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공 백강 이경여(文貞公 白江 李敬輿)
경기조 포천시 내촌면 음현리 산31-3
이경여[李敬輿, (1588~1657)]
字 직부(直夫),
號 백강(白江)·봉암(鳳巖),
諡 문정(文貞),
본관은 전주(全州),
포천시 내촌면 음현리 산31-3
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 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유명조선국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 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
贈諡文貞公白江李公神道碑銘幷序
증시문정공백강이공신도비명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겸 영경연사(領經筵事) 치사(致仕) 송시열(宋時烈)이 찬하고
성록대부(成祿大夫) 청평위(靑平尉)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 심익현(沈益顯)이 쓰고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 겸 동지(同知) 춘추관사(春秋館事) 김만중(金萬重)이 전(篆)하다.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사인 등을 지냈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이 광해군에게 죽음을 당하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 다시 기용되어 부수찬·부교리 등을 지내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에 호종하고, 이어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었다.
그뒤 부제학·청주목사·좌승지·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을 사수할 것을 주장하며,
이듬해 경상도관찰사에 오른 뒤, 이조참판·대사성·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42년 명나라 선박과 몰래 무역하는 것을 묵인하고
청나라 연호인 숭덕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이계(李烓)가 청나라에 밀고하여 심양에 억류되었다.
이듬해 은(銀) 1,000냥을 바치고 풀려나 소현세자와 함께 돌아온 뒤 우의정에 올랐으나,
이후에도 청으로부터 기피인물로 지목되었다.
1644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청 황제가
"경여가 전에 죄가 있는 것을 사면하여 내보내기는 했으나
벼슬을 승진시켜 정승을 삼은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다시 억류되었다.
1645년 세자가 청의 황제에게 상소하여 풀려나 귀국했다.
이해 소현세자가 변사하여 세자책봉문제가 대두되자
'경상의 도(道)'를 주장하며 세손(소현세자의 아들)을 지지했으나,
인조는 봉림대군(鳳林大君:뒤의 효종)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듬해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 : 昭顯世子嬪)의 사사(賜死)가 소의 조씨를 저주했다 하여 사약을 받게 되었을 때,
이에 반대하다가 진도에 유배되었으며, 1648년에는 삼수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듬해 효종이 즉위하면서 풀려나와 다시 중용되어, 1650년(효종 1) 영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그뒤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1654년 영풍군 식이 세자책봉을 청하기 위하여 청나라에 갔을 때 그의 근황이 보고되기도 했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부여의 부산서원, 진도 봉암사, 흥덕 동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백강집〉이 있다.
諡號는 문정(文貞)이다.
이경여 신도비는 약천사를 지나 계곡 끝 농장 초입에 있고 묘는 농장 후면
이경여[李敬輿, (1588~1657)],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봉암(鳳巖),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전주(全州),
7代祖 : 세종대왕
6代祖 : 밀성군 이침(密城君 李琛,(세종의 5남) 1430년 ~ 1479년
5代祖 : 운산군 이계(雲山君 李誡)
高祖父 : 광성정 이전(匡城正 李銓)
曾祖父 광원정 이구수(李耉壽),
祖父 첨정 이극강(李克綱),
父 목사 이수록(李綏祿), 母 송제신(宋濟臣)의 따님,
配位 정경부인 해평윤씨, 영의정 윤승훈(尹承勳)의 따님 무후
부덕(婦德)이 훌륭하고, 효성을 극진히 하다가 그로 인해 졸하자 정려(旌閭)되었다.
繼配 정경부인 풍천임씨, 별제 임경신(任景莘)의 따님
子 원주목사 이민장(李敏章),
子 참판 이민적(李敏迪),
子 대제학·이조판서 이민서(李敏敍) --좌의정 한포재 이건명
子 지평 이민채(李敏采)이다.
3대 대제학을 배출한 4가문 중 전주이씨 이경여 가문
대제학·이조판서 이민서(李敏敍)
대제학·좌의정 이관명(李觀命)
대제학·우의정 이휘지(李徽之)
有明朝鮮國領議政文貞李公敬輿之墓 貞敬夫人豐川任氏祔
묘소 봉분은 이경여와 풍천 임씨를 합장한 단분으로 봉분 주위에 12개의 호석을 둘렀으며,
호석에는 방위에 따라 申, 巳, 寅, 亥, 를 새겼다.
