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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송강사,송강정철 신도비,송강 재실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6. 20.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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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의 정송강사

 

 

 

신도비

 

 

 

 

 

 

 

松江 鄭澈(송강 정철 1536~1593)

조선 선조(14) 때의 명신이면서 문인으로서  연일인(延日人).

 

계함(季涵),   송강(松江).   諡號 문청(文淸)

 

 

율곡 이이와 동갑나기인 정철은

서울 장의동(藏義洞 :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에서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정유침(惟沈)과 죽산안씨의 42녀 중 막내로 출생

 

당대의 명유들이었던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면앙정 송순 등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우리나라 시가사상 고산 윤선도와 쌍벽을 이루는 가사문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52세 때 향리인 담양에서 지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조선 선조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한 것으로 유배가사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포 김만중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중국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에 비겨,

동방의 이소(離騷)라고 절찬하기도 하였다.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의 경치좋은 광주호 주변에 있는 식영정과

호남의 명산인 무등산 북서쪽의 원효계곡 자락에 있는

성산(별뫼)의 모습을 연결시켜 노래한 성산별곡은

 

정극인의 상춘곡, 면앙정 송순의 면앙정가, 정해정의 석촌별곡으로 이어지는

호남 가단의 중요한 맥을 형성하고 있다.

 

송강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관동지방의 해금강, 내금강, 외금강 등의 절승지와

관동팔경을 중심으로 한 기행가사인 관동별곡을 짓기도 했다.

또한 송강 정철은 본래 성질이 곧아서 바른 말을 잘하는 데다,

당시 조정의 당파 싸움에 연루되어 거의 평생을 귀양살이로 마쳤지만,

학문이 깊고 시를 잘 지어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즐겨 회자되고 있다.

 

오늘날 송강의 시비(詩碑)가 강원도 원주시 치악예술관 입구에 있는데,

이는 송강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도민((道民)을 교화하기 위해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짓고 관동별곡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송강의 사후

담양 창평의 송강서원(松江書院)

경남 영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別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문청문

 

 

송강기념관

 

온시숨터

 

송강사

 

 

 

 

 

송강정철선생시비

 

 

 

將進酒辭 장진주사

한 잔 먹새 그려 또 한 잔 먹새 그려.

꽃을 꺾어 술잔 헤아리며 한없이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에는 지게 위에 거적을 덮어

꽁꽁 묶여 무덤자리로 실려 가거나

곱게 꾸민 상여를 타면 숱한 사람들 울며 따라오나

억새풀, 속새풀, 떡갈나무, 버드나무가 우거진 숲.

한 번 가면 누런 해와 흰 달이 뜨고,

가랑비와 함박눈 내리며, 회오리바람이 불 때

그 누가 한 잔 마시자고 하겠는가.

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 놀러 와 휘파람을 불면

아무리 지난날을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山寺夜吟(산사야음)

松江 鄭澈(송강 정철)

蕭蕭落木聲(소소낙목성)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 소리를

錯認爲疏雨(착인위소우) 성근 빗방울 소리로 착각하고

呼僧出門看(호승출문간) 중 불러 문 밖에 나가 보라 했더니

月掛溪南樹(월괘계남수) 시냇가 나무 가지에 달만 걸렸다네

'장진주사'    원문

 

 

松江 鄭澈(송강 정철 1536~1593)

조선 선조(14) 때의 명신, 문인,  연일인(延日人).

 계함(季涵), 송강(松江). 諡號 문청(文淸)

 

•26세 명종 16년(1561년) 진사시,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급제
•32세 명종 32년(1567년) 사가독서
•40세 선조  8년(1575년) 귀향
•43세 선조 11년(1578년) 재등용
•45세 선조 13년(1580년) 강원도관찰사에 이어 전라도, 함경도 관찰사를 지냄
•48세 선조 16년(1583년 예조판서에 임명
•54세 선조 22년(1589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에 오름
•56세 선조 24년(1591년) 광해군 책봉을 건의하다가 귀양길에 오름(명천, 진주, 강계)

•57세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귀환,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

              경기체찰사를 강화도에서 수행 중 安東人 訥庵 金瓚(안동인 눌암 김찬)

             부사(副使)로 삼아 관리한 후, 충청도·전라도의 3도 체찰사를 지내고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옴
•58세 선조 26년(1593년) 사직하고 강화도에서 거하는 중에 별세

           •숙종조(1685년)에 '문청'의 시호가 내려졌다.
           •고종조(1883년 음력 3월 16일 고종은 정철의 사판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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