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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사간공이효독,쌍매당이원간,이향성,이조민,이정민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12. 25.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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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仁李氏司諫公派墓園

용인이씨사간공파묘원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산 79번지



                                龍仁李氏司諫公派墓

                                용인이씨사간공파묘




 司諫院司諫  李孝篤이효독 묘소


李孝篤이효독 (1451~  ?  ) 

본관은 용인(龍仁). 순경(卿),  묘비에는 순향()으로 되어있는 것 같다 .

刑部典書 李士潁이사영의 현손이며이백찬(李伯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상호군 이승충(李升忠)이고,

아버지는 임피현령 이봉손(李奉孫)이며, 어머니는 홍이용(洪利用)의 딸이다.

1474(성종 5) 사마시에 합격하고,

148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를 지내고, 예문관검열·승정원주서를 거쳐,

세자시강원사서·병조좌랑·사헌부지평·호조정랑·병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보성군수·봉상시첨정·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 등을 지내고,

1500(연산군 6) 사간원사간·군자감정에 이르렀다.

일찍이 할머니가 종환(腫患)으로 고생할 때 먼저 지렁이즙을 마셔 복용하게 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고,

동생은 吏曹正郞 李孝彦이효언으로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다.


       通政大夫軍資監正龍仁李公諱孝篤之墓  配淑夫人海州崔氏祔左

       통정대부군자감정용인이공휘효독지묘  배숙부인해주최씨부좌






이효독 묘역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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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梅堂 李元幹 쌍매당 이원간, 鴻山縣監 景休公 李享成 홍산현감 경휴공 이향성묘소



雙梅堂 李元幹 쌍매당 이원간묘소


李元幹이원간 雙梅堂쌍매당

성종 4(1473)~중종 21(1526) 조선 문신.

자는 쌍매당(雙梅堂), 본관은 용인효독(李孝篤)의 아들.

연산군 원년(149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연산군 10(1504)에는 문과에 장원,

옥당(玉堂)을 거쳐 호남어사(湖南御史), 목천현감(木川縣監), 진주목사(晋州牧使), 전랑(詮郞), 대관을 역임하였고

통훈대부(通訓大夫),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군기시정(軍器寺正)겸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등을 역임하였다.


         通政大夫軍器寺正兼司憲府執義李公之墓 淑人慶州金氏之墓

         통정대부군기시정겸사헌부집의이공지묘 숙인경주김씨지묘



        嘉善大夫淸州牧使龍仁李公諱元幹之墓 配淑夫人慶州金氏祔左

        가선대부청주목사용인이공휘원간지묘 배숙부인경주김씨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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鴻山縣監 景休公 李享成 홍산현감 경휴공 이향성묘소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 行鴻山縣監龍仁李公諱享成之墓 配贈淑夫人全州李氏祔左

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 행홍산현감용인이공휘향성지묘 배증숙부인전주이씨부좌


이향성[李享成]의 묘표

통훈대부(通訓大夫) 홍산 현감(鴻山縣監) 이공(李公)의 묘표 --이항복(李恒福)

내가 젊어서 필운산(弼雲山) 아래서 노닐다가,

아름다운 나무 수십 그루가 담장 주위에 빙 둘러 있고 그 숲 사이에 가려진 집이 있는 것을 보고,

그 안에는 반드시 기이한 사람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비스듬히 담장을 따라 들어가 곧장 소나무 밑에 이르니,

이윽고 두 갈래로 머리를 땋은 한 소녀(少女)가 자리를 펴 놓고 말 하거늘

주인(主人)이 기다리고 계시니, 청컨대 손님을 즐겁게 해 드리겠습니다.”하므로 가 보니,

희어졌다가 다시 누래진 머리에 학처럼 청수하고 소나무처럼 곧은 이가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맞이했는데,

화려한 자리가 죽 펼쳐지고 진귀한 음식이 가득 차려진 가운데 노래를 부르는 사람, 피리를 부는 사람,

거문고를 타는 사람이 뒤섞이어 둘러앉아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하여 이것을 이상히 여긴 나머지 물러나와서 그 마을의 장로(長老)에게 물으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 경휴(景休)를 보았는가?

