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憲大父 刑曹判書 贈 崇正大夫 議政府左贊成 忠翼公 李時發 墓域
정헌대부 형조판서 증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충익공 이시발 묘역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면 오근리[현재의 청원군 오창읍 장대리]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성장하면서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89년(선조 22)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청천의 산곡(山谷)으로 피신시킨 후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박춘무(朴春茂)의 휘하에 들어가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이듬해 한양이 수복된 이후에는
환도를 주저하고 있는 행재소에 나아가 한양을 되찾았으므로 빨리 돌아와 민심을 수습하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장병과 군비를 정돈하여 왜적을 완전히 격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승정원도승지 심희수(沈喜壽)가 이시발의 시국 판단과 문장에 감탄하고 선조에게 품신하여 환도하게 하였다.
또한 병조판서로 있던 이항복(李恒福)도 이시발의 재지책략(才智策略)에 감탄하여 1593년(선조 26) 가을 왕에게 품신하여
경주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의 접반관(接伴官)으로 삼아서 병법을 배우게 하였다.
이때 낙상지도 이시발의 재능을 칭송하여 매사를 상의하였다.
그리하여 이시발은 병법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언어와 정세 및 예규(禮規)에도 정통하게 되었다.
또한 낙상지는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선조에게 이시발을 추천하여 크게 기용할 것을 주문하였다.
이후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에 임명되었고, 뒤이어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세자시강원사서를 역임하였다.
1594년(선조 27) 병조좌랑에 재직 중 강화 교섭의 임무를 맡은 명나라 유격장(遊擊將) 진운홍(陳雲鴻)을 따라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영을 방문해 정탐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듬해 병조정랑으로 승진해 순무어사(巡撫御史)를 겸하여 호서 지방을 안무하였다.
1596년(선조 29) 이몽학(李夢鶴)이 홍산(鴻山)[현재의 부여]에서 일으킨 반란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난이 평정된 뒤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승진하였는데,
그의 명성을 시기하는 무리들의 책동이 있어 벼슬을 사직하고 향리로 내려왔다.
그러나 곧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부름을 받아 종사관으로 나아갔다.
이해 겨울에는 찬획사(贊劃使)로 임명되어 충주의 덕주산성(德周山城)을 쌓고, 또 조령에 방책(防柵)을 설치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는
분조(分朝)[임진왜란 당시 세자 광해군이 있던 임시 조정 이름. 선조가 있던 의주 행재소는 원조정] 호조참의가 되어
명나라 원병의 군량미 보급을 관장하였다.
뒤이어 경상도순찰사가 되었는데 시기하는 무리가 있어 물러나 성주목사를 거쳐 경주부윤이 되었다.
경주부윤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고 생업을 안정시킨 치적이 뛰어나
1601년(선조 34)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어 4년간이나 재임하였다.
1604년(선조 37) 형조참판 내직으로 돌아왔다가
북변(北邊)의 경계가 필요한 상황을 맞아 이듬해 함경도관찰사에 추천되었다.
함경도에 나아가 진보(鎭堡)와 포루(砲樓), 성곽을 수축하고
모두 새롭게 정비한 후 그해 가을에 다시 예조와 병조의 참판 내직으로 돌아왔다.
1608년(광해군 1) 서북변(西北邊)의 여진족이 침입하자 다시 평안감사로 나아가 진무(鎭撫)하였다.
1609년(광해군 2) 명나라에서 책봉사를 파견하자
명나라와 교빙사정(交聘事情)에 밝은 이시발이 어전통사(御前通事)[어전통역관]로 불려가 다시 내직에 나갔으며,
관군국제무(管軍國諸務)를 거쳐 병조판서겸주사대장에 임명되었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역옥(逆獄)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하루 만에 석방되었으나 관직은 삭탈되었다.
1614년(광해군 6) 다시 기용되었으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했다가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자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1618년(광해군 10) 파주목사에 일시 기용되었다가 폐모론의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을 탄핵하자
또다시 벼슬을 버리고 청주 화양동으로 들어가 정자를 짓고 한거하면서 ‘후영어은’이라 자호(自號)하였다.
