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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송강 정철,계함,문청공,충청북도 기념물 제106호,성산별곡,관동별곡,사미인곡,기생 강아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6. 17.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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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日人 季涵 松江 文淸公 鄭澈墓域

연일인 계함 송강 문청공 정철묘역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며 시인인 송강 정철묘역. 충청북도 기념물 제106.

 

鄭澈1536~1593

본관은 연일(延日). 계함(季涵), 송강(松江). 諡號 문청(文淸)

서울 장의동(藏義洞 :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출생.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정유침(惟沈)과 죽산안씨의 42녀 중 막내로

어려서 인종의 숙의(淑儀 : 왕의 후궁에게 내린 종2품의 작호)인 누이와

계림군(桂林君)()의 부인이 된 막내누이로 인해 궁중에 출입했다.

이때에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 : 훗날 명종)과 친숙해졌다.

 

 

10세 되던 해인 1545(인종 1, 명종 즉위)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돼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定平)으로,

맏형 자()는 광양(光壤)으로 유배당했다. 곧이어 아버지만 유배가 풀렸다.

 

12세 되던 1547(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을사사화의 여파로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迎日)로 유배됐고,

맏형은 이때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 가던 중에 32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 시기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에서 생활을 했다.

1551(명종 6) 원자(元子) 탄생의 은사(恩赦)로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게 된다.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년을 보냈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양응정(梁應鼎김인후(金麟厚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웠다.

, 이이(李珥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 같은 큰 선비들과도 사귀었다.

 

 

1552(명종 7) 17세에 문화(文化)유씨(柳氏)강항(强項)의 딸과 혼인하여 42녀의 자녀를 두었다.

 

1560(명종 15) 25세 때 성산별곡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노래는 성산(星山 : 별뫼) 기슭에 김성원이 구축한

서하당(棲霞堂)과 식영정(息影亭)을 배경으로 한 사시(四時)의 경물과 서하당 주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1561(명종 16) 26세에 진사시 1등을 하고, 명종 17(1562)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성균관전적 겸 지제교를 거쳐 사헌부지평에 임명됐다.

이어 좌랑·현감·도사를 지내다가 1566(명종 21) 31세에 정랑·직강·헌납을 거쳐 지평이 됐다.

함경도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때 이이(李珥)와 함께 호당(湖堂 : 젊은 문관 가운데 뽑아 휴가를 주어 학업만을 닦게 하던 서재)에 선출됐고,

이어 수찬·좌랑·종사관·교리·전라도암행어사를 지냈다.

1570(선조 3) 35세 때 부친상을,

38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新院)에서 각각 2년여에 걸쳐 시묘살이를 했다.

40세인 1575(선조 8) 시묘살이를 끝내고 벼슬길에 나가 직제학성균관사성, 사간 등을 역임했다.

이 무렵 본격화된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벼슬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갔다.

창평에 있을 때에 선조로부터 몇 차례 벼슬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43세 때인 1578(선조 11)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으로 승진하여 조정에 나아갔다.

그 해 11월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선조 13)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관동별곡훈민가(訓民歌)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583(선조 16)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듬 해 (1584)에 대사헌이 됐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1585)에 사직,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했다.

이때 사미인곡·속미인곡등의 가사와 시조·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有名朝鮮左議政寅城府院君  諡文淸號松江鄭公澈之墓  貞敬夫人文化柳氏祔左

유명조선좌의정인성부원군  시문청호송강정공철지묘  정경부인문화유씨부좌

 

54세 때인 1589(선조 22)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崔永慶)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들을 추방했다.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59156세 때 왕세자 광해군의 책립문제인 건저문제(建儲問題)가 일어나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했다.

이에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논척(論斥)을 받고 파직됐다.