이 사람은 본디 북리(北里)에서 재물로 남을 돕고

빈객을 사랑하며 남을 위해 승낙을 하고 신의를 지키는 일을 숭상하는 사람이다.

젊어서 일찍이 벼슬을 구하여 사산 감역(四山監役)을 거쳐서 사평(司評)에 뽑혀 제수되었다가,

홍산 현감으로 나갔었다. 그랬다가 만년에는 이 산 밑에 집을 짓고 은거를 모색하여,

용과 뱀이 뒤섞이듯 저자 사이에 뒤섞여 지내면서 인간의 일을 잊고 세상으로부터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 또한 그에게 숨은 덕이 있는 줄을 모르는데,

오직 같은 마을의 사암(思菴) 박순(朴淳), 송강(松江) 정철(鄭澈), 우계(牛溪) 성혼(成渾)만이 그의 내력을 안다.”

고 하였다. 그로부터 수일 뒤에 홍산이 나를 찾아와서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고는

마침내 나이를 잊고 어른인 체하는 것을 배제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31년째가 되는 을묘년에 공의 아들 정민(貞敏)이 본래 나와 좋게 지낸 관계로

자기 아들 치상(致祥)을 시켜 월사(月沙)가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명()을 청하였다.

그 행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모()인데, 용인(龍仁)의 삼한벽상대광공신(三韓壁上大匡功臣) 길권(吉卷)의 후예로서

임피 현령(臨陂縣令) 봉손(奉孫)의 증손이요 사간(司諫) 효독(孝篤)의 손자이며

상호군(上護軍) 홍간(弘幹)의 아들이다.

호군이 제용감 정(濟用監正) 이규(李逵)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갑신년에 공을 낳았다.

공이 홍산 현감으로 재직한 5년 동안에는 열심히 농상(農桑)을 권면하고 인재를 권장하여 천거하였다.

모친의 병이 위독했을 적에는 손가락을 베어서 피를 먹여 드렸고,

조상을 받드는 예에 있어서는 슬퍼함과 공경심이 모두 지극하였으며,

규문(閨門)의 안은 손님을 대하듯이 서로 엄격하였다.

가난한 자를 구휼하고 급한 이를 도와주는 데 있어서는 힘써 자기의 마음을 다하였고,

자신이 비록 부귀하게 살았으나 호사한 풍습을 통렬히 제거하였다.

임진년의 난리를 만나서 홍양(洪陽)의 우사(寓舍)에서 병으로 작고하였는데, 향년이 69세였다.

그해 겨울에 객지인 오서산(烏棲山)에 임시로 매장해 두었다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신축년에 용인의 광교산(光嶠山)에 반장(返葬)하였다.

이씨(李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이씨는 종실 고양부정(高陽副正) ()의 손녀로서 효도와 공경으로 가문을 보지(保持)하였다.

공보다 6년 뒤인 정유년에 피난지의 용천(龍川)에서 작고하니,

향년이 공보다 6년이 더 많았다. 이해 겨울에 공의 묘소에 부장(祔葬)하였다.

47녀를 두었다.

일남  조민(肇敏)은 절충 부호군(折衝副護軍)이고,

이남  근민(謹敏)은 판관(判官)이고,

삼남  정민(貞敏)은 감찰(監察)이고,

사남  정민(靖敏)은 사인(士人)이다.

일녀는  정() 허경필(許鯁弼)에게 시집갔고,

이녀는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황진(黃璡)에게 시집갔으며,

삼녀는  판관(判官) 송계선(宋繼先)에게 시집갔고,

사녀는  수군 절도사(水軍節度使) 신충일(申忠一)에게 시집갔으며,

오녀는  형산정(衡山正) 이량(李樑)에게 시집갔고,

육녀는  수군 절도사 박안도(朴安道)에게 시집갔으며,

칠녀는  현령 남이성(南以聖)에게 시집갔다.

