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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표암 강세황, 강세황 자화상, 초상,송도기행첩, 취적당 강계년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6. 2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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豹菴 姜世晃墓域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 510-10

姜世晃 강세황

1713(숙종 39)1791(정조 15). 조선 후기의 문인 서화가이자 평론가.

 

본관은 진주(晋州). 字 광지(光之), 

號  첨재(忝齋), 산향재(山響齋), 박암(樸菴), 의산자(宜山子), 견암(蠒菴), 노죽(露竹),

     표암(豹菴), 표옹(豹翁), 해산정(海山亭), 무한경루(無限景樓), 홍엽상서(紅葉尙書).

     서울에서 강현(姜鋧)36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생모는 광주이씨이다.

 

후손으로는 부인 진주유씨(晉州柳氏) 소생인 강인(姜亻寅), 강흔(姜俒), 강관(姜亻寬), 강빈(姜儐)

                      나주나씨(羅州羅氏) 소생의 강신(姜信)이 있다.

             강신과 그의 아들 강이오(姜彛五), 강흔의 손자 강진(姜晉)도 서화에 이름을 남기었다.

 

 

 

 

강세황 초상/이명기

강세황 초상, 1783년작, 비단에 채색, 145.5×94, 보물 제590,. 이 그림은 강세황의 71세상으로, 강세황이 70세를 넘겨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이명기가 그린 것이다. 공신도상 형식으로 화문석 자리 위에 관복차림으로 의자에 앉은 전신 모습을 그렸다. 그림의 오른쪽 상단에는 포암강공 칠십일세 초상화(豹菴姜公七十一歲眞)’라고 씌어 있고, 그 옆에는 정조가 내린 어제찬문이 조윤형의 글씨로 적혀 있다.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과 교육, 매형 임정(任珽)의 영향을 받았다.

처남 유경종(柳慶種), 친구 허필(許佖), 이수봉(李壽鳳)과 절친했다.

또한 이익(李瀷), 심사정(沈師正), 강희언(姜熙彦) 등 여러 사람들과 교유하였다.

그에게서 그림을 배운 제자로는 김홍도(金弘道)와 신위(申緯)가 주목된다.

 

8세에 시를 짓고 13, 14세에 쓴 글씨를 얻어다 병풍을 만든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32세 때 가난으로 안산(安山)으로 이주하여

처가인 진주유씨 집안으로부터 물질적·정신적 도움을 받으며 예술 세계를 형성하였으며

안산에 세거하고 있던 이현환(李玄煥), 이광한(李匡煥) 등 이익(李瀷)집안의 남인들과 교유하며 시와 서화에 전념하였다.

 

61세가 되던 해 영조의 배려로 처음 벼슬길에 올라

64세에는 기로과(耆老科), 66세에는 문신 정시에 수석 합격하였다.

관직은 영릉 참봉(英陵參奉), 사포 별제(司圃別提), 병조 참의,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두루 거쳤다.

 

69세에 정조(正祖)의 어진 제작 감독을 맡았다.

이 때 당시 화원 한종유(韓宗裕), 이명기(李命基)에게 초상을 그리게 하였다.

할아버지 강백년(姜柏年), 아버지 강현에 이어

71세 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감으로써 이른바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의 영예를 얻었다.

 

1785년 중국 건륭제의 나이 75

즉위 50년을 축하하는 천수연에 참석하기 위해 파견된 사행단의 부사(副使)가 되어 북경을 다녀왔다.

76세 때 금강산 유람을 하였다. 이 때마다 기행문과 실경 사생을 남겼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관직 생활과 예술 활동은 영·정조의 배려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더욱이 51세 때 영조가 신하들에게 그를 보호하여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은 하지 말라한 후,

이른 일을 계기로 강세황이 오랫동안 절필(絶筆)했던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남달리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춘 사대부 화가로서

스스로 그림 제작과 화평(畵評) 활동을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서 중추적인 구실을 하였다.

특히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발전, 풍속화·인물화의 유행, 새로운 서양 화법의 수용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1757년 당시

개성유수로 부임한 오수채(吳遂采)의 초청으로 개성을 여행하며 제작한 실경산수화이다.

이 그림의 독특한 구도, 서양식 원근법, 대담한 채색법 등은 그가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평론가로 중국과 조선의 수많은 서화가들의 작품에 대한 품평을 남겼으며, 사군자 부분에서도 선구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는 역대 서법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일생에 걸쳐 수많은 법첩과 필적을 통해 서예를 배웠다.

그의 글씨는 이왕(二王: 왕희지·왕헌지)을 근간으로 삼아

미불(米芾), 조맹부(趙孟頫)의 서법을 연마하여 해··초서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서화가 개성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은 서화의 정통성과 올바른 방법에 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 참신하고 독자적인 서화관에 의해 실천적으로 문제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추구했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습기(習氣속기(俗氣)가 없는 글씨와 문인화의 경지였다.