명천(明川)에 유배됐다가 다시 진주(晋州)로 옮기라는 명이 내려진 지 사흘 만에

또다시 강계(江界)로 이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592(선조 25)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의주의 행재소(行在所)에서

경기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되어 강화도에서

安東人 訥庵 金瓚(안동인 눌암 김찬)을 부사(副使)로 삼아 관리한 후,

충청도·전라도의 3도 체찰사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서인의 영수로 명종 시대부터 선조 시대까지 붕당 정치의 한가운데 있었다.

수차례의 사화와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여러 번 파직과 유배를 거듭한 끝에

만년에는 동인의 모함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강화도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다

선조 26년인 1593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작품으로는 성산별곡·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시조는 송강별집추록유사(松江別集追錄遺詞)2주문답(酒問答)3, 훈민가16,

단가잡편(短歌雜篇)32, 성은가(聖恩歌)2, 속전지연가(俗傳紙鳶歌)1,

서하당벽오가(棲霞堂碧梧歌)1, 장진주사(將進酒辭)등이 실려 있다.

상당히 중복되기는 하나 성주본(星州本)과 이선본(李選本)송강가사(松江歌辭)에도 많은 창작시조가 실려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대체적으로 임금을 사모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사상을 저변에 깔고 있다.

이 외에도 훈훈한 인정을 느끼게 하는 인간미 넘치는 작품, 강호 산수의 자연미를 노래한 작품이 있다.

그리고 선취(仙趣)적 기풍과 멋스런 호방함을 담아낸 작품 등 폭넓은 사대부의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 작품집인 송강가사가 있다.

송강집』은 1894(고종 31)에 간행한 것으로

송강가사』는 목판본으로 황주본(黃州本의성본(義城本관북본(關北本성주본(星州本관서본(關西本)이 있다 하는데

그 중 관북본(關北本)은 전하지 않고 나머지도 책의 일부만 전한다.

필사본으로는 송강별집추록유사문청공유사(文淸公遺詞)가 있다.

 

창평의 송강서원, 영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에 제향됐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송강 정철의 묘역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 신원리에 있었으나

조선 현종 6(1665) 진천으로 이장하였는데,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잡아 준 명당이라고 한다.

   

조선 문학의 대표적 형식은 시조와 가사이다.

가사는 시가 문학에서 서사 문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문학 형식으로, 운문 형식에 산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짧고 단편적인 심상을 노래하는 시조보다 길고 풍부한 주제를 다루고자 탄생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대표적인 가사 문학의 대가는 송강 정철이다.

 

정철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질곡 많은 인생사를 겪으며 수많은 시조와 가사를 남겼다.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4편의 가사와 107수의 시조를 남겼는데,

사후 편찬된 송강가사, 송강별집추록유사, 송강집등에 실려 있다.

 

정철은 탁월한 비유법과 우리말 어법 파괴와 같은 파격적인 언어 구사,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린 작품들로 우리나라 시조와 가사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4편의 가사는 우리나라 가사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김만중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두고

"우리나라의 참된 글은 이 세 편뿐이다."라고 극찬하기까지 했다.

 

 

 

묘역 후면 산신석

 

성산별곡은 송강이 25세 때 처가 당숙인 김성원이

           장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서하당의 절기별 아름다움과 풍류를 노래한 작품으로,

           조선 시대 사대부의 자연관과 풍류를 엿볼 수 있다.

관동별곡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 내금강, 외금강과 관동 팔경을 유람하고 지은 것으로,

           절경을 보고 풍류를 즐기는 한편, 관찰자로서의 자신과 풍류객 자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사미인곡은 정철이 50세 때 조정에서 물러나 불우하게 지낼 때

           선조에 대한 연군의 정을 남편을 잃은 여인의 마음에 빗대 노래한 것이며,

속편 속미인곡과 함께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린 한국 문학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松江 鄭澈(송강 정철 1536~1593)

조선 선조(14) 때의 명신, 문인, 연일인(延日人).

