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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문헌공 석천 곽원진(文憲公 石川 郭元振), 현풍곽씨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1. 3.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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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風 郭氏)

 

 

현풍곽씨 문헌공 석천 곽원진(文憲公 石川 郭元振)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박곡리 238-1

 

 

본관은 현풍. 호 석천(石川). 시호 문헌(文憲).

곽원진은 문과에 급제하고 1306(충렬왕 32) 총랑(摠郞)으로서

원 황제의 생일을 축하가기 위한 원나라의 성절사로 파견되었다.

당시는 고려가 정치적으로 몽고의 간섭을 받던 시기였다.

여몽관계가 중요했던 시기에 곽원진은 성절사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이후 1310(충선왕 2) 좌대언(左大言)을 거쳐 성균제주·진현관제학에 이르렀다.

 

아버지 곽돈효(郭敦孝)는 고려조에서 밀직부사예부 상서를 지내고

어머니는 풍양조씨로 고려말 밀직부사와 대사헌에 첨의 평리를 지낸 조운경(趙雲卿)의 따님이다.

                                               (1339년에 충혜왕이 원나라로 갈때 함께 원나라로 갔다.)

아들은 판도판서와 상서좌승을 지낸 곽충관(郭忠貫)으로 현풍곽씨  9

손자는  곽 부(郭郛)

 

 

 

 

 

청산 곽유지(靑山 郭裕之) 회장상

 

 

 

석천사(石川祠)

대제학 문헌공 휘 원진(大堤學 文獻公 諱 元振)의 사당.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 박곡리 청계동)

 

 

 

 

 

 

 

 

 

 

 

 

 

 

 

 

 

문헌공(文獻公)의 배위는 모두 군부인의 봉호를 받았는데

백천 조씨는 평리 운경의 따님인데 묘는 실호하였고

인동 장씨는 별장 원우의 따님으로 묘는 합부하였으며

양천 허씨는 문화의 따님인데 묘는 실호하였다.

 

 

2남중 장남인 곽충관은 태중대부 상서좌승인데

                     배위는 안동김씨 낙안군(樂安君) 김지견(金之謙)의 따님이며,

          차남 곽충경은 병부상서이다.

 

2녀중 장녀는

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의 증손자인  안동김공 김천(安東金公 蕆)에게 출가하였는데 

김천은 후일 보국숭록대부 영삼사사 상락군의 봉작 증직의 봉호를 받고

배위인 현풍곽씨도 삼한국대부인에 봉작 증직 되었다. 

4명의 외손을 두니 士謙(김사겸). 士廉(김사렴). 士安(김사안). 士衡(김사형)으로 모두 淸官(청관) 顯職(현직)으로,

특히, 士衡(김사형)은 조선개국 1등공신으로 의정부좌정승을 지내고

상락백부원군에 봉해져 익원의 시호(諡 翼元公)를 받았다.

 

 

차녀는 보승랑 전주 최전에게 출가하였는데 아들 최정신은 중랑장이다.

곽충관의 아들 곽부는 추충익대공신 삼한삼중대광에

        사도 도첨의사를 수하고 포산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간이오

       충효로 정려가 내렸는데 순흥안씨 문순공 안천의 따님을 취하였으니 이는 문성공 안유의 손녀이다.

4남을 두었는데 거인은 전리판서요, 안유의 유례는 모두 전공판서이며, 안유신은 공부전서이다.

 

 

 

 

 

 

 

 

 

 

 

 

 

 

곽 문충공 예장 당시의 석물단

 

 

 

 

 

 

 

 

 

 

 

 

 

석천재

 

 

 

 

 

 

 

 

 

 

 

 

 

 

문헌공 휘 원진(文獻公 諱 元振)

원진 신도비(郭元振神道碑) 곽찬(郭璨)

이 비는 1806(순조 6)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 박곡리에 건립된 곽원진신도비(郭元振神道碑)

곽찬(郭璨)이 비문을 지었고, 이의국(李義國)이 글씨를 썼다.

 

곽원진 신도비

고려 성균관제주 진현관대제학 포산군 시 문헌 석천 곽선생 신도비명 병서

고려조 명신 성균관 제주 진현관대제학 곽공의 묘역이 양지현 동남 30리 되는

대덕산 서록 신향의 언덕에 있어 바라보면 당과도 같고 부와도 같아 보인다.

당초 예장이었으니 수도에 의당 비각이 있었을 터인데 지금은 없으니 혹 당시에 경황이 없었단 말인지

그렇잖으면 세월이 오래 되어 풀 속에 묻혀버렸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공의 자손들은 모두 한스럽게 여겨 이르기를,

자손의 불어남이 거의 만으로 헤아릴 수 있음은 공의 덕음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으나

묘소에는 편석조차 없으니 어떻게 후손을 훈계할 것인가?”하였다.

드디어 돌을 다듬고 불초더러 기록하라 하였다.

오호라! 묘문이란 유를 천히 여기고 실을 귀히 여기는 것인데 실을 따르자니 생졸은 근거자료가 없고

이력은 상고할 바가 없으며, 유를 따르자면 가허와 착공을 하여야 하는데

그런 행동은 불초가 하기 싫은 바이니 붓을 들기가 참으로 난감하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면 차라리 간명하게 하여야겠다.

공의 이름은 원진이요, 호는 석천인데 현풍에서 계출하였다.

