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華府院君 沈龍墓域 청화부원군 심용묘역(안성시 당왕동 산 19 -16)
靑松沈氏三世祖贈門下侍中 靑華府院君諱龍事蹟碑
청송심씨삼세조증문하시중 청화부원군휘용사적비
靑華府院君沈公龍之墓
청화부원군심공용지묘
靑松沈氏三世祖贈門下侍中 靑華府院君諱龍墓碣
청송심씨삼세조증문하시중 청화부원군휘용묘갈
묘갈(번역문)
우리 청송 심씨는 고려 말때부터 세상에 나타나니 문림랑위위 시승을 지낸 휘 홍부 이분이 비조가 된다.
시승이 합문지후 휘 연을 낳고 지후가 공인 휘 용을 낳았는데 벼승이 전리정랑에 이르고
아조에 들어와서 문하시중 청화부원군에 추봉이 되었으며 묘는 안성군 북실왕리에 있다.
부인 김씨의 묘는 군의 서쪽인 침두리에 있어 공의 묘에서 五리쯤 떨어져 있다.
대수가 이미 멀고 묘에는 현각이 없기 때문에
공의 생졸과 행적과 부인의 계보나 관향같은 것이 모두 인몰되어 전함이 없다.
우리 종족을 회고해 보면 비조로부터
삼세인 공에게 와서 자손이 처음으로 번연하고 창대해져서 대대로 명공과 석보가 나와 나라의 주석이 됐다.
또한 두 번이나 왕비가 탄생되었으므로 억만년의 기초를 만들어 무강한 아름다움이 있게 하였다.
아 ! 깊지도 아니하고 멀지도 아니하며 두텁지도 아니하고 무성하지도 아니한
적루에서 나온 것임을 여기서 징험할 수가 있다.
공에게는 아들이 둘 있는데
맏이는 좌시중 청성백으로 시호가 정안공인 휘 덕부이며 다음은 휘 원부다.
정안공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는데 인봉은 도총제요,
의구는 판사요. 계년은 목사요, 징은 부윤이요,
온은 영의정청천부원군으로 시호가 안효다.
이분이 성녀를 낳아 소헌왕후가 됐다.
종은 청원위로 태조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정은 동지총제가 됐다.
이로부터 내외의 많은 자손을 다 기록할 수는 없으나 부윤과 안효의 두 집자손이 가장 번성하니
관찰사 선과 좌참찬 광언과 영의정 지원과 지사 지명과 청평위 익현은 부윤의 후손이요,
안효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준은 영중추요,
회는 영의정 청송 부원군으로 시호가 공숙이며 결은 영중추로 시호가 정이다.
기백 대와 참판 연은 모두 준의 후손이다.
대는 임진년 병란에 사절하였고,
공숙의 손자 사인 휘 순문은 직언을 하다가 연산주 때 화를 입었다.
아들 넷이 있는데 맏은 영의정 연원이요,
그 아들 청릉 부원군 강은 곧 우리의 인순왕후의 황고가 된다.
그 때의 공의 묘우가 천진되어 신주를 매안 후에 인순왕후께서 하교하기를
꿈에 할아버지께서 원하시기를 신주를 묻지 말라고 하였으므로 빨리 신주를 모시고
환궁하여 그 자손이 제사 지내게 하라.」하였으니
아 ! 공이 가신지 이미 백팔구십 년이 지났으나
그 정상이 유통하여 감격시킴이 이와 같으니 기이하도다.
다음은 수찬 달원이요, 다음은 동돈녕 봉원이요, 다음은 우의정 통원이다.
그 뒤에도 대사헌 의겸과 판서 충겸은 강의 아들이다.
좌의정 희수는 봉원의 손이요, 판서 액과 판서 즙은 당원의 증손이다.
임진 정묘의 병란 뒤에 자손들이 송의 묘를 잃어버렸는데
충겸의 아들 의정열이 기백으로 있을 때 찾았고,
희수의 증손 판중추 재와 즙의 손자 부제학 유와 달원의 오대손 대사헌 단과 헌납, 사홍과 강의
현손 참지 평과 액의 손자 감사 벌과 열의 손자 지평 권과 광언의 오대손 사인 해가
중외의 모든 친족을 모아 봉분을 개축하고 돈은 내어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벌에게 그 음사를 기록하도록 청하므로 사양하지 못하고 대략 대대로 전해 온 계파를 뒤에 기록하였다.
12대손 통정대부 황해도 관찰사 벌이 삼가 지음
벽암 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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