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담양-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묘소, 송태宋泰, 면앙정송순연보

구름에 달

by 碧巖 2017. 1. 16. 21:07

본문

728x90

 

 

俛仰亭 宋純 면앙정 송순 묘소

전남 담양군 봉산면 기곡리 산 200-16

네비하차: 담양군 봉산면 기곡리 217-1

 

 

 

 

묘역 전경

 

 

 

俛仰亭 宋純 면앙정 송순의 부친 贈  吏曹判書 宋泰 증 이조판서 송태 묘소

 

인터넷상에는 면앙정 송순의 오대조 노송당 송희경의 묘소라는 내용도 있으나 부친인 송태의 묘소인것 같다.

자세히 아시는 분은 꼬리말 감사합니다.

또한 제일 하단의 묘소는 어느분의 묘소인지요?

 

       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宋公之墓  贈貞夫人淳昌趙氏地墓

       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송공지묘  증정부인순창조씨지묘

 

 

 

 

                        判書 李滉 書 공조판서 이황 서

 

 

 

 

 

 

 

 

 

 

 

 

 

 

俛仰亭 宋純 면앙정 송순 묘소

 

 

俛仰亭 宋純 면앙정 송순 묘소

1493(성종 24)1582(선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신평(新平:지금의 충청남도 당진).

는 수초(遂初) 또는 성지(誠之),

는 기촌(企村) 또는 면앙정(俛仰亭). 담양 출신. 증 이조판서 송태(宋泰)의 아들이다.

 

1519(중종 14)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1520(중종 15)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마친 뒤,

1524(중종 19)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고 1527(중종 22)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533(중종 28)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잡자, 귀향하여 면앙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송순은 1537(중종 32)김안로가 사사된 뒤 5일 만에 홍문관부응교에 제수되고, 다시 사헌부집의에 올랐다.

이어 홍문관부제학, 충청도어사 등을 지냈고,

1539(중종 34)승정원우부승지에 올라 4월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오자 선위사가 되어 서행(西行)하였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사간원대사간 등의 요직을 거쳐

50세 되던 해인 1542(중종 37)윤원형과 황헌(黃憲) 등에 의하여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47(명종 2)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중종실록을 찬수하였다.

그해 5월에 주문사로 북경에 다녀와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1550(명종 5)대사헌·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진복창(陳福昌)과 이기(李芑) 등에 의하여 사론(邪論: 도리에 어긋난 논설)을 편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서천으로 귀양 갔다. 이듬해에 풀려나 1552(명종 7)선산 도호부사가 되고, 이 해에 면앙정을 증축하였다.

 

이 때 기대승이 면앙정기를 쓰고 임제(林悌)가 부()를 쓰고,

김인후(金麟厚임억령(林億齡박순(朴淳고경명(高敬命) 등이 시를 지었다.

이후 전주부윤과 나주목사를 거쳐 1562(명종 17) 70세의 나이로

기로소(耆老所 : 조선시대에, 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과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에 들고,

1568(선조 1)한성부좌윤이 되어, 명종실록을 찬수하였다.

이듬해 한성판윤으로 특별 승진하고 이어 의정부우참찬이 된 뒤, 벼슬을 사양하여 관직생활 50년 만에 은퇴하였다.

송순은 성격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특히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일찍이 박상(朴祥)과 송세림(宋世琳)을 사사하였고,

교우로는 신광한(申光漢성수침(成守琛나세찬(羅世纘이황(李滉박우(朴祐정만종(鄭萬鍾

송세형(宋世珩홍섬(洪暹임억령 등이 있다.

문하 인사로는 김인후·임형수(林亨秀노진·박순·기대승·고경명·정철(鄭澈임제 등이 있다.

 

면앙정은 그가 41세 되던 해인 1533(중종 28) 담양의 제월봉 아래에 세운 정자로서

호남 제일의 가단(歌壇)을 형성하였다.

이곳을  임제·김인후·고경명·임억령·박순·이황·소세양(蘇世讓윤두수(尹斗壽양산보·노진 등

많은 인사들이 출입하며 시 짓기를 즐겼다.

면앙정가단은 그 후에 나타난 호남의 성산가단(星山歌壇),

영남의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노가재가단(老稼齋歌壇) 등의 선구이며,

영남의 가단이 전문 가객 중심이라면 면앙정가단은 사대부 출신의 문인 가객이 중심이었다.

 

특히 송순은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생활을 하면서 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작품을 지음으로써

강호가도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으며,

면앙정삼언가·면앙정제영(俛仰亭題詠)

수많은 한시(505, 1)국문시가인 면앙정가9,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

오륜가등 단가(시조) 20여 수를 지어 조선 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문집으로는 면앙집(俛仰集)이 있다. 담양 구산사(龜山祠)에 신주가 모셔졌다.

