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기념물 제32호
소재지 :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산 28-1
반계 유형원선생묘
유형원(柳馨遠)(1622~1673)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유관(柳寬)의 9세손으로,
현령 유위(柳湋)의 증손자이고,
할아버지는 정랑 유성민(柳成民)이고,
아버지는 예문관검열 유흠이며, 어머니는 참찬 이지완(李志完)의 딸이다.
서울 출신. 18세에 혼인했는데,
처는 심수경(沈守慶)의 증손녀이자 부사 심은(沈誾)의 딸이다.
반계 유형원(柳馨遠)의 묘소는 백암면 석촌리 황석마을 정배산 남쪽 야산에 있다.
30여평 남짓한 묘역에는 반원형 담장이 둘러져 있고,봉분 좌측에는 묘비와 중수한 표석이 있다.
묘소 앞 좌우에는 마모가 심한 문인석과 고유석,상석,향로석,묘비 등이 있다.
1971년에 경기도에서 묘소 정화시 곡장 41M를 신축하였다.
유형원(1622~1673)의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係), 본관은 문화 이다.
2세때 아버지를 여의었음에도 5세부터 글을 배워 문장이 크게 이루어졌다.
21세에[자경사잠(自警四簪)]을 지었고,
[이기사칠 (理氣四七)], [인심도심(人心道心)]을 논술하는 등 새로운 학설을 많이 제기하였다.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효종 4년(1653)에 뜻을 품고 전라도 부안에 옮겨 경독하는 한편,
저작에 힘쓰고 이상적인 세상을 건설하려는 이념에 몰두하였다.
그는 천성이 청렴결백하였으며 민유중(閔維重)등이 벼슬에 추천하였으나 사양하고
농촌에서 기근 구제의 긴급책을 마련하는 등 이웃사람과 노복에 이르기까지 극진히 사랑하였다.
有明朝鮮國進士 贈執義兼眞善磻溪 柳先生馨遠之墓 贈淑人豐山沈氏祔左
유 조선국진사 증집의겸진선반계 유선생형원지묘 증숙인풍산심씨부좌
묘비는 영조44년 (1768) 유언지(柳彦摯)가 짓고, 홍계회(홍계희)가 썼다.
그는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방법 으로서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최저 기준량의 자작농지를 확보하게 할 것, 병농일치의 군제개혁, 부역의 균형,
국민균등의 세제정리, 국가재정의 확립, 상공업의 장려,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공거제의 실시,
관아의 정비등을 주장하여 이상국 건설을 실천에 옮기려 하였다.
그가 10년 동안 저작한[반계수록] 26권에는 그의 사상과 이상국가 건설의 구상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영조46에 왕의 특명으로 간행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임진왜란 뒤 사회가 극도로 어지럽고 양반 사회의 모순이 노정되어 가던
17세기초에 한성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글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으나,
불행히도 2세 때에 아버지를 잃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 흠은 유몽인(柳夢寅)의 옥에 연좌되어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옥사하였다.
5세 때부터 취학해 외삼촌 이원진(李元鎭)과 고모부 김세렴(金世濂)을 모시고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원진은 이익(李瀷)의 당숙으로 하멜 표류사건 당시 제주목사로 있었던 사람이다.
김세렴은 함경도와 평안도의 감사를 역임했고, 대사헌까지 지낸 당대의 이름 높은 외교관이기도 하다.
15세가 되던 해인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원주로 피난했고,
다음 해에는 지금의 양평땅인 지평 화곡리(砥平花谷里)로 이사했다가
다음 해에 다시 여주 백양동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하였다.
1644년 23세 때에는 할머니의 상, 1648년 27세 되던 해에는 어머니의 상을 당했으며,
탈상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과거에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하였다.
그 뒤 1651년(효종 2) 30세 때에는 할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2년 뒤 복상(服喪)을 마치자, 그 해에 32세의 젊은 나이에
멀리 전라도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에 은거하기 시작해 20년 간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남 6녀를 남기고 1673년에 죽었다.
