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천임씨 사윤공파 부윤공 임중선(任中善), 훈련대장 정의공 임태영(靖毅公 任泰瑛), 광화문현판, 형조판서 충정공 우연옹 임성고(忠貞公 偶然翁 任聖皐), 모선재
임중선 任中善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한성부윤(漢城府尹) 임산보(任山寶)의 아들이다.
이조판서로 관직에 있을 때 청렴하여
세종대 품성이 강직하고 단아한 영의정 하연(河演)이 높이 평가하였다.
남양주시 진접읍 팔야리에 묘와 묘갈이 있다.
임중선(任中善)
조부: 임진(任瑨)
부친 : 한성판윤 임산보(任山寶)
모친 : 능성구씨, 면성부원군 문정공 구위(沔城府院君 文貞公 具褘)의 따님
판무산현사 임중선(任中善)
배위 청주한씨,문경공 한수(文敬公 韓修)의 따님
장남 병조참의 임효신(任孝信), 1411년(태종11) 문과장원급제
차남 임효충(任孝忠)
삼남 승지 임효공(任孝恭 )
사남 동지중추원사 인수부윤 임효인(任孝仁)
오남 첨지중추원사 임효면(任孝明)
육남 임효동(任孝敦) 宣敎郞報恩縣監 贈嘉善大夫 戶曹參判兼 同知義禁府事
선교랑보은현감 증가선대부 호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
남양주군 진접읍 팔야리의 豊川任氏 司尹, 撫山公宗會
모선재(慕先齋)
풍천임씨선조제단비
시조 임온(林溫)
2세 임가규(任可珪)
3세 임비(任備)
4세 임도(任徒)
5세 임천유(任天裕)
6세 임주(任澍)
7세 임자송 7세 임자순(任子順)
8세 임덕유 8세 임진(任瑨)
9세 9세 임산조(任山寶)
10세 10세 임중선(任中善)
임중선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이 풍산(豊山)이며
아버지는 한성부윤 임산보(任山寶)이고,
어머니는 능성 구씨 대제학 문정공(文貞公) 구위(具褘)의 따님이다.
이조판서를 증직 받았으며, 관직에 있을 때 청렴하여 세종대의 영의정 하연(河演)이 높이 평가하였다.
묘역은 남양주 진접읍 팔야리 모선재 뒷산에 청주 한씨와 합장묘로 서향하고 있다.
활개를 갖추고 그 앞에 높이 220㎝, 전·후 직경 560㎝, 좌·우 직경 590㎝의 사각형 봉분을 만든 뒤
특이하게 앞과 뒤로만 호석(21)을 놓았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70×32), 장대석을 놓고
그 앞에 열쇠문양이 있는 복고석 2개를 받침대로 하여 상석(133×89×42)을 놓았다.
상석 앞에는 사각 향로석(37.5×31.5×51)이 있고, 그 앞 좌우에는 공복형의 문인석(138)이 각각 2개씩 있다.
문인석은 전체적으로 일자의 통비형으로 마모가 심한 편이다.
묘갈은 향로석 좌측에 남향하고 있는데,
민무늬 대석(95×73×48)과 비신(50.5×21×123),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87×63×44)으로 되어 있다.
贈資憲大夫 吏曹判書 行判撫山縣事 任公中善之墓 贈貞夫人淸州韓氏祔左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행판무산현사 임공중선지묘 증정부인청주한씨부좌
이 비는 세(歲) 창립 후 팔경신, 즉 1860년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고,
비문은 후손 임병재(任柄宰)가 찬하고,
조선 후기의 문신 해평인 석촌 윤용구(石村 尹用求)가 썼다.
조부 : 임진(任瑨)
부친 : 한성판윤 임산보(任山寶)
모친: 능성구씨, 면성부원군 문정공 구위(沔城府院君 文貞公 具褘)의 따님
판무산현사 임중선(任中善)
배위 청주한씨,문경공 한수(文敬公 韓修)의 따님
장남 병조참의 임효신(任孝信), 1411년(태종11) 문과장원급제
차남 임효충(任孝忠)
삼남 승지 임효공(任孝恭 )
사남 동지중추원사 인수부윤 임효인(任孝仁)
오남 첨지중추원사 임효면(任孝明)
육남 임효동(任孝敦) 宣敎郞報恩縣監 贈嘉善大夫 戶曹參判兼 同知義禁府事
선교랑보은현감 증가선대부 호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
==============================================================================================================================================
훈련대장 정의공 임태영(靖毅公 任泰瑛, 1791∼1868)
<字> 公澗(공간), <諡號> 靖毅(정의)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1840년(헌종 6) 길주목사로 재직하던 중
함경도암행어사 이은상(李殷相)의 탄핵을 받고 삭직 당하였으나 곧 복직되었다.
