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惠翁主結婚奉祝記念碑(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皇女)
덕혜옹주(德惠翁主·1912~1989)는 한 맺힌 77년의 인생을 말이나 글로 거의 남기지 못했다.
유년 시절엔 그럴 자유가 없었다.
1919년 그의 아버지 고종(高宗)이 숨을 거둔 후 일제는 덕혜옹주의 삶을 옥죄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식 교육을 받아야 했고, 열세 살 때는 강제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45년 광복이 된 후에도 덕혜옹주는 귀국하지 못했다.
조선 황실의 존재에 정치적 부담을 느낀 이승만 정부가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1962년 마침내 조국 땅을 밟았지만, 덕혜옹주는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열아홉 살 때인 1931년,
일제에 의해 대마도 백작과 정략결혼을 할 때쯤부터 앓아온 조현병(정신분열증)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덕혜옹주는 고종과 양귀인 사이에 1912년에 태어났다.
덕혜옹주는 어릴 때부터 고종의 사랑을 듬뿍 받는 귀여운 옹주였다.
그러나 1925년 4월, 일본은'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미명하에
사실상 덕혜옹주를 일본으로 끌고 간다.
그 후 1931년 5월
36대 쓰시마 마지막 번주의 아들인 소 타케유키(宗武志)에게 시집을 갔으나,
정신이 이상하다 하여 이혼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남편의 학대가 아주 심했다고도 한다.
슬하에 외동딸(마사에,正恵)를 두었으나, 그녀 역시 삶을 비관하여 투신자살, 혹은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덕혜옹주는 이로 인해 더욱 더 깊은 심신의 상처를 입었고 정신질환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그러한 덕혜옹주는 천신만고 끝에 해방이후 귀국하여 고국의 땅을 밟았다.
그러나 정신질환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갔고, 결국 1989년 창경궁낙선재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에 묻혔다.
"덕혜옹주는 천재 詩人".. 영혼의 기록 찾아 나선 일본인
덕혜옹주의 詩 13편 발견.. 前 NHK PD 다고 기치로 韓日 오가며 시 발굴
옹주는 말이 없던 사람 박물관의 초록색 당의 옷이 대신 말하려는 듯해
한국인은 잘 몰라 안타까워
日 근대 유명 작곡가가 옹주가 열살 무렵 쓴 동시 '비'·'벌'에 곡을 붙일 정도
나한테 주어진 길 윤동주의 시에 반해 일본에 알려야겠다 생각..
韓日 공동 다큐 제작도 한국이 왜 좋으냐고? 존경하는 분들이 있기에..
그러니까 나라 사랑보다 사람 사랑이 먼저
조선일보|전현석 기자|입력2016.08.13. 03:03
벌·(1922~1923년)
"노란 옷 입은
작은 벌은
엉덩이에 칼
군인 흉내내며
뽐내고 있네"
비·(1922~1923년)
"모락모락 모락모락
검은 연기가
하늘 궁전에 올라가면
하늘의 하나님 연기가 매워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어"
"시에서 영상적인 이미지가 도드라져요.
마음속에 있는 깊은 무언가를 드러내고 있어요.
시 '벌'에서 벌을 군인에 비유하고 있는데, 칼을 차고 뽐내는 군인은 조선을 힘으로 제압한 일본 군인을 나타내요.
시 '비'에선 옹주의 마음에 어두운 그림이 새겨져 있어요.
이 시에서 '하나님'은 그의 부친(고종)과 관계가 있다고 봐요.
동시라고 하지만 어린이가 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
<前 NHK PD 다고 기치로> 조선일보|전현석 기자|입력2016.08.1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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