申
巳
寅
亥
이경여는 청나라 감옥에 두 차례나 갇혔었다.
인조 20년(1642년) 12월 11일 한해가 끝날 무렵의 일이었다.
이경여(李敬輿)는 청국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명한(李明漢)은 지난해에 명나라와 통신할 때 글을 지은 일이고,
허계(許啓)는 그 논의에 참여하였다는 것이고,
동양(東陽) 신익성(申翊聖)은 시론(時論)을 주도하였다는 것이고,
신익전(申翊全)은 기자묘(箕子廟)의 제향에 참여하여 궁관(宮官)을 그만두려고 꾀하였다는 일로
청나라는 이들 다섯 명을 심양으로 끌고 가기 위해 청나라에서는 두 박씨(博氏)를 보냈으며
이 때 따라온 정명수는 길가에 꽂아놓은 횃불이 드물게 있다고 크게 노하여
도사 신응망(辛應望)을 잡아 갓을 벗기고 몰고 오다가 풀어주는 행패를 부렸다.
전 정승 이경여(李敬輿),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전 판서 이명한(李明漢),
전 참판 허계(許啓),
전 정언 신익전(申翊全) 등이 심양에 당도하니
청인(淸人)이 칼을 씌우고 두 손을 결박하고서 동관(東館)에 구금하였다.
조금 후에 정역(鄭譯: 정명수)이 이들을 몰아 아문(衙門)으로 가니,
용장(龍將: 용골대)이 가린박씨(加麟博氏) 및 압송해 간 두 박씨(博氏)와 벽을 등지고 나란히 앉아서
오신(五臣)에게 일제히 들어와 기둥 밖에 앉게 하고 차례로 문답한 뒤에 도로 동관에 안치하였다.
소현세자가 재신들을 거느리고 황제의 처소에 나아가 글을 올리니,
황제가 곧 동양 형제를 풀어주며 말하기를,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국왕의 가까운 척속이며(동양 신익성은 선조의 부마였다)
세자가 또 와서 하소연하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하여 국왕과 세자의 광채를 내주기 위해서이다.
그 나머지는 세자가 아무리 이와 같이 간청하더라도 섣불리 풀어줄 수 없다.”
세자가 관소에 돌아오니 용장(龍將) 등 세 사람이 뒤따라 와서 동양 형제를 불러냈다.
그들이 도착하여 앞기둥 아래에 꿇어앉자 용장 등이 일어나 서서 황제의 명을 전유(傳諭)하고 풀어주니,
정역이 칼과 포박을 풀고 황제의 처소를 향해 사배(四拜)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신익성과 그 아우 익전은 동쪽(고국)으로 돌아왔다.
이경여(李敬輿)·이명한(李明漢)·허계(許啓)·김상헌(金尙憲)은 그대로 동관(東館)에 구금하고,
최명길(崔鳴吉)·심천민(沈天民)·이지룡(李之龍)은 북관에 구금하였는데,
얼마 후에 지룡과 천민은 하찮은 인물이라서
깊이 문책할 것이 없다는 이유로 관소(館所)에 전유(傳諭)하여 석방하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용골대 등이 황제의 뜻으로 와서 세자에게 전유(傳諭)하기를
‘김상헌은 북관(北館)으로 옮겨 안치하고,
이경여(李敬輿)·이명한(李明漢)·허계(許啓) 세 사람은 사형으로 조율하였으나
황제께서 차마 죽이지 못하여 모두 삭직(削職)하여 방송한다.
이경여와 이명한은 각각 은 1천 냥을 바치고 허계는 6백 냥을 바치되,
그들에게 각자 자기 집에서 준비하여 바치게 하라.’ 하고,
또 세 신하를 불러 뜨락에 꿇어앉히고서 황제의 명을 전유한 뒤에
곧 칼과 결박을 풀어주고 서쪽을 향해 사배(四拜)하고 나가게 하였습니다.
한달 쯤 지나서 이경여(李敬輿), 이명한(李明漢)과 허계(許啓)가 돈을 바치고 심양에서 돌아왔다.
또, 그때부터 1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이경여가 우의정이 됨으로써 장남 이민장은 볼모로 심양으로 가야했다.
부친이 정승이 되고 아들은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야 하는 배반의 현실이 가족 모두를 가슴아프게 했다.