 

그림의 소재는 산수·화훼(花卉)를 주로 다루었다. 만년에는 묵죽(墨竹)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작품은 전 시기를 통해 진정한 문인화, 격조 높은 수묵화에 도달하기까지 발전적으로 전개되었다.

공간감의 확대, 담백한 필치, 먹빛의 변화와 맑은 채색 등으로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현존하는 작품은 상당수에 달하며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 많아 체계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그의 작품으로는

현정승집(玄亭勝集), 첨재화보(忝齋畵譜), 지상편도(池上篇圖), 방동현재산수도(倣董玄宰山水圖),

벽오청서도(碧梧淸署圖), 표현연합첩(豹玄聯合帖), 표암첩(豹菴帖),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약즙산수(藥汁山水), 삼청도(三淸圖), 풍악장유첩(楓岳壯遊帖), 피금정도(披襟亭圖),

난죽도(蘭竹圖), 묵죽팔폭병풍(墨竹八幅屛風), 사군자병풍(四君子屛風), 임왕서첩(臨王書帖),

동기창임전인명적발(董其昌臨前人名迹跋), 제의병(祭儀屛)

중국 사행시 제작한 수역은파첩(壽域恩波帖), 영대기관첩(瀛臺奇觀帖), 사로삼기첩(槎路三奇帖)다수

54세 때 쓴 자서전 정춘루첩(靜春樓帖)표옹자지(豹翁自誌)와 함께 수록된 2폭의 자화상,

70자화상을 비롯하여 7, 8여 폭의 초상화를 남겼다.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에 있고, 시호는 헌정(憲靖)이다.

 1979년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그의 문집인 표암유고를 영인출판하였다.

高祖父 : 姜雲祥강운상

曾祖父 : 姜籒강주

宗祖父 : 翠適堂 姜桂年 취적당 강계년左贊成兼 判義禁府事 都摠府都摠管

  祖父  : 姜栢年강백년 예조판서·의정부우참찬·판중추부사.청백리,문정공.

     父 : 姜鋧강현 대제학,좌참찬,문안공

 姜世晃 강세황, 한성부판윤, 화가, 憲靖公헌정공, 1713(숙종 39)1791(정조 15).

   初配位 : 진주유씨(晉州柳氏) - 유뢰(柳耒)의 딸

     長男 : 姜亻+강인

     次男 : 姜俒강완

           孫子 : 姜晉강진

     三男 : 姜亻+강관

     四男 : 姜儐강빈

           孫子 : 姜彛九강이구

  後配位 : 羅州羅氏나주나씨

     五男 : 姜信강신

           孫子 : 姜彝五강이오

 

 

豹菴 姜世晃 自畵像(표암 강세황 자화상)

  豹菴 姜世晃 自畵像(표암 강세황 자화상)

<조선 1782, 비단에 채색, 88.7×5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진주강씨 백각공파 종친회 기탁), 보물 제590-1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자화상自畵像>을 보고 있노라면 시나브로 미소가 피어오른다.

근엄한 표정의 선비를 보고 왜 웃는지 궁금하면, 또다른 그의 초상과 한번 비교해보자.

작자미상인 아래의 <강세황상>

머리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상반신에 흉배 붙인 단령團領을 입고 각대角帶를 둘렀으니,

이게 바로 예를 갖춘 조선의 관복이다.

그런데 위의 <자화상>에서는 평복 두루마기에 오사모만 덜렁 썼으니,

이건 신사복에 운동모자를 쓴 것과 정반대지만 우습기는 매한가지다.

정조(재위 1776~1800) 때 예술계를 주름잡은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 강세황,

저 유명한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라는 분이 왜 이런 장난을 치셨을까?

<자화상> 머리의 좌우 여백에 빼곡히 쓴 찬문贊文은 강세황 자신의 글씨인데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저 사람이 누구인고? 수염과 눈썹이 새햐얀데

머리에는 사모 쓰고 몸엔 평복을 걸쳤구나

오라, 마음은 시골에 가 있는데 이름이 벼슬아치 명부名簿에 걸린 게라

가슴엔 수천 권 책을 읽은 학문 품었고, 감춘 손에 태산을 뒤흔들 서예 솜씨 들었건

사람들이 어찌 알리오, 내 재미삼아 한번 그려 봤을 뿐인데

노인네 나이 일흔이요, 노인네 호는 노죽露竹인데

자기 초상 제가 그리고 그 찬문도 제 지었으니

이 해는 바로 임인년壬寅年이라."

알고 보니 글에도 장난꽃이 가득 피었다. 강세황,

이분은 형제가 36녀 중에서도 부친이 64세에 얻은 막내로서 갖은 사람을 듬뿍 받고 자란 늦둥이였다.