 

분재기(分財記)는 자손에게 물려줄 재산을 기록한 문서다

호남 가사문학의 원류인 면앙정 송순의 분재기에서도 남녀 차별이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송순은 140여명에 달하는 노비 이름까지 모두 기록해

62녀의 자녀중 장녀에게는 밭 120마지기와 서당과 노비를 주고

차녀와 첩의 아들 3명에게도 재산을 나눠줬다는 기록이 있다.

 

 

 

 

 

 

 

 

 

     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  知春秋館事宋公之墓  貞夫人淳昌 氏之墓

     자헌대부의정부우참찬겸  지춘추관사송공지묘  정부인순창 씨지묘

 

 

(俛仰亭 宋純의 배위는 순창 ?씨 인지 꼬리말 감사합니다)

 

 

 

 

 

 

 

俛仰宋純年譜면앙송순연보

1493(성종24)           11월 전라도 潭陽府 錡谷面 豆毛谷(담양부 기곡면 두모곡)에서 태어나다

1513(중종 8) 21. 8월 진사시에 합격 朴萬鍾과 함께 潭陽府使 朴祥(1474~1530)과 그의 동생 朴祐에게 수학하다.

1516(중종11) 24. 성균관에 들어가다.

1518(중종13) 26. 綾城縣令(능성현령)으로 부임한 宋世琳에게 수학하다.

1519(중종14) 27. 別試文科 乙科及第, 承文院 權知正字가 되다.

1520(중종15) 28. 藝文館에 들다. 가을 귀향 무등산 유람.   겨울 藝文檢閱을 거쳐 弘文館 정자 제수

1522(중종17) 30. 1承政院 주서. 중국사신 唐皐(당고),史道에게 주는 增別試 製進참여.   , 파직 귀향

                          全羅監司 申鋿(신상)에 의해 儒生試官差任(유생시관차임)되어 靈光 佛岬寺를 가다.

                                    7鄭萬鍾, 尹洵龍泉寺 유람

             自警자경 스스로를 경계함 --- 파직되어 귀향시 읊은시

            悔生事去後 회생사거후 일이 지나간 뒤에 후회하게 되니

            百廬無能爲 백려무능위 백번 생각하여도 능한 것이 없네

            心豈悔之府 심기회지부 마음이 어찌 후회의 창고이리오

            事前當三思 사전당삼사 일을 하기 전에 마땅히 세 번 생각 해야지.

.

1523(중종18) 31. 예문관 봉교가 되다. 부친상을 당하다.

1524(중종19) 32. 곽씨에게서 면앙정 터를 매입하다

1525(중종20) 33. 10월 담제를 마치고 林鵬과 함께 羅州 會津江(회진강)을 노닐다.

                            世子侍講院(세자시강원) 說書(설서)가 되다.

1526(중종21) 34. 홍문관 수찬이 되다.

1527(중종22) 35. 여름 파직되어 귀향, 가을 사간원 정언, 文臣延試 次等

1528(중종23) 35. 여름 홍문관 교리

1529(중종24) 37. 10월 귀향

1530(중종25) 38. 灼鼠只燮(작서지섭)獄事(옥사)에서朴氏母子를 변호하는()를 올리다.

1531(중종26) 39. 사간으로서 朴氏獄事를 저지하려 노력하다.

1533(중종28) 41. 金安老가 권세를 잡자 귀향하여 俛仰亭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내다.

                          이때에 창평 소쇄원을 들러 題外弟梁處士彦鎭瀟灑亭(제외제양처사언진소쇄정)을 짓고,

                          월산 지정에 들어 題月山李允恭池亭(제월산이윤공지정)이란 시를 지었다.

1537(중종32) 45. 겨울 金安老가 축출되어 죽자 홍문관 부응교가 되다.

1538(중종33) 46. 사헌부 집의를 거치고 홍문관 직제학을 거치어 충청도 어사가 되다.

1539(중종34) 47. , 승정원 우부승지, 이어서 도승지가 되다.

                       桃源詩(도원시) 製進(제진)하여 居首(거수)하다4宣慰使(선위사)遼東都司(요동도사) 접빈하다.

1540(중종35) 48. 慶尙道 觀察使

1541(중종36) 49.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이 되다.

                           戚臣(척신)과 결탁한 黃憲(황헌)을 논박하였으나 용납되지 않다.

1542(중종36) 50. 尹元衡,黃憲 등에 의해 被黜(피출)되어 전라도 관찰사가 되다.

