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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이씨이세영, 대사헌 이세영.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1. 16.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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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城李氏 10世孫

이세영[李世英14521510(중종 5)]  본관은 양성(陽城), 字 자실(子實),

참판 이옥번(李沃蕃)의 아들로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성종 8(1477) 생원으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484년 봉상시 첨정, 1490년 지평,

1493년 병조 정랑 · 중추부 경력 등을 역임하였다.

연산군 3(1497) 집의 · 전한을 거쳐 이듬해 부제학 · 동부승지 · 좌부승지 · 우승지 · 좌승지를 지냈다.

 

1499년 의정부 사인으로 성종실록(成宗實錄)편찬에 참여하였다.

15022월 한성부 우윤에 임명되고, 4월 성절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9월에 돌아왔다.

그 뒤 공조 참판을 거쳐 이듬해 세자우빈객을 겸하였고, 이어 형조 참판 ·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중종반정 후 대사헌 재직 시 공신의 개정을 요구하여 이를 실현시켰으며,

1508년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몸가짐이 청검(淸儉)하였으며 시속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

 

 

양성이씨 10세손

이세영(李世英) 1452~1510,   () 水原崔氏 嘉山郡守 有容女,

() 이옥번(李玉蕃) ,        () 광주노씨(光州盧氏)

조부(祖父) 이계무(李季茂)

증조부(曾祖父) 이추(李推)

 

 

 

- 소재지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장서리 산61

묘역의 봉분은 쌍분으로 부인 수원최씨와의 합장묘이다.

묘역의 석물로는 묘표(墓表) 1, 신도비(神道碑) 1, 상석(床石) 1, 문인석(文人石) 2기가 있다.

쌍분 중앙 앞의 묘표는 조선전기의 전형적 양식인 화관석(花冠石) 형태의 비로,

규모는 화관석이50x 22x 28, 비신이 36.3x16.5x80, 비대가 78x49x25이다.

 

비신에 기록이 있는데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하다.

비대의 상단에는 연판문(蓮瓣文)의 흔적이 있으며,

전후면 측면은 2구획으로 나누어 안상문(眼象紋)을 좌우측면은 1구획으로 안상문(眼象紋)을 새겨 놓았다.

묘표 앞에는 상석(床石 114.5x76x17)이 배치되어 있다.

 

 

*** 대사헌 이세영 1452 ~ 1510 ***

1474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

1477 성종(成宗) 8,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정자, 예문관 검영 대교, 승정원 주서, 내자시 주부, 사헌부 감찰, 병조 좌랑,

형조 정랑, 홍문관 부교리, 사헌부 지평.

1484 봉사시첨정

1490 승의랑지평

1493 병조정랑에서 중추부 경력

춘추관 편수관으로 중훈대부 행 의정부사인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

1497 사헌부 집의, 홍문관 전한, 직제학

1498 홍문관 부제학, 도승지, 강원도 관찰사

1502 한성부 우윤,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 다녀옴

공조참판, 세자 우부빈객, 오위도총부 부총관, 사헌부 대사헌 동지 경연 세주우부빈객

1506 전라도 관찰사

1508 대사헌, 동지중추부사, 개성부 유수,

1510 임지에서 별세

 

묘역 우측의 신도비는 이수비신비대로 구성되어 있고,

규모는 이수가 71x22x36, 비신이 61.3x15.5x134, 비대가 98.5x58x23, 총고는 193이다.

비신의 비양(碑陽)에만 기록이 있으며

비신의 상단에 전액(籇額)대사헌이공비석 大司憲李公碑石이라 횡서로 쓰여 있다.

비제(碑題)有明朝鮮國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同知經筵世子右賓客陽城李公神道碑銘井存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신도비로 분류할 수 있다.

비문은 정사용(鄭士龍)이 찬()하고, 송인(宋寅)이 전액과 글씨를 썼다. 건립연대는 파악할 수 없다.

충도의 전면에는 한 마리의 이무기가 발톱으로 여의주를 잡고 삼키려는 형상을 조각한 반면,

후면에는 流雲紋(류운문)의 상단에 해를 조각하여 놓았다

이세영(1452~1510)은 양성이씨 10세손으로

자는 군실(君實)이고 1474년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여 147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정자·예문관 검열 대교·승정원 주서·내자시주부·사헌부 감찰·병조좌랑·

형조정랑·홍문관 부교리·사헌부지평 등을 거쳐

1484년 봉상시첨정. 1490년 승의랑지평. 1493년 병조정랑에서 중추부 경력이 되었다.

이어 춘추관 편수관으로 중훈대부 행 의정부사인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497년 사헌부 집의·홍문관 전한·직제학이 되어 연산군에게 직언하기도 했다.

1498년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왕이 경연에 나올 것을 장문의 상소로 올리고 사서의 직필 등을 직언하기도 하였다.

도승지·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1502년 한성부 우윤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공조참판이 되고

다음해 세자 우부빈객·형조참판·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 동지 경연 세자우부빈객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직언으로 연산군은 그를 의금부에 가두어 태형을 가하고 전의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시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었으며 병으로 사퇴하고 돌아와

1508년 대사헌에 다시 임명되고 이어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이 해 개성부유수가 되었는데 1510년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문명이 높았고 청간으로 여지승람신증에도 선입되었다. 향사는 매년 음력 107일이다.

 

 

 

 

동지중추부사 대사헌 이세영의 묘소 상단의 묘역

 

 

 

 

묘역 후면에서   아랫쪽이 대사헌 이세영

대사헌 이세영묘역 후면에서

 

 

 

 

 

 

 

 

 

 

 

 

 

 

陽城李氏 7世孫 병마절제사공 諱 推(휘 추) 묘역. 안성시 양성면 장서리 산12번지

 

 

 

黃海道都觀察黜陟士兼兵馬節制使陽城李公諱推之墓 配貞夫人順興安氏祔

황해도도관찰출척사 겸병마절제사양성이공휘추지묘 배정부인순흥안씨부

 

 

 

 

 

  벽암 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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