彦陽金氏 淸溪公 金應會 之閭閣
언양김씨 청계공 김응회 지려각
전남 담양군 담양읍 학동리 345-9
청계 김응회(淸溪 金應會,1555,명종10∼1597,선조30)
본관 彦陽(언양). 字 時極시극, 雅號아호 청계(淸溪)
담양부(潭陽府)에서 태어나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수은(睡隱) 강항(姜沆),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과 교유하였다.
1585년(선조 18) 을유식년 사마시(乙酉式年 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귀후서별좌(歸厚署別座)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부인은 광산김씨(光山金氏)로,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그의 처남이 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장(倡義將)으로 추대되었으나, 처남인 김덕령 부대에 합류하여 공을 세웠다.
이후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처남 김덕령이 반역죄로 연루되었을 때 김응회도 함께 붙잡혔다.
그는 혹독한 고문을 겪으면서도 처남 김덕령의 충성스러움을 주장하며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옥에서 나온 후 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파산(坡山)에서 석고대죄하고 있던 성혼(成渾)에게 글을 올려 문안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담양의 추월산(秋月山)에서 왜적을 막다가 순국하였다.
이때 어머니와 김덕령의 부인 흥양이씨(興陽李氏)도 함께 순절하였다.
광해군 때 그의 충효를 가상히 여겨 정려문(旌閭門)을 세웠으며,
수북면(水北面) 구산사에 배향하였다.
孝子通訓大夫別座彦陽金應會之閭
효자통훈대부별좌언양김응회지려
청계공정려비(淸溪公旌閭碑)
私淑齋 睡隱 姜沆 撰 左贊成 姜希孟 五代孫
사숙재 수은 강항 찬(1567-1618) 좌찬성 강희맹 오대손
청계공(淸溪公) 휘(諱) 응회(應會) 귀후서별좌(歸后署別座)
불취(不就) 공(公)의 자(字)는 시극(時極)이요.
호(號)는 청계(淸溪)로 어렸을 때 부친을 잃고 죽을 마시며 시묘하면서 부인과 대면하지 않았다.
공의 어머니이신 성부인(成夫人)의 병환(病患)이 위독(危篤)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죽에 타서 드리니 차도가 있었다.
공은 성현(聖賢)의 글에 마음을 기울여 학습(學習)에 게으름이 없었다.
어떤 이가 조정(朝廷)에 천거(薦擧)하려 했는데 공이 그 말을 듣고서 힘써 만류하니 그만 두었다.
을유(乙酉)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
귀후서 별좌(歸厚署別座)에 임명(任命)되었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았다.
임진(壬辰)년에 외적(外敵)이 쳐들어오자 여러 고을에서 소문만 듣고 와해되니
공이 담양(潭陽) 어매곡(御梅谷)에 있었는데 개연히 분기하여 말하기를
"나라 종사(宗社)가 폐허(廢墟)되고 군부(軍部)가 파천(播遷)하니
신자(臣子)된 도리로 신명(身命)을 받쳐야 할 것이다.”하고
처남(妻男) 김덕령(金德齡)에게 의거(義擧)하기를 힘써 권했다.
김덕령은 곧 충성(忠誠)스럽고 용맹(勇猛)한 장군(將軍)이었다.
드디어 같이 의병(義兵)을 일으키니 군사(軍士)의 함성(喊聲)이 천지(天地)를 진동하였다.
경상도까지 진군(進軍)하여 왜적(倭敵)을 막는데 조정이 마침 강화(强化)하여
해산을 권유하니 아직 잔류(殘留)가 있어 더 싸울 것을 청하나 불허(不許)하였다.
이윽고 김덕령 장군이 역적(逆賊)으로 누명을 쓰고 국문(鞠問)을 당하여
화(禍)가 공에게도 미쳐 덕령의 반역한 사실을 공에게 물으니
공은 덕령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절대로 딴마음이 없음을 극언(極言)하였다.
고문을 받아도 언어와 기개가 태연자약(泰然自若)하니 위관(委官) 김응남(金應南)이 공에게 묻기를
“너는 어찌 고통스러운 면이 없느냐?” 하자 공이 말하기를
“궁궐과는 지척이니 어찌 미천한 신하(臣下)의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게끔 할 수 있으랴” 하였다.