일남  조민은 12녀를 두었는데 1남은 치중(致中)이다.

이남  근민은 4남을 두었다.

삼남   정민(貞敏)32녀를 두었는데, 3남은 치경(致敬)치상(致祥)치원(致遠)이다.

사남  정민(靖敏)1녀를 두었다. 내외 제손(內外諸孫)40여 인이다.

다음과 같이 銘한다.

뭇사람들은 열심히 재능을 팔건만 / 衆逐逐爲衒

공은 홀로 숨는 걸 지키었네 / 獨守潛也

남이 몰라주는 게 무슨 해될 것 있으랴 / 人不知何害

본디 스스로 빛을 감춘 거로다 / 固自熸也

내가 나의 문을 닫고서 /吾閉吾門

스스로 엄체되길 좋아하였네 / 樂吾淹也

내가 명 써서 후인에게 보이노니 / 我銘以示後

파리처럼 탐하는 자의 경계가 되리라 / 蠅然者之鍼也

 

故通訓大夫鴻山縣監李公墓表

余少遊弼雲山下見有嘉樹數十繚以周垣掩映於林間者度其內必有異也欹側循墻以入直至松下

俄有叉鬟一少女展席曰主人須矣請以娛賓及至有皤皤黃耈鶴癯松貞者莞爾而迎綺席列陳華膳交錯

歌者吹者彈者雜襲圍坐余怳然異之退而徵於其里之長老其人曰見吾景休耶

是固北里之踈財愛客尙然諾者也少嘗求進由四山監役選除司評出爲鴻山縣監晩築室于此山之下而索潛焉

龍蛇於闤闠之間而忘乎人間不求於世世亦不知有隱德惟同里朴思菴淳鄭松江澈成牛溪渾知之云

居數日鴻山爲來訪余語移日遂與忘年屛所挾爲後三十有一年乙卯胤子貞敏素善余使其子致祥

持月沙之狀來乞銘狀曰公諱某龍仁三韓壁上大匡功臣吉卷之後臨陂縣令奉孫之曾孫司諫孝篤之孫

上護軍弘幹之子也護軍娶濟用正李逵女以嘉靖甲申生公在鴻五年勤勸農桑奬進人材阿氏病劇

割指以進奉先之禮哀敬俱至閨門之內斬斬如賓卹貧賙急務得吾情身居綺紈痛刮豪習遭壬辰之亂

病卒于洪陽寓舍壽幾從欲而劣一歲矣其年冬旅厝于烏棲山越十年辛丑返葬于龍仁光嶠山娶李氏

宗室高陽副正億孫女也孝敬持家後公六年丁亥卒于避地之龍川得年比公加六矣是年冬祔葬于公

四男七女長曰肇敏折衝副護軍次謹敏判官次貞敏監察次靖敏士人女長正許鯁弼

次判敦寧府事黃璡次判官宋繼先次水軍節度使申忠一次衡山正樑次水軍節度使朴安道次縣令南以聖

肇敏一男二女曰致中謹敏四男貞敏三男二女男曰致敬致祥致遠靖敏一女內外諸孫四十餘人

銘曰

衆逐逐爲衒獨守潛也人不知何害固自熸也吾閉吾門樂吾淹也我銘以示後蠅然者之鍼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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僉知中樞府事 李肇敏첨지중추부사 이조민, 唐津縣監 李貞敏 墓所 당진현감 이정민 묘소


僉知中樞府事 李肇敏墓所 첨지중추부사 이조민묘소


     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龍仁李公諱肇敏之墓 配淑夫人原州元氏祔左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용인이공휘조민지묘 배숙부인원주원씨부좌


이조민(李肇敏)1541(중종 36)~ ? ).