계함(季涵), 송강(松江). 諡號 문청(文淸)

•26세 명종 16년(1561년) 진사시,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급제
•32세 명종 32년(1567년) 사가독서
•40세 선조 8년(1575년) 귀향
•43세 선조 11년(1578년) 재등용
•45세 선조 13년(1580년) 강원도관찰사에 이어 전라도, 함경도 관찰사를 지냄
•48세 선조 16년(1583년 예조판서에 임명
•54세 선조 22년(1589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에 오름
•56세 선조 24년(1591년) 광해군 책봉을 건의하다가 귀양길에 오름(명천, 진주, 강계)
•57세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귀환,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

                   경기체찰사를 강화도에서 수행 중 安東人 訥庵 金瓚(안동인 눌암 김찬)

                   부사(副使)로 삼아 관리한 후, 충청도·전라도의 3도 체찰사를 지내고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옴
•58세 선조 26년(1593년) 사직하고 강화도에서 거하는 중에 별세

           •숙종조(1685년)에 '문청'의 시호가 내려졌다.
           •고종조(1883년 음력 3월 16일 고종은 정철의 사판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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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강 정철의 차남 정종명 묘소

 

             贈資憲大夫兵曹判書 行通政大夫江陵府使鄭公宗溟之墓 贈貞夫人南陽洪氏祔左

             증자헌대부병조판서 행통정대부강릉부사정공종명지묘 증정부인남양홍씨부좌


 

 

 

 

 

송강 정철과 기생 강아(江娥)의  러브 스토리

 

조선시대 전라도 기녀 진옥(眞玉)은 파란많은 인생을 살다간 송강정철(松江鄭澈)로 인해 이 시대에 기억되는 여인이다.

원래 이름은 진옥이었으나 정철의 호인 송강(松江)()’()를 따라 강아(江娥)라고 불렸다.

강아는 시조문학에 있어 '송강첩(松江妾)'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시조 문헌 중에 '누구의 첩'이라고 기록된 것은 오직 강아 뿐이다.

대개는 기녀가 속한 지명을 따라 '남원명기','평안기' 등 기명을 적었으나,

강아는 기녀였음에도 불구하고 '송강첩'으로 기록돼 있다.

분명 이러한 기록은 송강의 명성과 지위 때문에 획득된 것이리라 생각되는데,

이를 반추해 보아도 송강 정철과 강아의 사연이 당시 사람들 기억속에 남다른 의미로 남아 있었음이 분명한 듯 싶다.

 

전라도 관찰사로 등용된 송강(松江) 정철(鄭澈)

전라 감영에 있을 때 노기(老妓)들의 청을 들어서 당시 동기였던 강아를 처음 만나게 된다.

불과 십여 세 남짓의 어린 소녀였던 강아에게 머리를 얹어 주고 하룻밤을 같이했으나

청렴결백했던 정철은 어린 강아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고 다만 명예로운 첫 서방의 이름을 빌려주었다.

정철의 인간다움에 반한 강아는 어린 마음에도 그가 큰 사람으로 느껴졌다.

정철 또한 어리지만 영리한 강아를 마음으로 사랑하며 한가할 때면 강아를 앉혀 놓고

틈틈히 자신이 지은 사미인곡을 외어 주고 장진주 가사를 가르쳐 주며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었다.

강아는 기백이 넘치고 꼿꼿한 정철에게서 다정한 사랑을 받으며 그를 마음 깊이 사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5829월 도승지로 임명받은 정철은 열 달만에 다시 서울로 떠나게 된다.

정철이 서울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강아는

그를 붙잡을 수도 쫓아갈 수도 없는 자신의 신분과 처지에 낙담한채 체념의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러한 강아의 마음을 눈치챈 정철은 서울로 떠나면서 작별의 시를 주어 그녀의 마음을 위무한다.

 

一園春色紫薇花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펴

看佳人勝玉차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莫向長安樓上望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라.

滿街爭是戀芳華  거리에 가득한 사람이 모두 네 고움을 사랑하네.

 

그가 남기고 간 시에는 강아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당부의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

좋은 낭군을 구해서 시집을 가 잘 살고 서울 장안의 자기를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 담긴 시였던 것이다.