                          瀟灑園(소쇄원)을 짓는 일을 보조하다. (능성 동헌을 들러 시를 차운하다.0

                 次綾城東軒韻 차능성동헌운 능성 동헌의 시를 차운하다

                 重來何物不爲新 중래하물불위신  다시 오니 어느 물건인들 새롭지 않으리오

                 舊事今經二十春 구사금경이십춘  옛일이 어제인 듯 벌써 20년이 지났으니

                 玉節休看垂老使 옥절휴간수노사  옥절 지닌 늙은 사신이라 보지 마소

                 布衣曾是少年人 포의증시소년인  포의로 이곳에서 공부하던 소년이었다네

1543(중종38) 51. 병환으로 귀향한 후 漢城府 右尹(한성부 우윤)이 되다.

1544(중종39) 52. 가을 申會(신회) 金若晦(김양회)와 함께 능성 운주사를 유람하다.   12월 모친상을 당하다.

1547(명종 2) 55. 동지중추부사로 중종실록찬수참여, 장예원 판결사.   5秦聞使로 중국을 가다.

1548(명종 3) 56. 2월 개성부유수 花潭을 유람하다.

1549(명종 4) 57. 朴淵을 유람하다.  서편에 埸巖亭(역암정)을 짓다.

1550(명종 5) 58. 4월 대사헌이 되다. 이조참판이 되다. 蕩春臺(탕춘대)를 유람하다.

              陳復昌,李芑(진복창,이기)등에게 논박당하여 忠淸道 瑞川으로 유배되어, 곧이어 平安道 順川으로 유배되다.

1551(명종 6) 59. 6월 사면받아 水原府量移(양이)되어, 겨울 방환되다.

1552(명종 7) 60. 담양부사 吳謙(오겸)의 도움으로 俛仰亭(면앙정)을 중건하다.

                          이 무렵 김인후가 면앙정 30을 지은 것으로 추측함

1553(명종 8) 61. 善山都護府使가 되다. 선정으로 表裏(표리)를 하사받다.

                          黃(황구노)梅鶴亭(매학정)유람,  9宋希奎洛江유람.   12월 부인상을 당하다.

1554(명종 9) 62. 知禮縣縣監 盧愼(노신,1518~1578)을 방문하다.

                            黃允獻(황윤헌)無盡亭(무진정) 유람. 서편 迎鳳里에 우거하다.  7詩稿(시고)를 기록하다.

1555(명종10) 63. 府人들이 頌德碑(송덕비)를 세우다.

1556(명종11) 64. 高祖父 宋喜慶이 쓴 老松公日本行錄을 구하여 를 짓다.

                            행록이 분실되어 양산보가 남원선비 오상의 집에서 찿아왔다.

1558(명종13) 66. 전주부윤, 이 무렵 기대승이 면앙정기를 짓다.

1560(명종15) 68. 병환으로 체직되어 귀향하다12월 중국사신 접빈문사로 李愰, 林億齡과 함께 추천되다.

1561(명종16) 69. 1월 상경하였으나 중국사신이 오지 않아 羅州牧使에 제수되다.

1562(명종17) 70. 耆老所에 들어가다.

1568(선조 1) 76. 漢城府左尹이 되다. ‘명종실록찬수참여, 刑曹判書가 되다.

1569(선조 2) 77. 한성부판윤이 되다. 의정부 우참찬이 되다.   노환으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승락받지 못하다.

                          宣祖備忘記(비망기)를 내려 食物을 공급케 하다.

1579(선조12) 87. 10回榜宴(회방연)俛仰亭에서 베풀다.

                          정철,고경명,임제,전라감사송인수, 지역 수령등 일백여명 참석하다.

                     (이날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경하의 연회를 베풀기를 新恩의 날과 같이하니 온 도에서 높이 받들었고

                     밤이 깊은 뒤에 취하여 따뜻한 방으로 내려오니 수찬 정철이 말하기를

                     공을 藍輿(남여)모시어 나쁜 것이 없다. 우리들이 대나무 藍輿를 메겠다.” 고 하고,

                     헌납 고경명, 저언 임제, 道伯邑宰등이 일시에 공을 부축하여 내려가니

                     모여있던 사람들이 전부 嗟歎(차탄)하여 전고에 없는 監事고 말하였다.

1582(선조15) 90. 21하다.

                           도의로 친교를 맺은 인물로 청송 성수침, 퇴계 이황, 대봉 박우 등이 있다.

                           문하에 출입 인물로 하서 김인후, 낙촌 신광한, 율곡 이이, 고봉 기대승 등이 있다.

 

 

 

 

 

 

 

 

 

 

                          新平宋氏五世祀壇事蹟碑 

                          신평송씨오세사단사적비

 

 

 

 

 

 

 

 

 

 

 

 

 

벽암 두릉연가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