곤장(棍杖)이 끝나면 무릎을 모으고 단정히 꿇어앉으며
서명(署名)을 삼가고 조용히 추주(趨走)하니
옥(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장하게 여기었다.
그런 후 “위관(委官)이 상계(上啓)하기를
형벌(刑罰)에 임해도 난언(亂言)이 없으니 충직(忠直)합니다. ”라고 하며,
임금께 진언(進言)하니 임금께서 특별히 사면(赦免)하였다.
출옥(出獄)하니 친구들이 찾아와 위문하자 웃어 말하기를 고문 받을 때 고통은 몰랐고
다만 서까래 같은 곤장(棍杖)이 와서 내 다리를 치는데
그 소리가 쿵하고 거문고의 굵은 줄 소리와 같았다 하니, 만좌(滿座)가 크게 웃었다.
전라감사 홍세공(洪世恭)이 정송강(鄭松江,송강 정철)과
친함을 미워하며 작은일을 가지고 중상모략하여
담양 옥에다 가뒀다가 다시 의금부(義禁府)로 압송하여
국문을 받게 하고 국문이 끝나자 도로 담양 옥(獄)에 가두었다.
그때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 남원(南原)이 함락(陷落)되자 출옥(出獄)할 수 있었다.
난리 중에도 어머니 성부인(成夫人)을 모시고 가는 도중 적과 대응하다 함께 운명하니
때는 정유(丁酉)년 9월 16일이었다.
그 뒤에 동부동매산(同雰梅山) 건좌손향(乾坐巽向)(지금 어매곡 진등)에 장사하였다.
계축(癸丑)년에 명하여
담양읍 학동 마을 입구에 효자정문을 세우고 어진 선비들이 구산(龜山)에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하였다.
공의 성품은 충순(忠純)하고
기상은 괴위(魁偉)하며 선(善)을 즐기고 의리(義理)를 좋아하는 인품으로
충(忠)과 효(孝)를 겸비한 선비정신이 오늘날 우리 후손들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한국 의병인물사(義兵人物史)에 조선중기의 의병활동(義兵活動) 기록을 보면,
“청계공(淸溪公) 김응회(金應會)는 본관이 언양(彦陽)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 김덕령(金德齡) 장군(將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각처에서 왜군(倭軍)과 격전을 전개, 전공을 세웠다.
김덕령이 모함을 받았을 때에는 그를 극력 변호했다.
그 후 왜군과 분전 끝에 전사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바와 같이
의병활동은 충절(忠節)이요, 나라에서 벼슬을 내려도 홀로계신 어머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사양(辭讓)했던 점과 의병(義兵) 활동중(活動中)에도 어머님을 모시고 다니다가
적(敵)을 만나 적이 모친(母親)을 해하려 하자
공이 몸으로 감싸고 함께 운명(運命)하였다. 라고 하는 기록을 보아,
후자는 효도(孝道)에 죽으니 장하고 훌륭하지 아니한가! 하여,
공의 5대손 언휴(彦休)가 언양김씨충렬록(彦陽金氏忠烈錄)이라 명명하고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이 서문을 쓰고,
수은(睡隱) 강항(姜沆)이 공의 정문기(旌門記)를 짓고.
언휴(彦休)의 손자(孫子) 노윤(魯潤)이 제서(諸書)를 손수 써서
청풍(淸風) 김종후(金鍾厚)에게 보여 공의 행장(行狀)을 짓게 되었다.
담양군청의 후원을 받아
당시 전사(戰死)했던 담양 추월산 입구에 순절비(殉節碑) 세워져 있다.
淸溪彦陽金公應會遺蹟碑
청계언양김공응회유적비
청계 김응회(淸溪 金應會,1555(명종 10)∼1597(선조 30) 가계
配位 光山金氏,
처남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부친 광양훈도 장사랑 김성벽(金成璧)
조부 경기정 참봉 기몽무(金松茂)
증조부 사헌부장령 김삼준(金三俊)
고려 대장군 위열공 김취려(威烈公 金就礪)의 12대손
벽암두릉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