그래서 유달리 밝고 해학적인 성품을 지녔으니

그 제자인 김홍도 역시 농담에 능했고

시서화악詩書畵樂에 이르는 여려 교양을 섭렵한 것이 모두 스승으로부터 온 내력이었다.

 

강세황은 다른 글에서 자신을 이렇게 평했다.

"체격이 단소하고 인물도 없어서 잠깐 만나 본 이들은 그 속에 탁월한 학식과 기특한 견해가 있음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만만히 보고 업신여기는 자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싱긋이 웃어넘길 따름이었다."

 

이 글을 아울러 생각해 보면

강세황이 우스꽝스런 복장에 걸맞지 않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그저 우스개만은 아닌 성싶다.

특히 옷주름 선이 다른 초상에 비해 좀 더 굵어 굳센 느낌이 있고,

어깨 윤곽선 아래며 옷주름 근처에 진한 바림 즉 그러데이션(gradation)을 더해서 견실한 양감을 강조한 점이 그러하다.

 

얼굴 묘사는 섬세 정교하며 음영을 나타낸 입체감에 서양화법이 내비친다.

주인공은 고운 옥색 두루마기에 진홍색 세조대細條帶를 느슨하게 묶어 낙낙하게 드리웠다.

오사모의 검정색과 더불어 품위 있는 색감 연출이다.

뛰어난 자화상 솜씨에 유려한 글씨며 문장력까지 발휘한 이 작품, 가히 삼절의 저력이 드러난 걸작이라 하겠다.

 

이 자화상은 "익살로 피어난 삼절의 내면"이란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옛그림 가운데 초상화로서 국보로 지정된 것은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뿐이고,

이 강세황의 <자화상>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강세황(1713~17910)의 호는 표암豹菴, 표옹豹翁 등이다. 강세황을 두고 흔히들 예원藝苑의 총수라고 부른다.

이 말에 어울리게 그는 문인이자 화가, 평론가로 두루 활동하면서 많은 흔적을 남겼다.

어려서부터 시서화에 재능을 보였던 강세황은 노년에 한성판윤, 참판 등의 벼슬을 지내기도 했지만,

젊은 시절에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예원에 머물며 오직 학문과 서화에 매진했다.

강세황은 한국적인 남종 문인화풍을 정착시키고 동시에 진경산수화와 풍속화, 인물화를 발전시켰다.

그는 시종 문인 선비로서 탈속의 경지를 드러내는 삶과 작품을 보여 주었다.

강세황은 5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조선시대 화가로는 매우 보기드물게 자화상을 많이 남긴 것이다.

이는 화가 또는 예인으로서의 내면 탐구 욕구, 자의식이 강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가 송도松都(지금의 개성)를 여행하고 난 후 그곳의 모습을 화폭에 옮긴 <송도기행첩>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새로운 서양화법의 수용에도 기여해 18세기 조선미술에 변화와 생동감을 부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김홍도의 스승이자 후원자로서 단윈의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키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 글은 외우 오주석이 지은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2009, 월간미술)에 실린 글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작자 미상, 강세황상, 조선 18세기말, 종이에 채색, 50.9×31.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작자 미상, 강세황상, 조선 18세기말, 종이에 채색, 50.9×31.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송도기행첩 청청담(松都紀行帖 淸淸潭)

<송도기행첩>의 한 작품으로 선과 색감은 모두 맑고 명랑하며 구도(構圖)도 매우 참신한 시각을 잡고 있다.

바윗더미의 묘사에서는 대담하게 준법(浚法)에서 벗어나서 색채의 농담으로 입체감을 표현했으니

이런 파격적인 입체묘사는 당시 화단에서는 획기적인 의의를 지닌다 할 수 있다.

 

 

백석담(白石潭)

강세황의 백석담도는 강세황이 개성 지방을 여행하고 남긴

송도기행첩에 있는 그림 중의 하나로 미법(米法)을 토대로 하여 대담한 시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넓적하고 각진 계곡 바위들이 강세황에게 무척 인상적이었는지 바위를 크게 부각시켜 표현하였다.

 

뒤의 낮은 산은 붓을 뉘어 점을 찍듯 미점으로 표현하고 바위는 윤곽을 그리고 엷게 음영을 주었다.

야산과 바위가 대조를 이루는 특이한 형태에 시선이 끌리는 작품이다.

 <송도기행첩>에 실려 있는데 비 갠 뒤의 투명해진 공기를 통해서 바라다본

백석담의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화면에 옮겼음을 제발(題跋)에 의해서 확인된다.

 

 

<송도기행첩>은 강세황의 실경산수도 중에서 대표작에 속하는 화첩인데,

이 화첩 중에도 <백석담><영통동구>, <청석담>과 더불어 백미로 꼽히는 수작(秀作)이다.