하지만 순진한 강아는 정철의 당부를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채 그를 향한 그리움으로 긴 세월을 보내게 된다.

 

강아와 정철의 재회는 남원에서 헤어지고 근 10년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졌다.

그것도 정철의 유배지에서.

정철은 15916월 명천의 유배를 시작으로 진부를 거쳐 평안도 강계로 유배지를 옮겨 다니게 된다.

정철과의 재회에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은 강아였다.

 

천리길을 마다않고 정철이 있는 강계로 강아가 찾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해 1592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5월에 정철은 유배지에서 선조의 부름을 받는다.

그리고 그해 9월 정철은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배를 타고 충청도로 향한다.

 

이때 강아는 정철에게 같이 가게 해줄 것을 요청하지만 거절 당한다.

왜군이 우글거리는 전쟁터로 가는 길에 아녀자를 데려갈 수는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런 사실로 보아 남원에서의 만남 이후 강아가 정철을 다시 만나 보낸 기간이 약 1년여 가까이 되지 않나 싶다.

이 재회가 이승에서 만난 강아와 정철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전라도 지역에 내려가 있던 정철은 다음해 15931월 다시 북쪽의 조정으로 돌아온다.

18일 평양성 함락작전이 펼쳐졌고, 선조는 의주를 떠나 곡산을 거쳐 정주에 이르러 있었을 때이다.

1월이면 강아는 왜장 고니시의 품안에 있을 때이다.

정철을 지아비처럼 섬기던 여인이 왜장의 품안에서 놀아나다니?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도체찰사를 맡아 남으로 내려가는 정철에게 동행을 거절당한 강아는

정철이 있는 남으로 내려가다 왜군에게 잡히는 신세가 된다.

이때 의병장 이량을 만나게 되는데 그로부터 왜군의 군사정보를 빼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이것이 강아가 당시 왜군 주력부대의 수장인 고니시에게 몸을 맡기게 된 사연이다.

논개와 비슷한 이야기구조이지만 여기서는 정철과의 애뜻한 사랑얘기가 주가 된다.

 

정철은 15935월 중국 명나라로 사은사로 갔다가 12, 돌아오자마자 그 달 18일 강화에서 죽음을 맡는다.

장사는 다음해 2월 부모의 묘가 있는 고양시 신원동 송강마을에서 지내졌다.

그때 정철의 나이 58세요 강아의 나이 28세였다.

 

그리고 어느 해부턴가 정철의 묘에는 계절에 따라 들꽃다발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곤 하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 눈에 가끔 띄는 사람은 고운 자태의 비구니였다.

그녀는 묘소를 어루만지기도 하고 정성껏 주위의 잡풀을 뽑곤 사라졌다.

 

언제부터 누구의 입에서였는지는 몰라도 비구니의 법명은 소심(素心)이요,

정철을 사모하던 강아 아씨라는 말이 전해졌다.

왜장 고니시에게 더럽혀진 몸을 정철에게 사죄하기 위해 강아가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던 것이다.

 

속세와의 인연을 뒤로하는 출가승의 신분이라지만 그래도 차마 잊지 못할 속세의 인연 하나,

강아 아씨 소심은 끝내 정철을 잊지 못하고 정철의 근처 절에 있으면서,

계절마다 묘를 돌보는 것으로 못다 이룬 사랑을 달래고 있었다.

그 뒤 강아 아씨 소심은 결국 송강마을에 돌아와 살다 이승을 하직했고, 정철의 선영에 묻히게 되었다.

 

이 얘기의 대부분은 월탄 박종화의 '자고 가는 저 구름아'라는 소설에 나오는 것들이다.

문헌의 출처는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지만

 문중에서는 오래 전부터 구전되어 오고 있으며 현재 강아 아씨의 묘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이는 사실로 보여진다.

