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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공 심결

청송심씨

by 碧巖 2016. 1. 22.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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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松沈氏 靖夷公墓所청송심씨 정이공묘소

 안효공 심온의 세째 아들 정이공 심결 묘역

경기 안성시 양성면 장서리 산 69

 

심결(沈決),靖夷公) 통지通之 (1419~ 1470) 配位 貞敬夫人 居昌愼氏

증조부는 전리정랑(典理正郞) 심용(沈龍)이고,

할아버지는 좌정승(左政丞) 청성백(靑城伯) 정안공(定安公) 심덕부(沈德符)이며,

아버지는 영의정(領議政)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안효공(安孝公) 심온(沈溫)의 셋째 아들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생으로, 세종의 처남이다.

문종과 세조의 외숙부이며, 아들은 심정원(沈貞源)이다.

1418(세종 즉위) 아버지 심온이 병조판서 박습(朴習)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처형됨에 따라

오랫동안 등용의 길이 막혔다가, 1450(문종 1)에 형 심회(沈澮), 조카 심미(沈湄, 큰형 심준의 아들),

조카 강희안 등과 함께 관직에 등용되어 돈녕부 주부(敦寧府注簿)가 되었고,

단종 때에는 첨지돈녕부사(僉知敦寧府事)에 올랐다.

1455(세조 1)에 세조가 즉위하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발탁되었고,

세조 즉위에 참여한 공로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56(세조 2)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제수받았고,

1459(세조 5)에 인순부윤(仁順府尹)으로 전임하였다.

그리고 중추원사(中樞院事)를 역임하였으며, 1461(세조 7)에는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올랐다.

이어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역임하였으며,

1품의 대광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大匡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어비리에 있었으나

태풍의 영향으로 부득이 2001년

이곳 안성시 양성면 장서리 산 69번지로 이장하였다.

시호는 정이(靖夷)이다

 

 

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贈諡靖夷公沈決之墓  配貞敬夫人居昌愼氏祔左

대광보국숭록대부영중추부사증시정이공심결지묘  배정경부인거창신씨부좌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증시정이공심결지묘 배정경부인거창신씨부좌

 

 

 

 

 

성종실록 1(1470) 8611번째 기사 - 행 판돈녕부사 심결의 졸기

 

행 판돈녕부사(行判敦寧府事) 심결(沈決)이 졸()하니,

조회(朝會)를 거두고, 조제(弔祭)하고 예장(禮葬)하기를 예()와 같이 하였다.

심결의 자()는 통지(通之)이고, 소헌 왕후(昭憲王后)의 아우인데,

그 아버지 심온(沈溫)이 죄로 죽었으므로 폐고되어 관직에 나가지 못하였다.

문종이 처음으로 기용하여 돈녕부 주부(敦寧府主簿)를 삼고, 동첨지돈녕부사(同僉知敦寧府事)로 뛰어올랐다.

세조(世祖)가 또 발탁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삼고,

가선 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올리고, 가정 대부(嘉靖大夫)로 올리고,

인순부윤(仁順府尹)으로 전임(轉任)하였는데, 곧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뛰어올랐고,

경진년에 숭정 대부(崇政大夫)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올랐고,

신사년에 숭록 대부(崇祿大夫)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었으며, 계미년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옮기고,

성화(成化) 병술년에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올랐다가

곧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옮기고,

기축년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올랐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으니, 나이가 52세이다.

 

정이(靖夷)라고 시호(諡號)하니, 자기 몸을 공손하게 하고 말이 적은 것을 정()이라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고요한 것을 좋아하는 것을 이()라 한다.

 

심결의 사람됨은 자질과 성품이 온량(溫良)하고 용모와 예의가 단정하였다.

세조가 불러서 궁으로 들어오게 하여

집안 사람의 예절로 대우하여 외삼촌이라 호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였다.

아들이 있으니, 심정원(沈貞源)이다.

성종실록 1(1470) 8611번째 기사 - 행 판돈녕부사 심결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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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심씨 카페에서

정이공(靖夷公)의 휘()는 결()이요 는 통지(通之)이며 시호(諡號)靖夷이시니

서기1419(世宗:己亥) 서울 성동구 왕십리에서 태어나셨다.

정이공은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아우인데, 아버지 안효공께서 자진(自盡)하신 후로 벼슬에 등용되지 못하였다.

