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춘당 (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은 1606년(선조 39) 영천군수(榮川郡守) 송이창(宋爾昌)과 광산김씨의 아들로,
외가가 있던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남인학파 예학의 대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딸 진주정씨(晋州鄭氏)와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다.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후에 자는 명보(明甫)라 하고 호를 동춘당(同春堂)이라 하였다.
같은 충남 출신으로 친척이자 친구인 송시열은 한 스승인 김장생, 김집에게서 수학한 동문사이이기도 하다.
충청남도 연기군에 안장되었으나 후에 충청남도 공주에 이장되었으며
이후 여러 곳으로 옮겨졌다가 1700년(숙종 26년) 대덕군 원정리(대전시 서구 원정동)으로 이장하였다.
현재의 묘비는 이곳으로 이장 한 후에 세워진 것으로,
외손자인 판서 민진후가 비문을 짓고 증손자인 현령 송요좌가 글씨를 썼다.
1681년(숙종 7년) 대덕군 회덕의 숭현서원(崇賢書院)에 제향되고 그해 12월 17일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송준길(宋浚吉, 1606년 12월 28일 ~ 1672년 12월 2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였다.
노론·소론이 분당되기 전에 사망하였으나 사실상 그가 이끌던 문인들은 그의 사후 노론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문묘(文廟)에 배향된 해동 18현(海東十八賢)의 하나이다.
송시열과 함께 북벌론을 주장하였으며,
제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과 함께 주자의 성리학과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때 기년복 설을 주장하였다.
일찍부터 김장생과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24년(인조 3) 진사로서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김장생과 김집의 문하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인조 때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보고 그들을 동정하였고,
소현세자 사후에게는 세자의 아들에게 계승권이 돌아가야 된다고 주장하다가 인조의 눈밖에 났다.
그 뒤 학문 연구에 정진하다 1649년 효종 즉위 직후 스승 김집의 천거로 발탁되어 청요직을 역임했다.
그 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 김수항과 함께 서인논객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때 서인 온건파를 이끌며 남인에 대한 강경 처벌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윤선도의 상소 이후 한때 윤선도의 구명운동을 펴기도 했다.
당색은 서인(西人)으로, 율곡 이이를 사숙하였고,
김장생, 김집의 문하생이며, 장인이기도 한 남인학자 정경세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그를 사표로 받들었다.
친척인 우암 송시열과 함께 양송으로도 불렸다.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본관은 은진.
영천군수를 지낸 송이창(宋爾昌)의 아들이며
딸 송씨는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와 민진원, 민진후의 생모이다. 사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同春堂宋先生浚吉之墓 贈貞敬夫人晉州鄭氏祔左
동춘당송선생준길지묘 증정경부인진주정씨부좌
동춘당 묘역의 향로석
그리고 해태상
(同春堂 宋浚吉)동춘당 송준길의 子 송광식의묘역
工曹正郞 贈 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 兼 經筵參贊官 宋公光栻希張之墓
공조정랑 증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송공광식희장지묘
淑夫人白川趙氏祔左
숙부인백천조씨부좌
(同春堂 宋浚吉)동춘당 송준길의 묘역 후면과 측면
同春堂 묘역 답사 후 나오는 길목에 있는 龍村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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