,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가 원자 호를 낳고 흉서하자
중종의 맏아들을 낳은 생모이자 가장 총애를 받는 후궁으로서 다음 중전의 재목으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과거 흥청 출신이라는 것과
장차 원자와 복성군 간의 왕위 쟁탈을 염려한 일부 신하들에 의해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종은 대신 그녀를 정1품 빈(嬪)으로 승격시켜 경빈(敬嬪)에 봉했다.
1527년, 동궁전 후원에
불에 태워 마치 돼지와 같은 형상을 하게 된 쥐와 방서를 매달아 세자를 저주한,
이른바 '작서(灼鼠)의 변(變)'에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이는 경빈이 세자를 밀어내고 복성군을 저위(儲位)에 앉히고자 하는 야심 때문이라고 하였다.
결국, 경빈 자신과 아들인 복성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당한 채 고향인 상주로 유배되었으며
경빈의 아버지 박수림 및 박인형(朴仁亨), 박인정(朴仁貞) 또한 파직되었다.
계속해서 복귀의 날만을 소망하였으나
1533년, '목패의 변' 혹은 '가작인두의 변' 이라는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며 사약을 받고 사망했다.
아들 복성군 역시 사사되었으며, 두 옹주도 작호를 박탈당해 폐서인되었고
맏사위 당천위 김인경은 유배되었다.
이후, 작서의 변괴와 목패의 변이 김안로와,
그 아들이며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의 남편인 연성위(延城尉) 김희가 한 짓이 밝혀지며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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