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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흥김씨 삼강정문 김충수 김함, 서흥군 김천록, 김효인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1. 11.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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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흥 김씨(瑞興金氏) 시조인  김보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아들 김은열(金殷說)6대손으로,

고려 명종(明宗) 때 사람이다.

손자인 김천록(金天祿)이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1280(충렬왕 7)에 왕으로부터 서흥군(瑞興君)으로 봉군(封君)된 뒤,

서흥을 본관으로 삼고 할아버지 김보를 시조로 추존하여 세계를 잇게 되었다.

 

조선 연산군 때의 학자인 김굉필(金宏弼) 이후 문중이 명문(名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김중건(金中乾)을 파조로 하는 경기파(京畿派), 김중곤(金中坤)을 파조로 하는 영남파(嶺南派나주파(羅州派해남파(海南派), 김중인(金中寅)을 파조로 하는 초계파(草溪派)로 나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흥김씨 삼강정문 [瑞興金氏三綱旌門]

조선시대 충신 김충수(金忠守)와 그 아들 김함(金涵)의 효행 및 열부의 행적을 담은 정문(旌門).

1984912일 경기도기념물 제77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에 있다.

정면 4, 측면 1칸의 팔각지붕 목조건물로

1754(영조 30)에 당시의 명필인 민우수(閔遇洙)의 기문을 받아 건축하였는데,

1958년 고삼저수지 관개공사로 인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되었다. 서흥김씨 판서공파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 산96>

 

김 충 수( 1549 1592 )

 

본관은 서흥(瑞興), 호는 창죽헌(倉竹軒)이며,

죽산부 양지현 월로동(月老洞: 현고삼면 월향리)에서 출생했다.

6세에 서당에서 글을 깨우쳤으며 재주가 뛰어났다.

9세 때 부친상을 당하고, 이후 모친 한씨가 종창을 앓았는데 반년이 넘도록 치료를 해도 효험이 없었다.

그런데 의원이 입으로 고름을 핥아내는 것이 즉효라 하자 이를 시행해 효험을 보았다.

이후에도 모친의 봉양에 열과 성을 다해 효자로서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45세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산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을 규합하여 의병진을 조직하고,

죽주성으로 달려가 왜적과 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노도처럼 밀려드는 적들에 대항하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이에 그의 아들 함()은 적전을 뚫고 부자가 합세하였으나 10월 말경 최후를 맞이하였다.

숙종 26(1700)년 증손 후가 정충(旌忠)의 장계를 올렸으나 조정의 홍혜는 하사되지 않았다.

이후 영조 16(1740)5대손 대영(大榮)7대손 동현(東賢)이 상계하여

삼강정려(三綱旌閭)를 하사받았고 봉정대부 사헌부장령직에 추증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김충수가 의병장으로 참여하여 왜병과 접전을 이루다 붙잡히게 되자,

아들 김함은 단신으로 적진에 쳐들어가 아버지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함께 순절하였다.

1700(숙종 26) 김충수의 충절을 기려 사헌부 장령(掌令)을 추증하고 충신정문을 내렸다.

 

 

임진왜란 당시 김충수가 의병장으로 참여하여 왜병과 접전을 이루다 붙잡히게 되자,

아들 김함은 단신으로 적진에 쳐들어가 아버지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함께 순절하였다.

이후 1606(선조 39) 김함의 효행을 기려 사헌부 지평(持平)을 추증하고 효자정문을 내렸다.

 

 

김함의 손부(孫婦)인 온양정씨는 병자호란을 당하여 피신하던 도중

적에게 수모를 당하자 정절을 지키기 위해 두 딸과 함께 연못에 투신 자살하였다.

이후 1740(영조 16)에 온양정씨에게 열부정문이 내렸다.

 

또 김함의 6대손 김익성(金益聖)의 부인 청주한씨는

병든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으나 끝내 숨지자 남편을 따라 순절하였다.

이후 1737(영조 13)에 청주한씨에게 열부정문이 내려졌다.

 

 

 [瑞興金氏三綱旌門] 서흥김씨 삼강정문의 측면▲    및 후면

 

                       서흥김씨삼강정려각정비

 

 

 

 

  삼별초의 난 평정에 공을세운 서흥군 김천록 신도비

 

서흥김씨의 시조 김보(金寶)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의 6세손이다.

그의 손자 김천록이 고려 원종 때 삼별초의 난을 평정할 시 

상장군 김방경의 휘하의 부장으로 공을 세우고

대마도 정벌시에도 공을 세워 서흥군에 봉해진다.

그래서 후손들이 김천록을 1세조로 하고 서흥을 본관으로 삼았다. 서흥은 황해도의 지명이다.

김천록의 아들 김세구는 판도판서를 지냈으며,

손자 김봉환은 1353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에 올랐다.

 

 

 

 

 

 

 

 

 

김효인(金孝仁) 묘역

() 문포(文甫), () 양성재(養性齋),

조선(朝鮮) 때 정의현감(旌義縣監)을 지냈고 참우리이등원종공신(參佑理二等原從功臣)이 되었다.

 

판서(判書) 중건(中乾)의 손자(孫子)인  효인(孝仁)은 성종(成宗) 때 등과(登科)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정의현감(旌義縣監)을 지내고

1489(성종 20) 좌리이등공신(佐理二等功臣)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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