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정씨 중시조 월헌공 정수강(中始祖 月軒公 丁壽崗),1454(단종 2)∼1527(중종 22)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제일리 산37-7
羅州丁氏 始祖 丁允宗 祭壇
나주정씨 시조 정윤종 제단
始祖高麗檢校大將軍 丁公允宗之祭壇
시조고려검교대장군 정공윤종지제단
羅州丁氏 中始祖 月軒公 丁壽崗墓所
나주정씨 중시조 월헌공 정수강묘소
나주정씨 중시조 월헌공 정수강(羅州丁氏 中始祖 月軒公 丁壽崗)
1454(단종 2)∼1527(중종 22). 조선 전·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字는 불붕(不崩), 號는 월헌(月軒).
1474년(성종 5) 진사시에 합격하고, 1477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전교서(典校署)에 소속되었다.
이 후 정언·병조좌랑·병조정랑을 역임하였으며,
1482년에는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1499년(연산군 5) 장령에 임용되어 성준(成俊)의 불법을 탄핵하기도 하였으나,
논사(論事)를 피하기 위하여 휴가를 얻어 충청도에 갔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503년 직제학으로 영등포에 파견되어 지방관의 불법행위를 조사한 공으로 부제학이 되었다.
이듬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재등용되어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며,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로 외보되었다.
이 후 판결사·대사간을 거쳐 1512년 병조참지에 이르렀다.
1516년 사유가당인(師儒可當人)으로 선발되었다.
1518년 대사성·대사헌을 거쳐 병조참판·동지중추부사·전의제조(典醫提調)·빙고제조(氷庫提調)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月軒集월헌집』이 있다.
5권 3책. 목판본. 저자의 시문을 중심으로 권수에 그의 아버지 자급(子伋)의 시와
부록에 형 수곤(壽崑)의 유고(遺稿), 손자 응두(應斗)의 유고를 전후에 합철한 것으로 일종의 세고(世稿) 형식을 갖추었다.
본래는 정수강의 아들 옥형(玉亨)이 1542년(중종 37)에 편집, 간행한 것이며, 옥형의 발문은 이 때 붙인 것이다.
그 뒤 수곤의 후손 시윤(時潤)이 1702년(숙종 28)에 중간하면서 응두의 시문과 권유(權愈)의 서문을 붙였다.
저자의 10대손 범조(範祖)가 1773년(영조 49) 호당사가(湖堂賜暇) 중 승선(承宣)으로 발탁되었을 때
이 책이 영조의 예람(叡覽)에 등철(登徹)되었다.
영조는 이 본판이 순천에 있다는 말을 듣고 호남도(湖南道)에 명하여 다시 개간하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3간본이다.
어제어필(御製御筆)·전교(傳敎)·중간시말(重刊始末)과 정범조·정재원의 발문은 이 때 부각(附刻)한 것이다.
규장각 도서에 있다.
『월헌집』의 시는 근체(近體)가 많으며, 증답시(贈答詩)와 기유시(紀遊詩)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그의 시적 취향을 나타내는 점으로 볼 수 있다.
그 중 「화도연명지주(和陶淵明止酒)」는 도잠(陶潛)의 해학과 자기 관조의 경지를 방불하게 한다.
전의 「포절군전(抱節君傳)」은
허구적인 작품으로 청절(淸節)을 지키는 기개를 소재로 전고(典故)를 많이 인용하여 교훈을 목적으로 쓴 소설이다.
부록에 실린 수곤의 시는 초연히 속태를 벗어난 풍모를 엿볼 수 있다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 行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成均館事 羅州丁公壽崗
配贈貞敬夫人江陵金氏 之墓
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 행가선대부병조참판겸동지성균관사 나주정공수강
배증정경부인강릉김씨 지묘
나주정씨 중시조 월헌공 정수강(羅州丁氏 中始祖 月軒公 丁壽崗) 묘소 측경
羅州丁氏 中始祖 月軒公 丁壽崗 墓所 후경
月軒公 丁壽崗 長男 丁玉卿, 次男 丁玉亨, 三男 丁玉精 墓所
월헌공 정수강 장남 정옥경, 차남 정옥형, 삼남 정옥정 묘소
月軒公 丁壽崗 長男 丁玉卿 墓所
월헌공 정수강 장남 정옥경 묘소
정옥경(丁玉卿) 도사(都事)(1483성종14∼1563명종18) 壽 81세.