반계라는 호도 이곳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한다.
우반동에 은거하면서 오랜 세월을 걸려서 쓴 ≪반계수록 磻溪隨錄≫ 26권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반계수록≫은 그의 주저(主著)로서,
그 동안 겪은 농촌 생활에서의 체험과 농촌 경제의 안정책 등을 제시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책으로서 정책론(政策論)이라 하겠다.
이 책의 성립 연대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으나 연보 등을 통해 추정하면,
그가 우반동으로 와서 은거 생활을 시작한 지 6년 후에서 11년 사이로,
그의 나이 38세부터 43세 사이가 될 것 같다.
≪반계수록≫의 주된 내용은 ① 전제(田制 : 토지 제도), ② 전제후록(田制後錄 : 재정·상공업 관계),
③ 교선지제(敎選之制 : 향약·교육·고시 관계), ④ 임관지제(任官之制 : 관료 제도의 운용 관계),
⑤ 직관지제(職官之制 : 정부 기구의 관계), ⑥ 녹제(祿制 : 관리들의 보수 관계),
⑦ 병제(兵制 : 군사 제도의 운용 관계), ⑧ 병제후록(兵制後錄 : 축성·병기·교통·통신 관계),
⑨ 속편의 의례·언어·기타, ⑩ 보유편(補遺篇)의 군현제(郡縣制 : 지방 제도의 관계) 등으로서
국가 체제의 전반적인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반계수록≫ 이외에도 정치·경제·역사·지리·군사·언어·문학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수 십 권의 저서를 남겼다고 전하나 불행하게도 ≪반계수록≫ 이외에는 서목(書目)만이 전해진다.
주요한 것으로
① 성리학 관계의 ≪주자찬요 朱子纂要≫·≪이기총론 理氣總論≫,
② 지리서로는 나이 35세 때인 1656년에 박자진(朴自振)과 함께 ≪동국지지 東國地志≫에 대해
깊이 토론한 끝에 지리의 식견을 정리한 ≪여지지 輿地志≫를 비롯해
≪지리군서 地理群書≫ 등이 있으며,
③ 역사서로는 44세 때 편찬한 ≪동국사강목조례 東國史綱目條例≫를 비롯한
≪동사괴설변 東史怪說辨≫·≪동국가고 東國可考≫ 등이 있다.
④ 병법서로 ≪무경사서초 武經四書抄≫·≪기효신서절요 紀効新書節要≫,
⑤ 음운(音韻) 관계의 ≪정음지남 正音指南≫,
⑥ 문학 관계의 ≪도정절집 陶靖節集≫·≪동국문초 東國文抄≫,
⑦ 기타의 저술로 ≪기행일록 紀行日錄≫ 등을 꼽을 수 있다.
죽은 뒤 그의 명성이 얼마 동안은 세상에 묻혀 있다가
100년 뒤에 와서야 인물됨과 ≪반계수록≫의 내용이 알려지고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당시 국왕(영조)도 관심을 가져 초고(草稿)를 직접 읽어보고
크게 칭찬함과 동시에 인쇄해 세상에 널리 반포하도록 명했다고 한다.
왕명을 받아 ≪반계수록≫의 서문과 함께 세상에 알린 사람이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 이미(李瀰)였고,
반포한 때가 1770년 (영조 46)으로 그가 죽은 지 꼭 97년 뒤의 일이다.
이 일이 있기 이전 1753년에는 조정에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에게 통정대부로서 집의 겸 세자시강원진선을 추증했고,
1768년 10월에는 판중추 홍계희(洪啓禧)가 찬한 묘비가 죽산부사 유언지(兪彦摯)에 의해 세워졌다.
그리고 1770년에는 다시 통정대부 호조참의 겸 세자시강원찬선에 증직되었다.
≪반계수록≫에 나타난 사상적 특징은
부민(富民)·부국(富國)을 위해 제도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토지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그렇게 해야만 농민들에게 최소한의 경작지를 분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형원의 최대 목표는
자영농민(自營農民)을 육성해 민생의 안정과 국가 경제를 바로잡자는 것이었다.