사은사 이경여(李敬輿), 부사 홍무적(洪茂績), 서장관 이여익(李汝翊)이 심양에 갔다.
이때 우의정인 이경여의 질자로 장남 이민장(李敏章)이 같이 들어갔으며
심기원의 질자 심석경을 대신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3월 말경 사은사 일행이 심양에 도착했을 때 용골대(龍骨大)와 가린박씨(加麟博氏)가
정역(鄭譯: 정명수)을 거느리고 관소(館所)에 와 우의정 이경여(李敬輿)를 구류시켰고,
부사 홍무적이 사명을 수행하였다.
한편 우의정 이경여가 감옥에 갇혔기에,
좌의정 심열이 우의정이 되고 홍서봉이 좌의정이 되었고 홍명립이 홍서봉의 질자로 심양에 들어갔다.
사은사 일행과 함께 심양에 간 이민장은 옥에 갇힌 이경여의 수발을 해야했다.
이때 같은 감옥에 갇혀있던 김상헌이 이민장에게 주는 글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완산(完山) 이 상공(李相公: 이경여)이 북정(北庭)에 조빙(朝聘)하러 올 적에 가독(家督: 이민장)이 따라왔는데,
얼마 뒤에 명이(明夷)의 화에 걸려 나와 함께 전후하여 별관(別館)에 구류되어 있으면서
지붕을 나란히 해 거처하였다.
이에 담장을 뚫고 서로 왕래하였는데, 아침저녁을 가리지 않았으니,
이는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이었으며, 또한 함께 환란을 만나서였다.
내가 그의 아들을 나의 아들처럼 여겼는데, 깨끗하고 명석하며 풍부하고 두터웠으며,
속은 반듯하고 겉은 순하였는바, 공손하여 법도가 있는 집안의 자제였다.
그는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서는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은 다음 단정히 앉아서 글을 읽었는데,
밤이 이슥해져서야 비로소 그치었다.
또한 아버지의 명이 있지 않으면 문밖으로 나가는 자취를 자주 볼 수 없었다.
때때로 나를 찾아와서 의심스러운 점을 질문하면 내가 알고 있는 바로써 고해 주었는데,
말을 하면 곧바로 깨달았다. 그의 안색을 살펴보면 마치 기뻐하는 듯하였으며,
역시 권태로워하는 기색을 볼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이 지낸 것이 한 해가 넘었는데, 일이 끝나고서 장차 동쪽으로 돌아가게 되자,
“저에게 지금 소원이 있어 청해 볼까 합니다.
종신토록 외우면서 지킬 만한 말 한마디를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아, 옛날 사람들은 이별에 임하여 서로 간에 처증(處贈: 덕담)하는 일이 있었다.
이런 도가 오랫동안 없어졌었는데, 지금 자네로부터 다시 행해지게 되었다.
비록 그러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해 줄 만한 사람이 아니니, 어찌 능히 두터운 소망을 채워 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일찍이 듣건대 장사(長沙) 도공(陶侃, 도간:진나라 대장군)이 한 말이 있으니,
‘대우(大禹)는 성인(聖人)인데도 오히려 촌음(寸陰)을 아꼈으니,
중인(衆人)들은 의당 분음(分陰)을 아껴야 한다.’ 하였으니, 선비의 마음 씀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하고서도 오히려 잃을까 두려워해야 한다.’
하였으며,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안연이 말하기를,
「순 임금은 어떠한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훌륭한 일을 하는 자는 또한 이 순 임금과 같다.」 하였다.’
하였네. 이제 자네가 장사(長沙)가 시간을 아까워한 뜻을 지니고,
공자와 안자(顔子)의 훈계를 가슴 깊이 새기고서 날마다 부지런히 힘쓴다면 거의 이룸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시를 써서 준다.
종남산과 백악 모습 양쪽 고운 눈썹인데 / 終南白岳兩脩眉
그 중간에 대문 있어 바라보면 뚜렷하네 / 門巷中間望不迷
작은 등불 은은한 빛 한 점 붉게 비치이면 / 隱映小燈紅一點
새벽녘에 그대 앉아 글 읽는 줄 내 알았네 / 知君曉坐讀書時
1645년 초, 마침내 심양에 인질로 잡혀있던 소현세자를 필두로 모든 인질은 석방되어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듬해 이경여는 1646년 3월 소현세자빈(姜嬪)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삭탈관직(削奪官職), 문외출송(門外黜送)당하고, 진도로 유배되었다.