현풍의 고호는 포산인데

상조인 포산군 경은 본시 중조 사람으로 승국에 나와 벼슬하여 소봉된 고을로 관향을 삼았다.

이로부터 훈덕으로 상승하여 드디어 동방의 망족이 되었는데,

증조인 기정은 이부상서 포산백에 시호는 정간이오,

조부인 옹은 문하찬성사이며, 부친인 밀직부사 돈효는 안동김씨 주부 희의 가문에 취처하여 공을 낳았는데

공의 이름은 크게 멀리 알려졌다.

고려사를 상고해보면, 충렬왕조에는 총랑으로 사명을 받들고 원나라에 갔었고,

충선왕조에는 좌대언이 되었다고 하였다.

대동운옥에는 집현제학이라 하였고, 여지승람에는 성균관제주 통헌대부 진현관제학이라 하였으며,

동사보감에는 진현관 대제학 포산군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공이 종정한 대략이다.

명신록으로 엮은 407명의에는 성리를 잠구하고,

육경을 연해하였다 하였으니 학술의 정심하였음을 가히 알 수 있겠고,

충숙왕조에는 문헌이라 시호를 내리고 충효를 정표하라 명하였으니 문행이 초매하였음을 알 수 있겠다.

김잠곡의 유원총보에는 이르기를,

곽모는 시여하기를 좋아하여 나이 16세에 태학에 있는데 한 선비가 가난이 극심하여

부조 이상의 5세를 장사지내지 못했다고 공을 찾아와 구조를 청하니

공이 서슴없이 돈을 내어주고 성명도 묻지 않았었다.”하였으니

그 기도의 넓음도 이와 같았는데 어찌 감이 망녕되이 한자라도 더 보태어 일미한다는 비방을 자초하겠는가?

 

문헌공(文獻公)은 통틀어 삼취를 하여 모두 군부인의 봉호를 받았는데

백천조씨는 평리 운경의 따님으로 묘는 실호하였고

인동 장씨는 별장 원우의 따님인데 묘는 합부하였으며

양천허씨는 문화의 따님으로 묘는 실호하였다.

2男 중 長男 충관은 태중대부 상서좌승인데 안동김씨 낙안군(樂安君) 김지견(金之謙)의 따님을 취하였고,

         次男 충경은 병부상서이다. 

2女 중 長女는 영삼사공밀직부사 (領三司公密直副使) 안동김씨 김천(安東金氏 蕆)에게 출가하여

             4子를 두니 士謙(김사겸). 士廉(김사렴). 士安(김사안). 士衡(김사형),  모두 淸官(청관) 顯職(현직)이다.

        次女는 보승랑 전주 최전에게 출가하였는데 아들 정신은 중랑장이다.

충관의 아들 부는 추충익대공신 삼한삼중대광에

         사도 도첨의사를 수하고 포산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간이오

         충효로 정려가 내렸는데 순흥안씨 문순공 천의 따님을 취하였으니 이는 문성공 유의 손녀이다.

            4男을 두었는데 거인은 전리판서요, 유의 유례는 모두 전공판서이며, 유신은 공부전서이다.

이하로도 대마다 어진 이가 떨어지지 않아 서원에 제향된 분이 12명이니

부사 도, 감사 호 사간 종원, 장령 종번, 집의 한철, 좌랑 기수, 첨정 흥무, 생원 한, 응교 천구,

          첨주 유번, 참봉 진, 사인 후태요,

입근자가 8명이니 사직 순성, 진사 수잠, 방어사 영, 군수 륜, 승지 방욱, 도사 재상, 사인 인손, 강화이며,

책훈자가 열넷이니 절도사 자안, 습독 연성, 주부 호례, 좌랑 인거, 부사 방건, 선전관 종문,

군수 지선, 주부 응룡, 좌랑 음, 통덕랑 차성, 군수 경, 사직 신장, 지추 천중, 통덕랑 후천이다.

적개에는 주부 진방, 헌납 성구가 있고, 유일에는 참봉 세평, 처사 율이 있으며,

문학에는 교리 천호, 찰방 치요, 생원 봉령이 있고, 효행으로 증직이나 정려를 받은 사람은 헤일 수 없이 많다.

이로써 배루에는 송백이 자라지 않고 오니에서는 주벽이 나지 않음을 알겠는데

이는 아마도 공이 후곤에게 끼친 유모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니

공의 불후함은 스스로 삼광과 아울러 빛날 만 한데 유양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 유방의 한두 가지를 간략하게 간추려 삼가 3번을 재계하며 7번을 명하기를,

 

충으로 근본을 삼고 효로 본원을 삼는 것이, 백행에 으뜸이 되나니,

나라에는 국승이 있고 민간에는 야사가 있어, 이름은 억만년 이어지리라.

마렵 일부토엔, 서운이 길이 드리우고 구두 삼척은, 남풍에도 깎임이 없으리라.

행로자 머리 숙여 지나면서, “저 대덕산 언덕은 대현인의 유택이다.” 말하리라.

 

후손 통훈대부 홍문관 교리 지제고 찬은 삼가 글을 짓고

후손 영민은 전액을 하였으며

후학 통정대부 원임 규장각 직각 연안 이의국은 글을 쓰다.

순조 병인년(순조 6, 1806)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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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암 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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