1841년 경상좌도수군절도사
1842년 전라도병마절도사
1851년(철종 2) 좌포도대장
1857년 평안도병마절도사
1858년 금위대장
1861년 우포도대장
1862년 총융사
1863년 어영대장·좌변포도대장
1865년(고종 2) 경복궁을 중건시 훈련대장으로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겸하였다.
시호는 정의(靖毅)이다.
崇政大夫工曹判書 諡靖毅 豊川任公諱泰瑛之墓
配貞敬夫人平山申氏 配貞敬夫人慶州崔氏祔左
숭정대부공조판서 시정의 풍천임공휘태영지묘
배정경부인평산신씨 배정경부인경주최씨부좌
고종 2년 광화문 중건 당시 훈련대장 임태영이 쓴 것이라 한다.
광화문 복원이 결정된 2005년부터,
균열이 생겨 새 현판을 만들기로 한 2010년까지도 현판 서체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고.
한자와 한글을 두고 시작된 논쟁은,
한자 중에서도 임태영 훈련대장의 글씨를 써야 한다는 주장에
조선시대 최고의 명필인 한석봉의 글씨를 집자해 쓰자는 주장이 더해졌고,
한글 중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를 쓰자는 주장과
훈민정음체를 따서 쓰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으나
최종 결론은 조선시대 고증에 따라
경복궁을 중건 시 훈련대장으로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겸한
任泰瑛 1791∼1868
임태영 훈련대장의 글씨를 복원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어...
광화문 편액 쓴 훈련대장 임태영 친필 발견 “명필 확인… 품격논란 끝내길”
동아일보 2012-05-21
편지 찾아낸 진태하 교수 “문자학 조예 깊었던 분… 복원과정에 문제있는 듯”
위의 사진은 새로 발견된 임태영의 친필 편지.
고려 말부터 조선 말까지의 친필 시와 서간을 모아 놓은 ‘근묵(槿墨)’에도 실리지 않은 간찰이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고종 때 경복궁 중건의 책임자로
광화문의 편액을 쓴 훈련대장 임태영(任泰瑛 1791∼1868)의 친필 글씨가 발견됐다.
광화문 복원 때 갈라진 ‘光化門’ 현판의 글씨는 1916년에 찍은 사진을 디지털로 복원한 것이었다.
디지털 복원 노력에도 불구하고 글씨의 상태가 좋지 않아 균열 사고 이후
‘현판 글씨의 격(格)’을 둘러싼 논란까지 빚어졌고 정조대왕이나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集字)해서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다시 등장했다.
여기에 ‘한자 현판이냐 한글 현판이냐’라는 논외의 공방까지 가세한 실정이다.
임태영의 글씨를 처음으로 발견한 진태하 전국한자교육추진연합회 이사장(인제대 석좌교수)은
“현판 글씨가 좋지 않다는 건 디지털 복원의 문제이지,
임태영의 친필을 직접 보니 바로 앞 시대를 살았던 다산 정약용에 못지않은 명필이다”라고 말했다.
2012년 진태하 이사장은
한 달여 전 고문서나 희귀본 등을 경매하는 ‘금요고서방’을 통해 임태영의 글씨를 찾았다.
철종 7년인 병진년(1856년),
임태영이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된 직후 누군가에게 보낸 간찰(簡札·편지)이었다.
경복궁 중건이 1865년이니까 그보다 9년 전쯤 쓰인 편지다.
내용은 특별하지않고 자기보다 더 높은 벼슬아치로부터 쪽지를 받고 잘 받았다고 대답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진 이사장은 “글씨뿐 아니라 편지 첫머리에 나오는 모(莫) 자 같은 글자를 보면
임태영이 자학(字學·한자 문자학)에도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며
“글씨의 격을 둘러싼 시비는 이제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흔히 ‘없을 막’ 자로 사용하는 ‘莫’을 임태영은 ‘저물 모’의 뜻으로 쓰고 있는데,
그건 그가 고어(古語)에도 능통하다는 의미라고 진 이사장은 설명했다.