강세황의 실경산수는 정선의 영향이 역력함을 부인할 수 없으나 그 나름대로 개성과 특성을 갖추고 있다.

수묵 위주로 원근에 따라 농담의 구별이 분명한 묵선,

그 위에 담록과 담청색이 가채되어 밝고 담백한 화면,

 나타내고자 하는 목표에 있어 중요부분의 과감한 선택과 생략의 겸비,

산세나 바위 처리에 있어 선염(渲染)에 의한 색의 농도차가 보여주는 입체감 등을 특징으로 열거될 수 있다.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 종이 담채 30cm x 35.8cm 서울 개인 소장

강세황의 벽오청서도는 그림 위에 '방심석전(倣沈石田)'이라고 밝혀져 있듯이

중국 남종화풍의 기본적인 화보인 개자원화전에 실린 심주의 구도를 모방하여 그린 것이다.

한 쌍의 오동나무 밑 초가에 앉아서, 마당을 쓸고 있는 시동을 바라보며 더위를 식히는 선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초가의 주위는 대나무와 파초가 어울려 있는 매우 멋스러운 곳으로,

앞은 트여 있으면서도 옆에는 형식적인 울타리가 쳐져 있다.

짜임새 있는 구성과 활달하면서도 단아한 필묵법,

그리고 먹과 조화를 이루는 담채의 적절한 사용으로 높은 격조를 이루고 있다.

화보 속의 심주를 모방한 것이지만 이를 자유롭게 해석하여 더욱더 높은 경지 위에 올려놓은 작품이다

 

영통동구(靈通洞口)

강세황의 영통동구는 강세황이

지금의 개성인 송도 지방의 여러 명승을 두루 여행하고 엮은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17면 중의 하나이다.

화첩의 발문에 가을에 여행하지 못함이 아쉽다고 밝히고 있다시피 모두 여름 풍경이다.

이 기행첩은 날카로운 대상 포착과 대담한 구도, 뛰어난 색채 감각으로 참신하고 개성 있는 필력을 보여준다.

특히 중량감 넘치는 바위의 처리는 서양의 입체 화법(立體畵法)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여 이채로운 분위기를 띤다.

 

靈通洞口亂石 壯偉大如屋子 蒼蘇覆之 乍見駭眼 俗傳龍起於湫底 未必信 然然環偉之觀 亦所稀有

그림에는

 "영통동구에 난립한 바위들이 어찌나 큰지 집채만 하며 이 바위에는 푸른 이끼들이 끼었는데 눈을 깜짝 놀라게 한다.

세속에 전하기를 못의 밑바닥에서 용이 나왔다고 하는데 믿을 만한 것은 못된다.

이 넓은 장관은 보기 드문 풍경이다"고 적혀 있는데, 이는 영통동구의 풍경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바위들은 그냥 보아서는 그 크기를 짐작하기 어려운데,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 선비나 시동의 크기와 비교해 보면 얼마나 큰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산은 윤곽을 그리고 미점으로 산골을 표시하였고,

바위는 이끼 낀 모양인 듯 녹색을 가미해 푸른 느낌을 주면서도 음영을 넣어 바위의 괴량감을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연강제색도(烟江霽色圖)

화면 전체가 우선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의 넓은 강을 중심으로 대각선으로 분리되고,

전경 왼쪽에 강안(江岸)이 있고 미법수림(米法樹林) 속에 기와집 누각이 보인다.

강 건너 오른편으로 조금 치우쳐서

여름비 그친 뒤 안개 자욱한 발묵(潑墨)으로 묘사된 산봉우리들이 연이어 솟아오르고

더 멀리 원산의 푸른 봉우리와 산등성이가 아득하게 나타난다.

강 건너 안개 짙은 숲속에 담묵으로 처리한 어촌이 흐릿하니 모습을 드러내고,

그 앞에 짙은 먹으로 다리를 하나 걸쳤는데 수면에 거꾸로 비친다.

강 이쪽에 농묵으로 큼직한 미점(米點)을 찍어 윤기나는 숲으로 가느다란 길이 나있어 누각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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豹菴先生 묘역 상단의 큰 할아버지 묘역

宗祖父 翠適堂 姜桂年 墓域 종조부 취적당 강계년 묘역左贊成兼 判義禁府事 都摠府都摠管

 

             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都摠府都摠管晉州姜公翠適堂諱桂年

             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도총부도총관진주강공취적당휘계년

                      初娶和順崔氏合墓 二娶坡平尹氏 三娶康津兪氏合墓雙墳

                      초취화순최씨합묘 이취파평윤씨 삼취강진유씨합묘쌍분

 

 

 

 

豹菴선생 묘역 옆의 납골묘원

晉州姜氏十七世孫豹菴公派文白世居家族納骨墓園

진주강씨십칠세손표암공파문백세거가족납골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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