지천 최명길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사죄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몇 해 전에 '서하의 재앙[西河之厄]과 심양 북옥에서의 치욕[北扉之辱]'은
그 처음이 모두 아우가 형을 천거하여 조정에 드시게 한 데에서 생긴 일입니다.
대개 청나라 사람이 형의 명성을 듣고는 황각(黃閣: 정승 자리)에 크게 쓰이는 것을 미워하여
이와 같이 잡아 가두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형의 국사를 위한 고심과 천조(天朝: 명나라)를 위한 높은 절개는
결단코 아우의 천거로 해서 천하에 드러날 수 있었고,
후세에 드리울 수 있게 되었으므로, 심양 옥에 갇히게 되었던 곤욕도 모두 저의 천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일찍이 남옥에 있을 적에,
"어지러운 세상에 부질없이 경륜(經綸)을 펴 보았다가,
늦게 친구에게 누만 끼쳤구나[雲雷枉許效經綸, 晩節眞成累故人]."라는 시구로
형을 옥중에서 맞아 슬퍼도 하고 기뻐도 했던 것입니다.
형도 또한 심양 옥에 같이 갖히게 된 것을 슬퍼도 하시고 기뻐도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벗의 이러한 누(累)는 기뻐할 만한 것이니, 천리마의 꼬리에 매달려 이름을 드러내는 일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신 형의 뜻은 긴요한 곳을 집어낸 진실한 표현의 말씀이셨습니다만,
아우의 마음은 이제 벗에게 누를 끼쳤다는 겸연쩍은 탄식이 더욱 간절합니다.
아우가 만일 당초에 형을 재상으로 천거하지 아니하였다면 애당초 북비(北扉)에서의 구금은 없었을 것이요,
다음으로는 남해의 먼 유배지에서 위리까지 당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니,
이것은 분명히 벗에게 누를 끼친 것입니다.
어찌 벗으로서 스스로 허물하여 책망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최명길은 1586년 8월 25일생이고, 이경여는 1585년 1월 9일생이다.
참조: 조선왕조실록, 청음집, 지천선생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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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吏曹參判 行原州牧使 李敏章 墓域
증이조참판 행원주목사 이민장 묘역
증이조참판 행원주목사 이민장(贈吏曹參判 行原州牧使 李敏章)[1620~1694]
효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이경여(李敬輿)의 큰아들이다.
벼슬은 음보(蔭補)로 1651년 전설사 별검(典設司別檢)에 임명된 후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위솔(衛率)과 익찬(翊贊),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사직서령(社稷署令) 등을 역임하였다.
또 연안(延安)·단양(丹陽)·원주(原州) 등지에서 지방관으로 지냈다.
사후에 아들 이천명(李泉命)이 2품직에 오르면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배위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도정(都正) 이초노(李楚老)의 딸로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봉분 앞에 세워진 묘갈의 앞면에는
'有明朝鮮國 贈吏曹參判 行原州牧使李公敏章之墓 贈貞夫人咸平李氏祔左’라 새겨져 있고,
유명조선국 증이조참판 행원주목사이공민장지묘 증정부인함평이씨부좌
뒷면에 ‘이민장 묘갈(李敏章墓碣)’이라 시작되는 음기는 조카 이이명(李頤命)[1658~1722]이 글을 짓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던 막내 사위 김진규(金鎭圭)[1658~1716]가 글씨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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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여의 글씨,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문정공 백강 이경여(文貞公 白江 李敬輿)묘역 후면의
배위 정경부인 해평윤씨 묘역- 영의정 윤승훈(尹承勳)의 따님---무후
(이경여 부인) 정경부인 해평윤씨
청나라 심양에 있던 심양관에 인질로 가 있던 소현세자의 심양일기 1643년 3월 1일자.
