晩沙公 領議政沈之源 父親 沈偰墓域 / 만사공 영의정심지원 부친 심설묘역
沈偰1510~1570
祖父 沈錦 심금 사헌부감찰
父親 沈宗忱 심종침 숙천부사
沈偰심설(1510~1570)
長男 沈之源 심지원
次男 沈之泓 심지홍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行四山監役沈公偰之墓 贈貞敬夫人全州李氏之墓
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 행사산감역심공설지묘 증정경부인전주이씨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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晩沙公 領議政沈之源 祖父 沈宗忱墓域 / 만사공 영의정심지원 조부 심종침묘역
沈宗忱심종침 1553(명종 8)∼1614(광해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字는 사성(士誠).
덕부(德符)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참찬 광언(光彦)이고,
아버지는 감찰 금(錦)이며,
어머니는 민희열(閔希說)의 딸이다.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한 뒤에 음서로 사섬시참봉(司贍寺參奉)이 되었다.
이어 명나라 장군을 위한 접대도감낭청이 되었으며,
능력이 차츰 인정되어 6품직인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에 승진하였다.
이어 외직으로 나아가 은진현감을 거쳐 안음현감으로 옮겼다가
병으로 돌아와 익위사사어(翊衛司司禦)에 서용된 뒤 익위(翊衛)로 승진하였다.
계속하여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을 역임한 뒤 임천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시 여산군수에 제수되었다가 돌아와 궁궐도감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선공감첨정이 되고,
숙천부사에 승진하였다.
1614년(광해군 6) 외직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황주에서 지병으로 서거하였다.
贈嘉善大夫吏曹參判 行通政大夫肅川都護府使 沈公宗忱之墓 贈貞夫人丹陽禹氏之墓
증가선대부이조참판 행통정대부숙천도호부사 심공종침지묘 증정부인단양우씨지묘
심종침[沈宗忱] 묘갈명(墓碣銘) 김상헌(金尙憲)
자산 군수(慈山郡守) 심공 종침(沈公宗忱)의 묘갈명 병서
소사도(少司徒) 심군 지원(沈君之源)이 그의 왕부모(王父母)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
묘갈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기에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는데,
한 해에 두 차례 서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전에 이미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행여 돌아가신 분에게 이미 승낙한 것을 저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끝내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종침(宗忱)이고, 자는 사성(士誠)이며,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후손이다.
할아버지 휘 광언(光彦)은 좌참찬을 지냈다. 아버지 휘 금(錦)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어머니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판관(判官) 민희열(閔希說)의 따님이다.
청성(靑城)의 심씨는 세상의 갑족(甲族)이 되었는데, 전중공(殿中公)이 부마(駙馬)의 가문에 장가들었다.
공의 선부인(先夫人)이 나 상헌의 선군자(先君子)와 더불어 모두 선릉(宣陵),
즉 성종(成宗)의 외예(外裔)로서 족보가 옥첩(玉牒)에 연결되어 재종(再從) 간이 되었는데,
돈독하고 화목한 기풍이 대를 이어 변치 않았다.
공은 나를 대우함이 특별히 후하여 속마음을 열어 보였으며, 나이가 적고 많은 것으로써 차이를 두지 않았다.
공의 형제는 모두 일곱 분이었는데, 공은 둘째이다.
맏이인 판결사공(判決事公)은 교유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인물의 장부(臧否)를 잘 알았다.
동생인 이천군(利川君)은 풍류 있고 호탕하여 대장부의 기풍이 있었고,
죽서군(竹西君)은 시(詩)의 재주와 관원의 재간이 있어 당시에 뛰어남을 드러냈다.
그러나 겸손함과 신중함을 스스로 기르면서 화려함을 거두어 실제적인 데로 나아가 울연히 완전하고
두터운 장자(長者)로 칭해지는 데에 이르러서는 모두 공이 최고라고 추대하였다.
공은 처음에 과거 공부에 종사하여 여러 차례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에 음보(蔭補)로 사섬시 참봉(司贍寺參奉)이 되었다가 일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다시 능력이 있다고 천거되어 천장접대도감 낭청(天將接待都監郞廳)이 되었다.
오랫동안 수고하여 6품으로 승진해 장례원 사평(掌隸院司評)에 제수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은진 현감(恩津縣監)이 되었다.
그때 마침 황지(潢池)의 경보가 있어 무리(武吏)로 바꿈에 따라 교체되었다.
안음 현감(安陰縣監)에 제수되었으나 곧바로 병으로 인해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다시 서용되어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가 되었다가 익위(翊衛)로 승진하였다.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역임하고서 외직으로 나가 임천 군수(林川郡守)가 되었으나,
전임 군수가 잉임(仍任)됨에 따라 부임하지 않았다.
