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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나주정씨 월헌공파 정수강(丁壽崗)羅州丁氏 月軒公派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12. 15.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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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羅州丁氏月軒公派齊室                         羅州丁氏世葬阡碑

                 나주정씨월헌공파제실                         나주정씨세장천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제일리 산37-1

 

 

나주정씨의 유래

나주정씨는 본관이 같고 성이 다른 두 계파의 나주정씨가 있다.

羅州丁氏와  羅州鄭氏이다.

 

 

羅州丁氏始祖는 고려시대 검교대장군을 지낸 정윤종(丁允宗)이다.

羅州丁氏의 씨족보를 보면 검교대장군 정윤종(丁允宗)의 상계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시조 정윤종(丁允宗)은 고려 중엽에 검교대장군을 지냈으며 6세까지의 후손들이 압해(押海, 현재 전남 신안지역)에서 살았다.

압해는 고려 때 전남 나주의 속현이었다. 후손들이 대부분 본관을 羅州로 바꾸면서 羅州丁氏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도 일부 후손들 가운데는 압해(海)를 본관으로 쓰고 있다.

오늘날 압해는 전라남도 무안군에 속해 있는 면 단위의 섬이다.

압해를 중심으로 세거해 오다가 7세 정원보(丁元甫) 세대 부터 개성에 세거하기 시작했다.

또 정원보의 손자인 정안경(丁安景)의 대에서는 황해도 백천 지방에 세거하기 시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평양과 원주, 충북 음성, 경기 고양·광주, 전북 전주, 경남 창녕, 경북 안동 등으로 옮겨서 살아왔다.

 

羅州丁氏는 조선조에 이르러 크게 번창했다.

정수강(丁壽崗)이 병조참판, 그의 아들 정옥형(丁玉亨)과 정응두(丁應斗) 부자는 좌찬성을 지냈다.

또한 정응두의 네 아들(정윤조, 정윤희, 정윤우, 정윤복)은 모두 지방 관찰사, 대사헌 등을 지내며 명문가문으로 성장했다.

또 숙종 때 우담집(愚潭集)’을 낸 성리학자 정시한(丁時翰)과

영조 때 형조판서를 역임한 정범조(丁範祖)도 나주정씨이다.

나주정씨 문중에서 가장 큰 인물로는 조선 실학의 거두인 다산(茶山)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서 17년간 유배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500권이 넘는 저술을 남겼다.

그중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여유당전서등이 유명하다.

이렇게 나주정씨는 조선왕조에서 49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며 명문가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전대리 가마실 마을 일대는

400여 년 동안 후손들이 살고 있는 나주정씨 동원공파(東園公派)의 집성촌이다.

 

恭安丁玉亨공안공정옥형, 忠靖公 丁應斗충정공정응두 神道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1

 

 

 

 

 

 

飮水思源음수사원---물을 마실때 근원을 생각한다.

 

 

崇祖耀宗숭조요종---조상의 높고 빛남을 근본으로 삼자.

 

 

 

 

天一閣

천일각

 

 

 

 

 

 

 

 

 

 

 

 

 

 

 

 

 

 

 

 

 

追遠齋추원재

 

 

 

 

 

홍살문을 지나 묘역으로

 

구 석물들을 모아 놓았는데 석물등의 상태는 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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