贈領議政 平洲府院君 成均生員 申華國 墓域
증영의정 평주부원군 성균생원 신화국 묘역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산110
贈領議政 平洲府院君 成均生員 申華國
고조부: 신개(申槪)
증조부 : 신자준(申自準)
조부 주부主簿 : 신말평申末平
부 기묘명현(己卯名賢)형조판서 : 신 상申 鏛
별검別檢 : 신화국申華國
1자 申磼신잡 忠獻충헌공 형조판서,호조판서,병조판서 증영의정
손 신경희
증손 신숙
2자 申礏신급 선생 字 중준(仲峻)
포천 음현리 효자정려 孝子贈奉正大夫司憲府掌令申礏之閭 命旌 肅宗癸未六月五日
효자증봉정대부사헌부장령신급지려 명정 숙종계미육월오일
3자 申砬신립將軍 임진왜란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왜군을 막다가 탄금대(彈琴臺)에서 전사
손 신경진-
증손 신준(1572-1638)-정사공신(靖社功臣) 평흥군(平興君) 형조판서
고손 신여정
4자 申硈신할 경기병사 임진강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
贈領議政平洲府院君成均生員申公華國之墓 貞敬夫人坡平尹氏附葬
증영의정평주부원군성균생원신공화국지묘 정경부인파평윤씨부장
贈領議政 平洲府院君 成均生員 申華國 神道碑
신화국 묘지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신화국의 묘지석.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7호.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10)| 이미지 사이즈 960x513 | 한국학중앙연구원|
◆신화국 백자청화 묘지.
분 류-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지석
수량/면적-3매
지정(등록)일-1982.12.17
소 재 지-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824
소유자(소유단체)-평산신씨종종
관리자(관리단체)-평산신씨종중
상 세 문 의-충청북도 진천군 문화체육과 043-539-3600
-묘지(墓誌)는 죽은 사람의 이름과 태어나고 죽은 일시, 행적과 무덤 방향 등을 적어
무덤 안에 묻은 돌이나 도판에 새긴 글로 광지(壙誌)라고도 한다.
이 묘지는 신화국의 무덤 안에 들어있던 것인데,
신화국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모셨고 병조판서를 지내기도 한 신잡선생의 아버지이다.
묘지는 백자합과 같이 출토되었으며, 3개가 모두 직사각형의 사기판이다.
흰 바탕에 파란색 글씨로 신화국의 선조와 후손들의 업적을 기록해 놓았는데,
그 형태나 글씨가 잘 보존되어 있다.
출처=충청북도 민속문화재 제7호 신화국 백자청화 묘지(申華國 白磁靑畵 墓誌)|작성자 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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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領議政平川府院君輔國崇祿大夫兵曹判書 諡忠憲公 申磼 墓域
신잡(申磼)[1541~1604]
본관 평산(平山). 字 백준(伯峻), 號 독송(獨松).
高麗開國功臣 신숭겸(申崇謙) 19世孫
아버지는 신화국(申華國)이며,
4형제 중 장남.
첫째 동생은 신급이고,
둘째 동생은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결사항전하다 전사한 신립(申砬) 장군,
셋째 동생은 임진강 전투에서 추격해 오는 적을 막다 전사한 신갈(申硈).
아들은 둘이 있었는데,
둘째아들 신경지(申景址)는 작은아버지인 신립을 도와 탄금대에서 전투를 하다가 전사하였다.
신잡(申磼)[1541~1604]은 1592년(선조 25)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역임하였을 무렵
정철(鄭澈)이 명나라 사은사(謝恩使)로 가게 되자 이를 모함하는 자에 대해
왕에게 정철의 강직함을 충언하여 사은사로 보내게 하였다.
이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변사당상으로 활약하였으며, 서울에서 의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1595년(선조 28) 관내의 철산군에서 죄수들의 탈옥 사건이 일어난 일로 파직되었으나
청렴결백하고 우국충정이 강하다는 평에 힘입어 4개월 후에 호조참판으로 기용된 뒤 1596년(선조 29) 특진관이 되었다.
1604년(선조 37) 개성유수가 되었을 무렵에 관료들이 권력을 이용하여 농민들을 괴롭히자
진상을 낱낱이 폭로하고 조정에 건의하여 농민들에게서 빼앗은 농경지 등을 모두 돌려주게 하고
착취 행위를 막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공덕을 칭송하였다.
또한 송도유수로 재직 시 늙은 부모를 둔 자식들과 그 부모들을 위한 수연 잔치를 제안하여 대동수친연(大同壽親宴)을 열었다.
1568년(선조 1) 이월면 내촌리 당골 처조부(妻祖父)의 상례에 왔다가 지방의 향학이 발전되지 못한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다,
1608년(선조 41) 진천으로 낙향하여 지금의 이월면 노원리 서원마을에 서원을 건립한 뒤
이종학·김덕숭·이여·이부의 위패를 모시고 후진들에게 충효 교육을 하였다.
묘역은 서울시 동작구 상도동에 있었으나, 도시 계획에 의해 1975년 이월면 노원리 노은영당 뒷산으로 이장하였다.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충헌(忠獻)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贈領議政平川府院君輔國崇祿大夫兵曹判書諡忠憲平山申公磼之墓 配貞敬夫人南原梁氏合祔
증영의정평천부원군보국숭록대부병조판서시충헌평산신공잡지묘 배정경부인남원양씨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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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陵君 申景禧 墓域
◆申景禧 신경희 1561(명종 16) ∼ 1615(광해군 7)
제용감주부, 고산현감, 면천군수
본관은 평산(平山). 기묘명현 신상(申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별검(別檢) 신화국(申華國)이고,
아버지는 신급(申礏)이며,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의 조카이다.
1588년(선조 21) 음보(蔭補)로 임관되었다.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일어나자 그 일당인 선홍복(宣弘福)을 붙잡은 공로로 6품직에 발탁되어
1591년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가 되었다.
1593년 고산현감으로 도원수 권율(權慄)의 휘하에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같은해 행주산성의 대첩보(大捷報)를 제일 먼저 왕에게 보고하였으며, 면천군수와 중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5년 재령군수로 재직중
순변사 이일(李鎰)의 종사관(從事官) 윤섬(尹暹)을 사칭하며 도당을 모아 횡행하던 윤세침(尹世沈)을 붙잡아
중앙에 보고할 때 공명심으로 장계(狀啓)를 날조한 사실이 발각되어
삭직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 사대문 밖으로 쫓겨남)의 처벌을 받았다.
후일 1611년 (광해군 3) 수안군수에 등용되었으나,
1615년 양시우(楊時遇)·김정익(金廷益)·소문진(蘇文震) 등과 반역을 모의하여
능창군(綾昌君) 전(佺)을 추대하려 하였다는 무고로 장살(杖殺)되었다.
동생 : 신경지(申景祉)
부인 : 完山李氏
아들 : 신종건(申從謇)
아들 : 신종근(申從謹)
손자 : 신찬연(申纘延)
증손자 : 신후(申垕)
平難扈聖原從宣武功臣嘉義大夫兵曹參判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平陵君平山申公景禧之墓 配貞夫人完山李氏合祔
평난호성원종선무공신가의대부병조참판겸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평릉군평산신공경희지묘 배정부인완산이씨합부
묘역 아래쪽 1,000년 되었다는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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