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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李石亨이석형 樗軒 文康公 저헌 문강공 연안인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4. 16.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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樗軒 文康公 李石亨墓域 저헌 문강공 이석형묘역

 

 

樗軒 文康公 李石亨

저헌 문강공 이석형[1415~1477]

세종 대부터 성종 대까지 활동한 문신으로, 김반(金泮)의 문인이다.

뛰어난 학문으로 당대 8대 문장가로 꼽히기도 하였다.

집현전학사였으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임을 당한 사육신(死六臣)에는 포함되지 않앗으나,

사육신(死六臣)의 죽음을 슬퍼하는 시를 남기였다.

본관은 연안(延安). 字 백옥(伯玉), 號 저헌(樗軒).

曾祖父-- 사복시정 이광(李匡)

祖父---- 임천부사 이종무(李宗茂)

父-------증좌의정 이회림(李懷林)

母-------박언(朴彦)의 딸

配位-----연일정씨(延日鄭氏) 감찰(監察)정보(鄭保)의 딸로,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의 증손녀

子------- 贈吏曹判書 이혼(李渾)

이석형은 1441(세종 23)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이어 식년 문과에서도 장원으로 급제하는 등 삼장의 과거에서 거듭 장원급제를 하였다.

이에 사간원좌정언으로 특별히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집현전 부교리에 임명되어

14년 동안 집현전 학사로 재임하면서 집현전의 응교·직전(直殿직제학을 두루 역임하였다.

집현전응교로 재임한 1447(세종 29)에는 문과 중시에 합격하였으며,

왕명에 따라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로 학문에 전념하였다.

1455(단종 3)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었고,

세조가 즉위하면서 전라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1456(세조 2) 6,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육신(六臣)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익산 동헌에서 그들의 절의를 상징하는 시를 지었다.

이 일로 대간이 이석형을 치죄할 것을 상소했으나 세조는 묵살하였고, 오히려 예조참의에 봉하였다.

1457(세조 3)에 판공주목사에 임용되었고,

다음해에는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으로서 행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院事)로 잠시 한직에 머물다,

세조의 총애를 받아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다.

1460(세조 6)에 세조의 특명으로 왕의 서계(西界) 지방 순행에 맞추어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왕을 보필하였다.

이 공으로 안마(鞍馬)를 하사받고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진하였으며,

세조가 서도주인(西道主人)’이라 부르기까지 하였다.

1461(세조 7)에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경기관찰사를 역임하고,

1462(세조 8) 호조참판을 거쳐 판한성부사로 7년 동안 재임하였다.

1466(세조 12)에 팔도도체찰사(八道都體察使)를 겸하여 호패법(戶牌法)을 철저히 고핵(考覈)하고 정리하였다.

有明朝鮮佐理功臣行判中樞府使延城府院君 贈諡文康李公石亨之墓 贈政敬夫人延日鄭氏之墓

유명조선좌리공신행판중추부사연성부원군 증시문강이공석형지묘 증정경부인연일정씨지묘

1468(세조 14)에 세조가 승하하자,

고부청승습사(告訃請承襲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옮겼다.

성종이 즉위하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제수되었고,

1471(성종 2)에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었다.

1476(성종 7)에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이석형은 집현전 학사로서 학문에 뛰어났으며, 특히 치국(治國)과 역사를 정리하는데 주력하였다.

만년에는 성균관 서쪽 연못이 있는 곳에 계일정(戒溢亭)을 짓고

수신 도구로 삼아 자신을 경계하며 시문에 전념하였다.

이석형의 계일 정신은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계일정기(戒溢亭記)에 나타나 있는데,

물이 넘치는 것을 경계하듯 이름과 권력, 재물과 복을 얻는 데 항상 넘치지 않게 살라는 뜻이다.

이석형은 필법이 신묘하고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신숙주(申叔舟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유성원(柳誠源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최항(崔恒) 등과 더불어

당대 8대 문장으로 꼽혔다.

저서로는 저헌집(樗軒集)이 있고,

편저로는 홍경손(洪敬孫)과 함께 편찬한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21,

정인지와 함께 편찬한 치평요람(治平要覽), 역대병요(歷代兵要)가 있다.

세조 때에는 사서(四書)의 구결(口訣)을 정하는 데 참여하여 논어의 구결을 주관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文秀山)에 있다.

묘소 입구 오른쪽에 신도비가 있으며, 1624(인조 2)에 세운 것이다.

전액(篆額)은 행병조판서겸동지성균관사(行兵曹判書兼同知成均館事)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비문은 4대손인 행판중추부사겸예조판서(行判中樞府事兼禮曹判書)를 지낸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짓고,

글씨는 외6대손인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썼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을 ()’ 이라 하고,

온유(溫柔)하고 즐거움을 좋아함을 ()’ 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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