여산 군수(礪山郡守)에 제수되었다가 파직되어 돌아와 궁궐도감(宮闕都監)에서 벼슬하여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에 제수되었다가 숙천 부사(肅川府使)로 승진하였으나,
언관(言官)이 너무 빨리 승진한다는 이유로 가로막았다.
자산 군수(慈山郡守)에 제수되었으며, 전임인 도감(都監)에서의 공로로 인해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하였다.
얼마 뒤에 파직되어 돌아오다가 황주(黃州)에 이르렀을 때 마침 죽서군(竹西君)이 바야흐로 통판(通判)으로 있다가
공이 무더운 철에 길을 가는 것을 민망스럽게 여겨 만류하면서 가을이 되면 가라고 하였는데,
얼마 뒤에 병이 나서 여사(旅舍)에서 졸하였으니,
실로 만력(萬曆) 갑인년(1614, 광해군6) 7월 17일의 일이었다.
태어난 때인 가정(嘉靖) 계축년(1553, 명종8)부터 따져 보면 향년이 62세였다.
그해 12월 아무 날에 파주(坡州) 분수원(分水院) 북쪽 곤향(坤向)의 산등성이에 장사 지냈다.
공은 어려서 일찍 부모를 잃었으며, 또 계모의 상을 당하였는데, 여묘살이를 하면서 예법을 다하였다.
어려서 계부(季父)의 손에 길러졌는데, 계부가 죽음에 미쳐서는 슬퍼하기를 친상을 당한 것처럼 하였다.
동기간에는 우애로움이 늙어서까지 쇠하지 않았다.
종족들을 무휼함에 있어서는 비록 천한 사람들까지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더욱더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부인 단양 우씨(丹陽禹氏)는 고려 때 시중(侍中)을 지낸 우현보(禹玄寶)의 후손이다.
부녀자의 덕이 있다는 명성이 있었으며,
공보다 4년 먼저 태어나서 공보다 10년 늦게 죽어 공의 묘소 왼쪽에 부장(祔葬)되었다.
공은 모두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설(偰)은 사산 감역(四山監役)이고,
차남 석()은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이다.
설은 종실(宗室) 청원도정(靑原都正) 이간(李侃)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지원(之源)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조 참의로 있는데,
바로 명을 지어주기를 요청해 온 자로, 빼어나고 전아하며 평안하고 화목하여 동료들의 추중을 받고 있다.
전취인 권씨(權氏)는 자녀를 낳았으나 모두 요절하였으므로 동종(同宗)의 아들 권(權)을 후사로 삼았다.
재취인 윤씨(尹氏)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평(枰)과 담(柟)이고, 딸은 어리다.
차남 지홍(之泓)은 3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장녀는 생원 윤충득(尹忠得)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참봉 강흡(姜恰)에게 시집가서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강호(姜鄗)ㆍ강후(姜郈)ㆍ강소(姜邵)이고, 딸은 어리다. 삼녀는 원호(元祜)에게 시집갔다.
석은 군수 유순(柳楯)의 딸에게 장가들어 6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지헌(之瀗)이고, 차남은 지순(之淳)이고, 삼남은 지탁(之濯)이고, 사남은 지옥(之沃)이고,
오남은 지관(之灌)이고, 육남은 지정(之渟)이다.
지탁은 1남을 두었는데, 이름이 집(楫)이다. 지옥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름이 격(格)이다.
지관은 2남 1녀를 두었고, 지정은 1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딸은 이집(李潗)에게 시집가서 3남을 두었는데, 이재길(李材吉)ㆍ이주길(李柱吉)ㆍ이제길(李梯吉)이다.
내외의 손자는 40여 명이다.
판결사공(判決事公)의 이름은 종도(宗道)이고,
이천군(利川君)의 이름은 종민(宗敏)이며,
죽서(竹西)는 종직(宗直)의 호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름다운 명덕 있는 집안이었고 / 名德之家
착하고도 법도 있는 가풍이었네 / 循良之風
우뚝하고 또 우뚝한 겉모습이고 / 嶷嶷其表
진실하고 또 진실한 마음이었네 / 恂恂其中
이천석의 직질까지 올라갔으니 / 秩二千石
통달하지 아니했다 할 수 있겠나 / 可不謂通
예순 살이 넘는 수를 누렸거니와 / 壽六十强
장수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나 / 可不謂長
자손들은 많고 많아 번성했거니 / 子姓振振
모두들 다 어질고도 또 착하다네 / 有賢有良
길한 자리 묘 터 잡아 장사했거니 / 宮于吉壤
후손들의 복 받음이 끝이 없으리 / 後福無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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