진 이사장은 또 편지 글씨 속에 나오는 ‘闖(틈)’을 예로 들며
“디지털로 복원한 현판의 ‘門’ 자와 삐침이 많이 다르다”며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면 임태영의 현판을 복원할 때 참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창혁 기자 chang@donga.com
==================================================================================
壬辰倭亂때 燒失된 것을 복원할 때인 1865~1867년 경복궁 중건 당시 세운 광화문 현판 글씨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은 최근 현판 자료를 수집하던 중 흥미로운 기록을 찾아냈다.
현판을 쓴 이가 학계에 그동안 알려졌던 조선 말 서화가 몽인 정학교(1832~1914)가 아니라
경복궁 훈련대장이던 무관 임태영((1791∼1868)임을 알려주는 공사일지 <경복궁영건일기>의 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영건일지>에는 임태영이 ‘광화문 현판 서사관(書寫官)’으로 표기되어 있다.
서사관이란 글씨를 쓰는 임시직을 뜻한다.
그의 행적은 자세히 남아있지 않으나 일찍이 무과에 급제해
함경도 길주목사,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전라도 병마절도사, 좌포도대장, 평안도 병마절도사, 금위대장 등을 지낸
전형적인 무관이다. 탄핵과 복직을 거듭하면서 출세가도를 달려 나중에는 공조판서까지 지냈다고 한다.
천주교와는 대대로 악연이다.
아버지 임성고가 기해박해 때 관직에 있던 관계로 천주교도 색출을 하였고,
아들 임태영은 경신박해에 연루되었다.
경신박해 시 좌포도대장이던 임태영은
1859년 말부터 1860년 8월까지 30여명의 천주교도들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방화와 약탈 등 포졸들의 악행이 드러나 그는 파면되고 교우들은 석방됐다.
임태영이 고종 2년인 1865년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훈련대장이자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라는 중책을 맡아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한다.
그가 광화문 글씨를 썼다는 사실은 2005년 발견된 ‘경복궁 영건일기’에서 확인됐다.
이전까지는 유명서화가 정학교(1832∼1914)로 여겨졌으나
이 문헌에서 그가 서사관(書寫官)으로 기록돼 있었던 것이다.
이후 2010년 문화재청은 광화문 복원 공사를 마치면서
기존의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 대신 임태영의 글씨를 걸었다.
친필은 6·25때 사라지고 없으니 유리 원판에 희미하게 남은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했다.
글씨의 격이 도마에 오른 것은 원판의 해상도가 워낙 낮은데다 복원과정에 이용된 디지털 기술의 한계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진태하 인제대 석좌교수가 찾아낸 그의 친필을 보니
단순한 무관이 아니라 글씨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1856년에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된 직후의 간찰(簡札)이고 보면
9년 뒤 경복궁 중건 때는 글씨가 더욱 무르익었을 수도 있겠다.
스타일로 보면 다산 정약용에 가까운 명필이다. 광화문 글씨의 수준을 둘러싼 시비는 접을 때다.
국민일보 입력 2012-05-21 18:32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
형조판서 충정공 우연옹 임성고(忠貞公 偶然翁 任聖皐)
字 중안(仲岸), 號 우연옹(偶然翁). 諡號 무의(武毅), 충정(忠貞)
父 통제사 임율(任嵂)이다.
1795년(정조 19) 무과에 급제, 1808년(순조 8) 흥덕현감을 지냈다.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박천군수로 재임중 박천이 점령당하여 인부(印符)를 가지고 안주로 가려다가
노모가 홍경래의 휘하에게 잡히자 돌아와 포박당하였다.
끝까지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세록지신(世祿之臣 : 여러 대를 거쳐 국가의 녹을 받는 신하)으로 절개를 지켰으며
백성들의 요구로 죽음은 면하였다 하니 박천군수로 재임시 지역 백성에게 신망을 얻은것 같다.
난이 평정된 뒤 철원부사를 거쳐 1835년(헌종 1) 삼도우군통제사 겸 수군절도사,
1837년 함경북도병마수군절도사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옮겨
좌변포도대장·금위대장·한성부판윤·어영대장·훈련대장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처음에 무의(武毅)였으나 충정(忠貞)으로 개시(改諡)되었다.
반계 유형원, 유흠 (0) | 2016.01.07 |
---|---|
용인-문헌공 석천 곽원진(文憲公 石川 郭元振) 현풍곽씨 (0) | 2016.01.03 |
서울역사박물관 (0) | 2015.12.23 |
경희궁 흥화문 숭정문 숭정전 태령전 (0) | 2015.12.16 |
경교장 백범 김구 (0) | 2015.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