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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남사당 바우덕이 묘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9. 6.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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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리 골짜기에 위치한 바우덕이(김암덕) 묘

서운면 성진로 1279-76

 

 

바우덕이의 묘소는 청룡사 아랫 골짜기 냇가 옆에 위치해 있다.

청룡사 아래 청룡저수지를 지나 내려오다가

첫번째 골짜기가 바라보이는 냇가 양지편 바위 위에 보이는 무덤이 바우덕이가 묻힌 곳이다.

당시에는 천민이라 상여를 쓸 수 없었고

돌림병이 된다는 폐병에 걸려서 요절한 터라 장사 지내주는 이도 없었다고 한다.


바우덕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울던 기둥서방이

바우덕이의 주검을 수습해서 물가에 묻어 달라는 바우덕이의 유언에 따라

청룡사 골짜기 중 물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골짜기 언저리에 묻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둥서방도 설움에 울고 식음을 전폐하다가 며칠 후 세상을 떴다고 한다.

바우덕이가 눈을 감은 때가 겨울이었는데

무척이나 꽁꽁 얼어붙은 추운 날씨에 땅이 파지지 않자 주검 위해 흙을 모아다 덮었다고 하였다.

이 후 100년이 넘게 흐른 후에 그 위치를 탐문하여 찾아가니

땅을 파지 않고 흙을 모아다 덮어씌운 무덤을 찾을 수 있었고 이곳을 잘 추스려서 바우덕이묘를 만들어 주었다.


안성남사당 풍물놀이 보존회에서 바우덕이 묘에 묘비를 세워 주었다.




여기 이 자리는 그 유명한 사당 바우덕이라는 여인 김암덕이 묻힌 묘가 있는 곳이다.

바우덕이는 조선말기에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불당골에서 염불, 소고춤, 줄타기 등 온갖 사당 기예를 익혀 뛰어난 기량으로 유명하였고, 세상에 나가 판놀음을 벌이니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겠다.

불당골은 조선 초기부터 사당패의 본거지로 유명하였다.

을축년(고종 2년 1865년) 흥선대원군이 팔도 장정들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중수할 적에 안성 바우덕이가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들여 판놀음을 벌이니 장정들의 위로에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위에서 옥관자를 내리었으므로 그의 영기(令旗)를 세상에서 이르기를 「옥관자 받은 이」라 하여 우러러 봤다.”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산1번지 『바우덕이 묘비 안내문』 中


< 안성시 문화관광 홈페이지에서 >

바우덕이는 안성남사당의 전설적인 인물이며,

우리나라 남사당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여성 꼭두쇠로 알려진 인물이다.

구전에 의하면 5살 때 머슴을 살던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남사당패에 맡겨져 살면서 재주를 익혀 염불, 소고춤, 줄타기 등 남사당의 모든 기예를 익혔다고 한다.

15살 때 당시 안성남사당패를 이끌던 윤치덕이 사망하자

남사당패의 관례를 깨고 바우덕이를 우두머리인 꼭두쇠로 선출되었다.

바우덕이는 여성꼭두쇠라는 특성과 탁월한 기예로 안성 남사당패를 최고의 인기패로 육성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1865(고종2)년 경복궁 중건 공사 때,

인부들을 위로하기 위해 전국의 남사당패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이때 안성에 거주하던 이승지의 후원으로 바우덕이패와 안성 돌우물패가 최고의 인기를 얻어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옥관자기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바우덕이가 살던 곳은 청룡사가 위치한 불당골인데, 이 곳은 예로부터 남사당패가 겨울을 나던 장소이다.

이 곳 남사당패는 청룡사의 신표를 받아 봄부터 가을까지 전국을 누비고, 겨울에는 이곳에 와서 월동을 했다고 한다.

바우덕이는 23세 때 폐병으로 사망했다고 하며,

마지막에 그를 돌보던 이경화가 망인의 유지에 따라 청룡골 입구 개울가 양지바른 곳에 매장했다고 한다.



바우덕이(김암덕) 연보

1848.- 안성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출생

1853.- 안성 서운면 청룡사 남사당 입단(당시 5)- 선소리, 줄타기, 풍물, 무동, 새미의 모든 남사당 공연예술학습

1863. - 안성남사당 꼭두쇠 추대 (당시 15) 남사당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여성 꼭두쇠로 활동 시작

          (당시 꼭두쇠 였던 윤치덕의 사망 후 바우덕이가 꼭두쇠로 추대됨)

1865. - 고종 2년 경복궁 중건에 안성남사당패를 이끌고 출연하여

         최고의 영예인 정3품 당상관 벼슬 상당의 옥관자를 수상하여 남사당을 전국 예술집단의 최고봉으로 끌어 올림

1865. 1870. - 안성남사당패가 바우덕이로 통칭됨 전국을 다니며 공연  활동을 펼침

         대한민국 연예문화 탄생 최초의 연예인 : 남사당 바우덕이

1870. - 폐병으로 사망 (남사당 단원의 간호를 받다가 사망함)

           남사당 단원들이 바우덕이를 청룡리 골짜기에 안치하고 장례를 지냄.

시인 김윤배는 그의 시 여사당 바우덕이에서

구한말의 실존인물이었던 재색 겸비의 여사당 바우덕이의 일생을 시로 풀어 쓰고 있다.

여기에서는 애비가 동학군에 가담했다가 효수당한 뒤 안성 난전을 떠돌던 어린 바우덕이가

서운산 청룡사 사당패에 가담한다.

사당패에서 땅에 금 긋고 줄타기부터 배운 바우덕이는 타고난 미색과 총기로 사당패의 상징적 존재가 되고

게다가 어린 눈으로 부친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그녀는

부친의 유지를 제 노래에 실어 풀어냄으로써 상민들의 한을 대변한다.

 

안성 난장 물화 많고 사람 많아

은근짜 다방모리 화랑유녀 웃음 질펀하고

거간꾼 장돌뱅이 싸움질로 날 저무는

홍청거리는 난장마당 가을걷이 끝낸 장마당

풍성한 인심 돋우어 펼치는 안성 청룡 남사당패 풍성한 놀이판……

 

뜬쇠 상쇠 바우덕이 신들린 쇠가락

상것들 얼쑤얼쑤 신명 부르고

뜬쇠 어름산이 바우덕이 시원스런 아니리 사설

상것들 응어리진 마음 풀어내리고

뜬쇠 덧뵈기쇠 바우덕이 불길 일으켜 타오르는 세상

                                                                      김윤배의 여사당 바우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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