正憲大父 刑曹判書 贈 崇正大夫 議政府左贊成李公時發之墓 贈 貞敬夫人驪興閔氏 祔左
정헌대부 형조판서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이공시발지묘 증 정경부인여흥민씨 부좌
1619년(광해군 11) 명나라에서 파병을 요청하자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로 삼아 군사를 보냈는데,
때마침 체찰사 장만(張晩)이 안주에서 병을 얻어 누운 관계로 특명으로 오도참획사(五道參畫使)에 임명되어
장만을 보좌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평안도에 이르러 수십 개의 진영(鎭營)을 설치하고 공부(貢賦)를 비롯한 민폐를 크게 고쳤으며,
둔전(屯田)을 설치해 군량을 충족하게 하였다.
이때 외척인 옥강만호(玉江萬戶) 변일(邊溢)이 청나라 군사 100여 기를 보고는 성을 버리고 도망간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이시발이 변일을 잡아 처형하여 군기를 바로잡으려고 하였는데,
광해군이 크게 노해 그에게 책임을 묻자 신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다시 수국유사당상(修局有司堂上)으로 지의금부사겸지춘추관사에 임명되어
\북방의 외침에 대비한 연병책(練兵策)을 실시하게 하였다.
뒤이어 한성부판윤을 거쳐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체찰부사(體察副使)로 난의 수습에 공을 세웠다.
이후 청나라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그에 대비하여 강화도의 군비 시설을 강화하였으며,
다시 삼남도검찰사(三南道檢察使)가 되어 삼남 지방의 군비를 정비하였다.
뒤이어 남한산성을 수축하였는데, 그 역사(役事)를 감독하다가 1626년 향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시발은 문신이면서도 임진왜란 이후 국방·군사 분야에 상당한 업적을 쌓은 장신형(將臣形) 전략가이다.
문집으로 『벽오유고(碧梧遺稿)』가 있으며, 군사 관계 저술인 『주변록(籌邊錄)』이 있다.
이대건과 이시발 부자의 호에 똑같이 ‘오’(梧)자가 들어 있는 것은
그들이 살던 오근리(梧根里)와의 연고 때문이다.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지전마을의 경주이씨 묘역에 있다.
1610년 3월 이시발은 돌아가신 부친의 묘소를 청원군 오창면 오근리 벌영산에서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 천내로 직접 이장하고,
그해 4월에 진천 초평으로 살 집을 마련하여 가족들을 이주시켰다.
[상훈과 추모]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諡號는 충익(忠翼)이다.
1658년(효종 9) 예조참판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문을 호조참판 송준길(宋浚吉)이 행서로 쓰고,
승정원좌승지 이정영(李正英)이 두전(頭篆)한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진천 이시발 신도비는 현재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192-11번지에 있으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2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조부 예조좌랑 이원(李黿)
증조부 좌통례 이발(李渤)
조부 증 좌승지 이경윤(李憬胤)
부친 진사 오촌 이대건(梧村 李大建),
모친 증 정경부인 안동김씨, 안렴사공파 부사직 김도(金燾)의 따님
형조판서 증 좌찬성 충익공 벽오 이시발(忠翼公 碧梧 李時發,1569~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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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익공 벽오 이시발(忠翼公 碧梧 李時發) 신도비, 쌍오비각(雙梧碑閣)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2호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192-11
가선대부 예조참판 (嘉善大夫 禮曹參判) 송시열(宋時烈)이 글을 짓고,
가선대부 호조참판 (嘉善大夫 戶曹參判) 송준길(宋浚吉)이 글씨를 씀.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지제교 겸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 知製敎 兼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이정영(李正英)이 전액(篆額)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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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 崇正大夫 議政府左贊成 成均進士慶州 李大建 墓域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성균진사경주 이대건 묘역
오촌 이대건(梧村 李大建, 1550년(명종 5)~1574년(선조 7)
본관 경주(慶州)
父 증좌승지 이경윤(李憬胤)
母 원주이씨(原州李氏) 병절교위 이은(李垠)의 따님
配位 安東金氏 김사렴의 후손 김도(金燾)의 따님
子 형조판서 벽오 이시발(碧梧 李時發)
1568년(선조 1) 증광향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유중영(柳仲郢)이 한 고을의 선비들을 모아 시행한 시험에서 1등을 하였다.