좌부빈객 한형길(韓亨吉), 우부빈객 이소한(李昭漢), 사서 유경창(柳慶昌),
전 참찬 이경여(李敬輿), 전 판서 이명한(李明漢), 전 참판 허계(許啓), 질자 이일상(李一相), 진사 이만상(李萬相),
전 군수 윤창구(尹昌耉)를 차비문 안으로 불러들여 승호색 유호선(兪好善)으로 하여금
술과 안주를 하사하도록 하명하였다.(윤창구와 이만상은 이경여와 이명한 두 재신을 따라온 자제이다)
오신(五臣)이 심양에 끌려왔으나 왕의 인척이란 이유로 동양위 형제가 풀려나고
이경여, 이명한, 허계는 옥에 갇혀있다가 속환금을 바치고 돌아가라는 허락이 떨어지고
감옥에서 풀려난 뒤의 일이다.
여기서 질자 이일상과 진사 이만상은 이명한의 아들이고 이소한은 이명한의 동생이다.
이명한이 이조 판서에 임명되자 아들 이일상은 볼모로 심양에 들어와 있었고,
동생 이소한은 소현세자를 보필하는 우부빈객으로 이곳에 와 있었다.
이만상은 끌려가는 부친 이명한을 옆에서 보살펴 주기 위해 따라온 길이다.
청나라 심양에서 만난 그들 부모, 형제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는 상상 밖의 일이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해서 강화도에서 겪은 엄청난 비극이 오래전의 일도 아니었다.
죽지 않고 피해갈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사람의 운명이란게 묘해서 명한, 소한, 일상 그들의 부인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이 사연은 이명한을 이야기 할 때 좀 더 알아보자.
지금은 윤창구가 이경여를 따라왔다는데 그가 누구인가를 따라가 보았다.
윤창구와 이경여의 관계를 보니
이경여가 1599년 15살 때 결혼한 첫 부인이 해평윤씨 윤승훈(尹承勳)의 딸이었다.
조선왕조실록 1615년 9월 7일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백령첨사 윤숙(尹璛)과 봉산군수 윤공(尹珙)이
그의 일족 변제원(卞悌元)·변충원(卞忠元) 등과 함께 역모를 꾸몄습니다.
그리하여 윤숙(尹璛)으로 하여금 군사를 배 안에다 숨겨 싣고
서강(西江)에 있는 허욱(許頊)의 정자 아래로 가서 정박한 다음 대비를 빼내오고
인성군(仁城君)의 어린 아들을 안아다가 몰래 섬에 체류하면서 옹립하고자 하였는데,
그렇게 하면 황신(黃愼)·남이공(南以恭)등이 방금 해서(海西)에 귀양가 있는 중이므로
하나의 조정을 만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배경은 윤공(尹珙)의 큰아버지 윤승길(尹承吉)의 사위가
선조의 일곱째 아들인 인성군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추정되었다.
역모는 사실무근이었으나 왕이 끝까지 의심해
윤숙(尹璛)은 영흥(永興)에 유배하고 윤공(尹珙)은 통천(通川)에 유배하였다.
1617년 3월 통천에 정배(定配)한 윤공(尹珙)의 배소(配所)에 불이 났다.
윤공(尹珙)의 어미(창녕 성씨 成好問의 딸)는 상신 윤승훈의 부인인데,
윤승훈이 1611년 세상을 떠났기에 장남인 윤공(尹珙)을 따라갔다가
한밤중에 화를 당하여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이에 윤공(尹珙) 및 윤공(尹珙)의 여동생인 이경여의 아내 해평윤씨부인과,
윤공(尹珙)의 서모(庶母)가 서로 뛰어들어가 구하려다가 모두 불에 타죽었고
14살인 윤공(尹珙)의 막내딸마저 죽었다고 전한다.
윤창구(尹昌耈, 1603~1689)는 본관이 해평이고 자(字)는 수경(壽卿)이다.
부친은 윤상(尹瑺, 1579~1637. 4/24)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다.
할아버지 승서(承緖, 1544~1602)는 이경여의 장인 승훈(承勳)의 형이었다.
이경여와 해평윤씨부인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두번째 부인 풍천 임씨 별좌 경신(景莘)의 딸로 둘 사이에 4남 2녀가 있었지만
이경여가 심양으로 끌려갈 무렵에 이경여의 아들들은 모두 어렸기 때문에 윤창구가 대신 따라간 것으로 보인다.
글 출처 : 역사를찾아/볼모 2013/06/02 19:06 태허 역사를찾아 태허(spencer204)
역사를찾아/볼모 2013/06/11 17:10 태허 http//blog.ohmynews.com/historyseek/303021 & 303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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