토지는 국가가 공유하고 농민들에게 일정량의 경지만을 나누어주는 균전제를 주장하였다.
즉, 그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과 균전제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 밖에도 병농일치의 군사 제도, 즉 부병제(府兵制)의 실시를 강조하였다.
원래 그가 주장한 균전제와 부병제는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에서 중시한 제도였다.
또한, 국가 재정을 확립시키기 위해 세제와 녹봉제의 정비도 주장하였다.
세제는 조(租)와 공물(貢物)을 합쳐 경세(經稅)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하며,
경세는 수확량의 20분의 1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과거제의 폐지와 공거제(貢擧制) 실시, 신분제 및 직업 세습제의 개혁,
학제와 관료제의 개선 등 다방면에 걸쳐서 국운을 건 과감한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모든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지면 천덕(天德)과 왕도(王道)가 일치되어
이상국가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와 같은 주장은 실제로 실행되지는 못했으나,
개혁 의지와 사상은 당시 재야 지식인들의 이상론(理想論)이 되었으며,
후학들의 학풍 조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학문은 실학을 학문의 위치로 자리잡게 했으며,
이익·안정복(安鼎福) 등으로 이어져
뒤에 후기 실학자로 불리는 정약용(丁若鏞) 등에게까지 미쳐 실학을 집대성하게 하였다.
유형원은 1622년(광해 14) 서울 소정릉동(지금의 貞洞)의
외삼춘 태호(太湖) 이원진(李元鎭, 우찬참 역임.) 집에서 태어났다.
세종조의 청백리로 우의정을 지낸 문간공(文簡公) 하정(夏亭) 유관(柳寬)의 9대손.
할아버지 유성민(柳成民)은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후일 병조참판으로 증직됨.).
아버지 유흠(柳흠)은 문과급제하고 예문관 검열.
어머니 여주 이씨는 우참찬 이지완(李志完, 성호 이익의 종조부)의 딸이다.
아버지 유흠(1596~1623)은 유형원이 태어난 다음 해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로 한창 이름을 날렸으나 ‘유몽인(柳夢寅)의 역옥(逆獄)’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28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했다.
유몽인은 인조반정 후 은둔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의 복위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발을 받아 처형되었다.
이 ‘역옥’은 뒤에 무옥(誣獄)으로 밝혀지지만,
유형원의 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파탄되었다. 유형원이 2세 때의 일이다.
유형원은 비록 어려서 부친을 잃었지만
명문 사대부 가문의 외삼촌 태호(太湖) 이원진(李元鎭)과 고모부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에게서
기초학문을 배웠다. 그는 어릴 적부터 사물을 탐구하는 데 남달랐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여덟 살에 이미 《서경(書經)》과 《역경(易經)》을 읽은 천재”라고 적고 있다.
외삼촌 이원진은 성호 이익의 당숙으로 하멜표류사건 당시 제주목사로 있었던 사람으로 큰 학자였다.
고모부 김세렴은 유형원의 할아버지인 유성민의 사위로 함경도와 평안도 감사를 역임하였고,
호조판서, 대사헌까지 지낸 고관으로 학문까지 높았다
▲ 실학박물관/실학의 비조 반계 유형원 전시실
반계수록전시본
▲ 반계수록▼ 반계 유형원이 19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명저(실학박물관 소장)
▲ 우반동 부안김씨 고문서 중의 하나로
반계 유형원의 할아버지 되시는 유성민이 김홍원에게 우반리 동변 일대를 팔면서 작성한 매매 문서이다.
'證 長孫 學生 德彰' 학생 덕창이 이를 증했는데 덕창은 반계 유형원의 소년기 이름이라 한다.
유형원의 묘역 후면에 선친 유흠의 묘역이 있다.
有明朝鮮國藝文館檢閱柳欽之墓 淑人驪州李氏祔左
유 조선국예문관검열유흠지묘 숙인여주이씨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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