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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흥화문 숭정문 숭정전 태령전

구름에 달

by 碧巖 2015. 12. 16.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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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慶熙宮)

광해군 10(1623)에 건립한 이후, 10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서울시에 있는 5대 궁궐 중에서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렀으며,

새문안 대궐, 새문동 대궐, 아주개 대궐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의 이궁(離宮)으로, 경운궁(덕수궁)과 홍교로 연결되어 있었다.

부지 728백 평에 정전, 동궁, 침전, 별당을 비롯해서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으며

본래는 100여 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심하게 훼손되어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하다.

5대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이다.

그나마 초석과 기단이 남아 있고,

뒤쪽에는 울창한 수림이 잘 보전돼 있어 궁궐의 자취를 잘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흥화문(興化門)은 광해군 8(1616)에 세워진 경희궁의 정문.

홍화문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다.

원래는 현재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일제가 1932년 흥화문을 이토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떼어갔던 것을

서울시에서 1988년 경희궁 복원 사업 목적으로 현재의 위치에 이전해 복원했다.

 

경희궁의 원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영조가 1760(영조 36)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쳤으며,  경덕궁터는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정원군)의 사저가 있던 곳이다.

 

  ▲숭정문    숭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상왕의 승하시 정전이 아닌 정전의 정문에서 즉위하는데  경종, 정조, 헌종이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고 한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뒤 재건된 창덕궁으로 들어가기를 꺼리고,

인왕산 아래 새 궁궐인 인경궁(仁慶宮)을 짓다가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풍수설을 믿고

왕기를 누르기 위하여 그의 집을 빼앗아 1617(광해군 6)~1623(광해군 15) 에 경덕궁을 세웠다.

그러나 1623년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경덕궁을 쓰지 못하였다.

 

 

  ▲숭정전(崇政殿)은 광해군 8(1616)에 세운 것으로,  경희궁의 정전이다.

창건 공사 초기인 1618년경에 세워졌다.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졌던 곳이다.

특히 경종·정조·헌종 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숭정전 건물을 일본 사찰 조계사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남아있다.     현 위치 숭정전은 복원된 것이다.

 

 崇政殿回廊

인조가 즉위한 뒤에 창덕궁이 소실되고,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마저 불타버리자 인목대비를 받들어 이 궁궐로 이어하였다.

이 곳에서 숙종이 태어났고,

숭정문에서는 경종, 정조, 헌종이 즉위하였으며,

숙종, 영조, 순조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崇政殿回廊

 

▲  숭정전 앞 드므

 

 

 

 

 

 

태령전(泰寜殿)

태령전은 영조의 초상화를 보관하던 곳이다.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는 않았던 건물이다.

그러나 영조의 초상화가 그려지자 1744년에 중수해 보관했다.

일제에 의해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지만

2000년 서궐도안에 따라 정면 5, 측면 2칸의 건물로 복원했다.

현판은 석봉 한호의 글씨를 집자해 만들었다.

   

 

자정전 현재 서궐도안에 따라 복원되어 있으며,  이 건물은 주로 편전으로 쓰였다고 한다.

 

서암 瑞巖

서암은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다.

암천으로 불리는 바위 속에 샘이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

본래는 王巖으로 불리었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지역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1708년에 이름을 서암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다.

그러나 현재 서암을 새겨두었던 四方石은 전해지지 않는다.

 

 

 

 

서암 瑞巖

서암은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로

암천으로 불리는 바위 속에 샘이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

본래는 王巖으로 불리었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지역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1708년에 이름을 서암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다.

그러나 현재 서암을 새겨두었던 四方石은 전해지지 않는다.

 

 

 

경희궁 방공호

1944년 초, 경성중앙전신국의 피폭에 대비하여 중요 통신 유지를 위해 설치된 지하전신국 겸 방공호.

왕과 왕비의 침전인 융복전과 회상전이 있던 자리에 콘크리트를 이용해 방공호를 만들었다.

방공호 건설에는 당시 체신국 직원들과 경성중학교의 근로보국대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경성중학교 내에 방공호를 조성할 것이 결정된 뒤

경성중학교 학생들 대부분은 교내 방공호 조성에 투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파작업은 조선군사령부 공병대가 담당하였고, 작업이나 실무 행정은 전부 체신국에서 담당했다.

서울특별시청은 방공호를 서울역사박물관의 근현대유물 수장고로 활용하기로 하고

2014년 수장고 준공을 계획하였으나,

2013년 수립된 '경희궁지 종합정비기본계획'에 따라 철거 후 융복전과 회상전을 복원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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