世祖 실록에 보면 형 심준(沈濬)과 아우 심결(沈決)과 더불어 자기의 의지(意志)를 굽히고 학문에 뜻을 두며

겸손하고 공순하여 법도에 맞으니, 文宗이 즉위해서는 벼슬길에 등용하게 하였다.

이때에 와서 심준은 이미 죽었고 다만 심회(沈澮) 심결(沈決) 만이 생존해 있으니

임금이 발탁하여 당상관(堂上官)으로 삼았다.

임금의 특별한 대우가 매우 융숭해져서 매양 대궐안에서 그를 숙부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였으며 또 정이공(靖夷公)께서 집안에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을 두고 사헌부에서 누차 벌주기를 주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셨다.

사헌부에서 다시 벌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명하여 사헌부의 관리를 의금부에 가두어 국문하게 하였으니,

공을 생각하는 임금의 극진한 마음이 이와 같았다.

처음에는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다가 비로소 서기1451(文宗1) 문종이 즉위하시자

아버지 안효공의 무고한 죄가 신원(伸冤)되시고 모든 관작이 복관(復官)되었으며 시호를 安孝라 내리고

형 공숙공(兄 恭肅公)과 같이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6)에 제수되었으며

世祖1(1455:乙亥)에 첨지돈녕부사(僉知敦寧府使:4)에 승진되시고

세조2(1456:丙子)에 당상관 통정대부(通政大夫:3)로 승진되시고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셨다.

세조3(1457:丁丑)에 가선대부(嘉善大夫:2)로 올라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승진되셨다.

세조5(1459:己卯)에 가선대부 인순부윤(嘉善大夫仁順府尹)으로 전직되셨다.

세조6(1460:庚辰)에 정헌대부(正憲大夫:2)로 승급되시고

세조(1461:辛巳)에 숭정대부(崇政大夫:1) 지중추원사(知中樞府事)로 승진되셨다.

세조9(1463:癸未)에 숭록대부 공조판서(崇祿大夫 工曹判書:1)가 되셨다.

세조12(1466:丙戌)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전직되시고

예종1(睿宗 1469:己亥)에 보국숭록대부 영중추원사(輔國崇祿大夫 領中樞院事:1)로 승진되시고

다시 판중추원사가 되셨다.

성종1(1470:庚寅)에 대광보국숭록대부 판돈녕부사(大匡輔國崇祿大夫 判敦寧府事:1)로 전직되시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해 8에 서거하시니 향년이 55세이시다.

행판돈녕부사(行判敦寧府事) 沈決께서 하시니

임금이 조회(朝會)를 거두고 조제(弔祭)하고 예장(禮葬)하기를 예()와 같이 하셨다.

시호를 정이(靖夷:恭己鮮言曰靖, 安心好靜曰夷)라고 하니

자기 몸을 공손하게 하고 말이 적은 것을 정()이라 하고 고요한 것을 좋아하는 것을 이()라 한다.

정이공의 사람됨은 성품이 온량(溫良)하고 용모와 예의가 단정하셨다 라고 하였다.

龍仁市 三東面 魚肥洞 吐雲谷 子坐이시고

배위(配位)는 거창신씨(居昌愼氏)로 합장(合葬)이시다.

의 아드님은 한분으로 휘가 정원(貞源)이시고 벼슬이 통정대부 전라좌수사(通政大夫 全羅左水使)이시다.

 

어명을 받고 사후(射侯:활쏘는것) 시 두 수를 지음

神武定禍亂 聖人濟艱難 願享南山壽 萬葉令民間

(신무정화란 성인제간난 원향남산수 만엽영민간)

세종대왕께서는 화란(禍亂)平定하시고 세조대왕께서는 가난을 구제하셨으니

원컨대 남산같이 큰 수를 누리시와 만세토록 백성을 편안케 하옵소서

聖君撫東方 庶類自生成 日暖草木暢 飽得乾坤寧 小臣曾無學 贊揚殊未精

(성군무동방 서류자생성 일난초목창 포득건곤녕 소신증무학 찬양수미정)

성군이 우리나라를 잘 다스리시니 백성들이 스스로 자라서 성공합니다.

날이 따뜻해지니 초목이 무성해지고 배불리 먹고 사니 천지가 태평합니다.

소신은 일찍이 배움이 없어 임금의 덕 찬양하기를 자세히 못하였습니다.

 

 

 

 

 

 

 

벽암 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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