는 육물(六勿). 본관은 용인(龍仁).

初配 원주원씨 무과(武科) 첨지(僉知) 원계성(元繼誠)의 딸

繼配 파평윤씨 윤원형(尹元衡)의 서녀이다.

1584년 우송(友松) 신규(申揆), 동은(峒隱) 이의건(李義健), 불여당(不如堂) 신암(申黯), 영사(永思) 정인(鄭寅),

사미당(四味堂) 김극효(金克孝), 취옹(醉翁) 정응탁(鄭應鐸), 동고(東皐) 이원(李瑗),

신곡(新谷) 유탁(兪濯)과 더불어 아홉명이 구로회(九老會)를 조직하였다.

윤원형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며 善山人 성암공 金孝元(김효원)과 함께 기숙하였다.

그 사실을 李肇敏이조민과 친구로 지내던 仁順王后의 동생 심의겸(沈義謙)이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후에 명종 말기에 윤원형이 몰락한 후,

김효원이 이조낭관(吏曹郞官)에 천거되었을 때 심의겸이 척신(戚臣)의 문객이라는 이유로 배척하고,

이듬해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낭관에 천거되었을 때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척신이라는 이유로 배척을 받아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갈리게 되었다.

이는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어 동인(東人)이라 하였고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어서 서인(西人)이라 불리우게 되면서 조선 중기 붕당정치의 시초가 되였다.

이후 윤원형이 몰락한 후, 이조민 역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독서를 하며 여생을 보냈다.

저서로 괘일록(掛一錄)이 있다.



唐津縣監 李貞敏 墓所 당진현감 이정민 묘소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 行唐津縣監龍仁李公諱貞敏之墓

        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 행당진현감용인이공휘정민지묘

              配贈淑夫人靑松沈氏  配贈淑夫人慶州安氏祔左

              배증숙부인청송심씨  배증숙부인경주안씨부좌






사간공 이효독 가계도

八代祖 李惟精이유정 內侍郎中내시낭중

七代祖 李奭이석 閤門祗候합문지후

六代祖 李光時이광시 板圖判書판도판서, 配位행주기씨(幸州奇氏) 소윤(少尹) 기정서(奇廷瑞)의 딸,

五代祖 李中仁 駒城府院君 이중인구성부원군, 配位천안전씨(天安全氏) 대제학 전신(全信)의 딸

高祖父 李士潁이사영 刑部典書 弟 李士渭이사위 戶曹判書, 弟 李士彛이사이.

曾祖父 李伯撰이백찬 中直大夫知永川郡事중직대부지영천군사

   祖父 李升忠이승충 資憲大夫 工曹參判

     父 李奉孫이봉손 通政大夫臨陂縣令임피현령, 南陽洪氏 左議政 洪利用의 딸

          李孝篤이효독 字 舜鄕순향 通政大夫軍資監正 司諫院司諫, 李孝彦이효언 吏曹正郞

      子 李元幹이원간 字 幹之간지, 號 雙梅堂쌍매당, 配位 禦侮將軍 崔命根의 딸,

            弟 李亨幹이형간, 弟 李弘幹이홍간 折衝上護軍 司憲府掌令

       孫 李享成이향성 字 景休경휴 號 魡翁조옹 生父 李弘幹이홍간 次子 司憲府掌令

    曾孫 李肇敏이조민, 李謹敏이근민, 李貞敏이정민, 李靖敏이정민

   玄孫 李致中이치중 曾孫 李貞敏이정민 字 子正 子 李致敬이치경

   玄孫 李致祥이치상(1589~1637) 字 士和사화 號 漁隱어은

五代孫 李時爀이시혁生員

        弟 李以爀이이혁贈嘉善禮曹參判

        子 李震英이진영贈嘉善戶曹參判, 李世英이세영贈嘉善吏曹參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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