그 뒤 157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숙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어 청주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贈 崇正大夫 議政府左贊成 成均進士慶州李大建墓 貞敬夫人安東金氏 祔左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성균진사경주이대건묘 정경부인안동김씨 부좌
광무8년갑진 립=1904년 갑진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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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國嘉義大夫 行 吏曹參判 李寅煥 墓域
조선국가선대부 행 이조참판 이인환 묘역
李寅煥이인환 1633년(인조 11) ~ 1699년(숙종 25)
字 문백(文伯), 號 생곡(生谷)
증조부 증 좌찬성 오촌 이대건(梧村 李大建)
조부 형조판서 벽오 이시발(李時發)
부친 지제교(知製敎)·이조판서 이경휘(李慶徽)
모친 청송심씨, 심대복(沈大復)의 따님
弟 매산(梅山) 이인혁(李寅爀),이인욱(李璘煜),이인찬(李寅燦),이인희(李寅熹),이인식(李寅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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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國嘉義大夫 行吏曹參判生谷李公寅煥之墓 贈貞夫人完山李氏 贈貞夫人淸州韓氏 祔左
조선국가의대부 행이조참판생곡이공인환지묘 증정부인완산이씨 증정부인청주한씨 부좌
이인환(李寅煥)[1633~1699]은 지금의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생곡마을에서 태어났다.
28세인 1660년(현종 1)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33세인 1665년(현종 6)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검열·대교·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 등을 거쳐 사헌부지평·홍문관부수찬을 역임하였으며,
1675년(숙종 1) 홍문관부교리로 있으면서 암행어사로 나갔다.
당시 서인(西人)의 영수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덕원(德源)으로 유배하려 하자,
그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힐책을 받고 호서염문사·천안 군수·표양부사 등의 외직으로 밀려났다.
1679년(숙종 5)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호를 ‘생곡’이라 짓고 아우 이인혁과 한가로이 지냈다.
이듬해인 1680년(숙종 6) 남인(南人)에 대한 경신출척(庚申黜陟)[경신환국]이 단행된 이후
다시 기용되어 사간원사간·대사헌집의를 지냈다.
이듬해 응교·승지, 1682년(숙종 8) 형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승정원좌부승지를 거쳐
1684년(속종 10) 사간원대사간에 특진되었다.
1685년에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신원(伸寃)을 극력 주장하여 관작이 복구되도록 하였다.
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사사된 이후 다시 청송부사로 밀려나자 얼마 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재기용되어 형조참의에 올랐다.
뒤이어 성균관대사성·경기도 관찰사·개성부유수를 지냈으며,
1697년(숙종 23) 승정원도승지를 역임하고 이조참판에 올랐다.
천성이 어질고 미더웠으며, 효우(孝友)에 돈독하고 몸가짐이 간결하고 옳았다.
또한 시비에 공정하고 당쟁에 조심하여 격심한 당파 싸움 속에서도 천수(天壽)를 누려
1699년(숙종 25)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생곡마을의 경주이씨 묘역에 있다.
묘역에는 증조부 이대건의 묘소로부터 그 아래 조부 이시발의 묘소가 있고,
그 아래 묘좌지원(卯坐之原)에 이인환의 묘소가 있다.
이시발 묘역 후면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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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익공 벽오 이시발(忠翼公 碧梧 李時發)의 계배위 정경부인 고령신씨
貞敬夫人高靈申氏之墓
정경부인고령신씨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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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嘉善大夫吏曹參判李公慶衍之墓 贈貞夫人靑松沈氏之墓
증가선대부이조참판이공경연지묘 증정부인청송심씨지묘
贈嘉善大夫吏曹參判李公慶衍之墓
증가선대부이조참판이공경연지묘
贈貞夫人靑松沈氏之墓
증정부인청송심씨지묘
진천-이거이,서원부원군이거이,문도공,청허자,청허당, (0) | 2016.06.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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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이영남장군,이사종,이극인,가리포첨사 이영남. (0) | 2016.06.09 |
수원-혜령군 이지(李祉), 예천군 이수(李洙), 축산군 이효식(李孝植) (0) | 2016.05.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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