字 獻之헌지. 중종 11년(1516) 생원시급제 義禁府都事 文化縣令(문화현령)
贈通政大夫通禮院左通禮行通訓大夫文化縣令 羅州丁公玉卿 配贈淑夫人咸陽朴氏 之墓
증통정대부통예원좌통예행통훈대부문화현령 나주정공옥경 배증숙부인함양박씨 지묘
月軒公 丁壽崗 次男 恭安公 丁玉亨 墓所
월헌공 정수강 차남 공안공 정옥형 묘소
恭安公丁玉亨墓所 공안공정옥형묘소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제일리 산37-7
1486(성종 17)∼1549(명종 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字는 가중(嘉仲),
號 월봉(月峰), 諡號 공안(恭安). 보익공신(保翼功臣)금천군(錦川君)
병조참판 연(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자급(子伋)이고,
아버지는 수강(壽岡)이다.
어머니는 江陵人 지평(持平) 김언신(金彦辛)의 딸이다.
1513년(중종 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검열이 되었다.
그 뒤 승정원주서를 거쳐 1511년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경연검토관으로서 활약하였다.
이후 이조좌랑을 지내고, 1518년 사헌부의 지평·장령을 역임한 뒤 1521년 의정부사인이 되었다.
이듬해에 홍문관 교리·응교를 지내고, 사간원사간·사헌부집의를 지냈으며,
1525년 홍문관전한·직제학을 거쳐 부제학에 올랐다.
그 뒤 좌부승지·병조참지·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533년 도승지가 되었다.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친 뒤 대사간·대사헌에 이르러 국가 기강을 확립하는 데에 힘썼다.
당시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오로지하자, 그에 의부(依附)하기를 꺼려하여 외직으로 나가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임기가 끝나자 다시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536년 병조참판으로서 태자진하사(太子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의 북경에 다녀왔다.
이듬해 예조참판·이조참판을 역임하고 다시 외직으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다시 병조참판을 지내고 1539년 공조판서에 올라 형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을 다시 역임하였다.
이어 우참찬·예조판서·좌참찬을 거쳐 지돈녕부사가 되었다가 1544년 병조판서가 되어 국방 문제를 총괄하였다.
이듬해 명종 즉위와 더불어 형조판서가 되어 소윤에 가담,
대윤을 제거하는 데 협력하여 보익공신(保翼功臣) 3등에 책록되고 금천군(錦川君)에 봉해졌다.
형조판서로서 전장(典章)에 밝아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좌찬성에 올랐다가 죽었다.
기국 도량(器局度量)이 있고, 직무에 과단성을 보였으며,
언행에 책임을 졌고, 권세가들의 간섭에도 굴하지 않고 직무에 충실하였다.
諡號는 공안(恭安)이다.
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 行正憲大夫兵曹判書兼知春秋館事同知經筵事
증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세자이사 행정헌대부병조판서겸지춘추관사동지경연사
錦川君諡恭安公丁玉亨 配贈貞敬夫人常州金氏 之墓
금천군시공안공정옥형 배증정경부인상주김씨 지묘
月軒公 丁壽崗 三男 丁玉精 墓所
월헌공 정수강 삼남 정옥정 묘소
정옥정(丁玉精) (1494성종25~1544중종)
字 琢中탁중, 월헌공(月軒公) 三男,
1522(中宗壬午) 소과생원(小科生員),
종묘서부봉사(宗廟署副奉事), 금성현령(金城顯令), 內贍寺僉正(내섬시첨정)
通訓大夫行金城縣令兼內贍寺僉正 羅州丁公玉精 配令人原州元氏 之墓
통훈대부행금성현령겸내섬시첨정 나주정공옥정 배영인원주원씨 지묘
월헌공 정수강가계도
曾祖父 丁安景 정안경
祖父 丁衍 정연
父 丁子伋 昭格署令 정자급 소격서령 증 가선대부 예조참판 동지의금부사
母 黃處盛황처성의 딸
丁壽崗 月軒公 정수강 월헌공
配位 江陵金氏 持平金彦辛 지평 김언신의 딸
長男 丁玉卿정옥경⇒정응허⇒정윤지⇒정호서(생부 정윤복)
⇒정응진丁應軫 성균관대사성
정윤구丁胤球 시종원선전관, 자 경구庚球, 호 송강松崗
정호현丁好賢 선공감역
정언원丁彦元
정시달丁時達 통덕랑집의
정시인丁時仁 가선대부
정시홍丁時弘 절충장군 행용양위호군
정시현丁時弦
次男 丁玉亨정옥형⇒정응두⇒정윤조⇒정호인,정호의,정호례,정호지
⇒정윤희⇒정호덕,정호경,정호성
⇒정윤우⇒정호겸⇒정호양⇒정호근
⇒정윤복⇒정호약,정호공,정호관,정호선,정호서(계 정윤지),정호제
三男 丁玉精정옥정
벽암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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