 

()이 옥이라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일시 적실(분명)하다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볼까 하노라

 

()이 철()이라거든 석철(錫鐵)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일시 분명하다

마침 내게 골풀무 있으니 녹여볼까 하노라

 

화답을 들은 정철은 탄복했다.

강아의 시는 당대의 대문장가인 정철을 깜짝 놀라게 할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강아는 정철을 쇠로 비유하며 멋지고 견고한 남성을 만나면 자신의 골풀무로 흔들어 놓을 수 있다며 그에게 응수했다. '골풀무''불을 피우는데 바람을 불어 넣는 풀무'인데,

강아는 이를 '남자를 녹여내는 여자의 성기(性器)'로 은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만하면 글자 그대로 강아는 '명기(名妓)', 뛰어난 시인이었던 것이다.

이윽고 살송곳을 가진 멋있는 사내와 뜨거운 골풀무를 지닌 기생의 하룻밤은 뜨거운 정염으로 하얗게 무르익어 갔다.

 

이에 대한 일화는 시조집 [권화악부(權花樂府)]

'鄭松江 與眞玉相酬答'의 기록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그날 이후, 정철의 적소생활은 조금도 괴롭거나 우울하지 않았다.

마음이 울적할 때면 강아는 늘 그의 곁에서 기쁨을 주었고, 가야금을 연주해 주었다.

그러면 헝클어진 정철의 마음에 한 줄기 빛이 흘러들었다.

강아는 단순한 생활의 반려자 혹은 기녀가 아니었다.

정철에게 강아는 그 이상의 존재였으며

예술적 호흡을 가능케 만들어주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던 것이다.

 

정철은 유배지에서 부인 안씨에게 서신을 보낼때면 강아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적어 보냈다.

부인의 서신 속에도 강아에 대한 투기나 남편에 대한 불평보다는

남편의 적소 생활을 위로해 주는 강아에 대한 고마움이 적혀 있었다.

불우한 남편의 생활 속에서 남편에게 위로를 주는 여자라면 조금도

나무랄 것이 없다는 부인의 글을 받고 정철은 고마웠다.

강아 역시 부인의 너그러운 마음을 고마워하며 더욱더 알뜰히 정철을 보살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애정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정철을 서울로 부른다.

 

정철은 유배지의 생활을 청산하는 기쁨과 나라에 대한 우국 그리고 강아와의 이별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다.

강아의 심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정철을 보내면서 강아는 아쉬운 마음을 이렇게 읊었다.

 

오늘밤도 이별하는 사람 하 많겠지요.

슬프다 밝은 달빛만 물 위에 지네.

애닯다 이 밤을 그대는 어디서 자오.

나그네 창가엔 외로운 기러기 울음 뿐이네.

 

부인 안씨는 강아와 함께 서울에 올라올 것을 정철에게 권했지만

강아는 끝내 거절하고 강계에서 혼자 살며 정철과의 짧은 사랑을 되새기며 외로운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이듬해인 선조 26(1593) 1218, 정철이 강화의 우거에서 생을 마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강아는

이 세상에 정철이 없다는 가혹한 슬픔 앞에 몸부림치다가 홀연히 강계를 떠났다.

오늘날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한 송강마을에는 송강을 기리는

송강문학관과 더불어 강아의 무덤이 모셔져 있다.

무덤 앞의 묘비 전면은 '義妓江娥墓'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뒷면엔 다음 글이 새겨져 있다.

紫薇를 사랑하자 를 지어주고

 

강계로 귀양가 위리안치 중인 松江은 다시 소환되어

적진을 뚫고 남하하다가 적병에게 붙잡히자

결심하고 적장 小西行長을 유혹, 평양 탈환의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고양 신원의 松江 묘소를 찾아 강아와 정철이 남긴 일화는

 

강계 유배지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둘로 갈라졌다.

하나는 유배지에서 나눈 사랑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을

 

거점으로 강아가 의기(義妓)로 활약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임진란 이후 강아의 행적에 대한 소상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벽암 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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