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시 향토유적 9호, 효자정려, 신급 정려각 5대손 신윤하 정려
소 재 지: 포천시 내촌면 음현1리 734-2
이 정문(旌門)은 이 고장 출신의 효자 신 급(1543 - 1592)선생의 효행을 기리는 뜻에서 건립되었다.
申礏신급 선생
字 중준(仲峻), 본관 평산(平山)
증조부 주부主簿 신말평申末平
조부 기묘명현(己卯名賢)형조판서 신 상申 鏛
부 별검別檢 신화국申華國
兄 충헌(忠獻)공 신잡申磼 형조판서,호조판서,병조판서 증영의정
弟 신립장군申砬將軍 임진왜란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왜군을 막다가 탄금대(彈琴臺)에서 전사
弟 신할(申硈) 경기병사 임진강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여 가문이 항왜보국(抗倭保國)의 명문이었다.
孝子 贈奉正大夫司憲府掌令申礏之閭 命旌 肅宗癸未六月五日
효자 증봉정대부사헌부장령신급지려 명정 숙종계미육월오일
申礏신급
선생은 어려서부터 풍성이 강직하고 총명이 과인하여
경서(經書)는 물론 춘추전국(春秋戰國) 역사서(歷史書)등을 넓고 깊게 읽어 그의 뜻에 달통(達通)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특히 의리를 위해서는 삶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굳은 절의(節義)와 친소(親疎)관계로
그는 평형(平衡)을 잃지 않고 고고(孤高)한 선비로서 일생동안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선생은 대과(大科)를 생각하지 않았고
그에게 내려진 선공감역의 벼슬을 사양하고 오로지 책을 읽고
다른 3형제가 모두 진충보국(盡忠報國)하는 동안 부모를 효성으로 극진히 모시고 있었다.
1583년(宣祖 16) 동서 붕당 간의 화합을 내세우며 군대양성을 주장하다 탄핵되어 조정에서 물러난
율곡(栗谷) 이 이(李珥1536-1584), 우계(牛契) 성혼(成渾1535 - 1598)등을 위해 유생(儒生)들과 함께
이이(李珥)에게 불만을 가진 동인 계열의 홍혼(洪渾)·우성전(禹性傳)·김응남(金應南)·박근원(朴謹元) 등이
이이·성혼(成渾)·박순(朴淳)의 작은 과실을 사림의 공론으로 공격하자,
신급은 유학(幼學)의 신분으로 부당함을 강력히 주장하며 그들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는 선조로부터 충성으로 나라에 보답한 선비 기상의 상징이라며 칭찬받았다.
선조는 특히 당시 여진족 이탕개(尼蕩介)의 침입을 격퇴한
친동생 신립(申砬)의 기상과 버금간다며 가문의 절의에 감탄한다는 비답(批答)을 내리고, 6품계를 하사하였다.
그 뒤 정권을 장악한 서인 정철(鄭澈)이
선공감 감역(監役)에 추천하였으나 마다하고 재야에서 처사로 생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노모를 모시고 강원도의 이천(伊川)에 피난하여
松谷山 위에서 적정을 살피고 내려와서 노모와 가족이 적에게 화를 당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듣고
멀리 떨어져 있는 맏형과 전사한 두 동생을 생각하며 절벽에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자 숙종(肅宗)은 1703(肅宗 39)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추증하였다.
선생의 충절을 임진왜란이 끝난후 가선대부 지중추부사(嘉善大夫 知中樞府事)로서
호성원종공신록(扈聖原從功臣錄)에 기록된데서도 잘 알 수 있다.
또한 선생의 5대 손인 신윤하(申胤夏)도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1865년(고종 2년)효자정문이 내려져 지금 함께 나란히 정표(旌表)되고 있다.
원래 이 정문은 현 정문의 위치에서
남쪽으로 약 300m 지점 (포천시 내촌면 음현1리 667번지)의 동산 기슭에 있었으나
6.25사변으로 1951년 봄 불타버려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워졌다.
정문(旌門)은 맞배지붕의 홀처마에 방풍판(防風板)을 달았으며 높이는 앞면이 4.25m, 옆면이 2.51m이다.
申胤夏신윤하
학자이자 효자인 신급(申礏)의 5세손이다.
신윤하(申胤夏)는 포천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글 읽기를 좋아하였고, 약관의 나이에 모든 경서를 독파하여 통달하였다.
점차 학문과 인품이 고매하기로 소문이 나자
이웃사람들이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하여 나랏일을 도울 것은 자주 권하였다.
이에 신윤하는 자신이 독신이기 때문에 부모님을 받들 사람이 없고,
지금의 국정이 소란해서 의가 땅에 떨어져
처신을 잘못하다가는 도리어 목숨을 보전 못할 것이라고 이유를 대면서 벼슬에 나가는 것을 극구 사양하였다.
차라리 집에서 부모를 잘 받드는 일이 진정한 효도하는 길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어느 해 겨울 아버지가 병을 얻어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치료하였지만 효과가 없었다.
아버지가 자리에 누운 지 오래되었는데,
한 의원이 아버지의 병에는 산 기러기의 피가 가장 좋은 약이라고 알려 주었다.
신윤하는 매일 목욕재계하고 천지신명께 기러기를 얻어 아버지의 병이 낫게 해 달라고 정성을 다하여 빌었다.
그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어느 날 우연히 기러기 한 마리가 윤하의 집에 날아들어,
그 피로 아버지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
이웃에서 모두 천지신명마저 감동시킨 하늘이 낳은 효자라고 칭찬이 그칠 줄 몰랐다.
후에 부모가 연로하여 세상을 떠나자 선산에 안장하고 시묘하며 효를 다하였다.
늙어서는 내촌면 음현리로 옮긴 후 처사로 살면서 자손들을 가르치고 기르는 데 여생을 보냈다.
[상훈과 추모]
1865년(고종 2)에 나라에서 효자 정문을 내렸다.
현재 포천시 내촌면 음현리 734-2에 신급의 효자 정문과 함께 위치하며, 향토 유적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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