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안성-오사겸,오숙 吳士謙 吳䎘 묘소/여신공汝愼公/천파공天坡公/

구름에 달

by 碧巖 2017. 5. 14. 23:38

본문

728x90


吳士謙오사겸 묘역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산47-1




오사겸(吳士謙)

미상1628(인조 6).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여신(汝愼).

정무공 오정방(吳定邦: 15521625)의 아들이다.

어려서 이상길(李尙吉)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만년(晩年)에 음사(蔭仕)로 용인현령(龍仁縣令)이 되어서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에 이르렀다.

1628(인조 6)에 졸 하였다.

이조판서를 지낸 오상(吳翔)吳䎘오숙, 오빈(吳䎙) 吳翮오핵 등의 아들을 두었다.

공조판서를 지낸 양곡(陽谷) 오두인(吳斗寅)의 조부(祖父)이다




                               贈議政府左贊成行宗親府典簿  海州吳公之墓

                               증의정부좌찬성행종친부전부  해주오공지묘


通訓大夫宗親府典簿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  判義禁府事海州吳公墓碣銘

통훈대부종친부전부  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  판의금부사해주오공묘갈명




吳士謙配位 貞敬夫人全州李氏墓所

오사겸배위 정경부인전주이씨묘소





                                                                                               貞敬夫人全州李氏之墓

                                                                                               정경부인전주이씨지묘





=======================================================================================================================================================





吳䎘오숙1592(선조 25)1634(인조 12)

본관은 해주(海州). 숙우(肅羽), 천파(天坡).

오수억(吳壽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오정방(吳定邦)이다.

아버지는 전부(典簿) 오사겸(吳士謙)이며,

어머니는 한성서윤 이집중(李執中)의 딸이다.


1610(광해군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2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약관에 과거로서 이름을 날리었다.

곧 승문원의 권지정자(權知正字)가 되어

당시 문장가로 유명한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이정구(李廷龜) 등이 모인 자리에서

명나라에 보낼 진주문(陳奏文)을 초안했는데, 문장이 뛰어나 이덕형의 천거를 받아 다음날 설서(說書)에 승진하였다.

그 뒤 예조좌랑을 지내다가 조정의 어진 정치를 볼 수 없어 벼슬을 버리고,

장유(張維이명한(李明漢) 등과 교유하며 삼각산에서 독서하였다. 1619년에 병조좌랑이 되었고,

이 때 강홍립(姜弘立)이 후금군에 항복을 알리는 부경진주사(赴京陳奏使)의 서장관으로 갔다왔으며,

다음 해에 괴산군수가 되어 많은 기민(飢民)을 구하였다. 그 해 가을에 순검사종사관으로 삼남을 순찰하였다.


1621년에는 종사관으로 원수 한준겸(韓俊謙)을 따라

관서(關西)의 군무(軍務)를 돌아보고 돌아와 삼각산에서 독서로 소일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광해군의 처남인 유희분(柳希奮) 문하의 8학사의 한 사람이라 해 지탄을 받았으나,

친교가 있던 심기원(沈器遠)의 주선으로 정언(正言)이 되었다.

곧 지평(持平)으로 옮겨서 풍기를 바로잡는 데 공을 세우고,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수찬(修撰교리(校理헌납(獻納)이 되었고,

문학에 조예가 깊은 신하로 뽑혀 호당(湖堂: 독서당의 다른 이름)에 들어갔다.

1624년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병조참지가 되었고,

이듬해 사은 겸 주청부사가 되어 바닷길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6년 청주목사가 되었고, 이듬해 동부승지로서 정묘호란을 당해 왕을 강도에 호송했으며,

우승지·사옹원제조·상의원제조·형조참의·여주목사·예조참의·경상도관찰사, 좌승지 겸 승문원부제조를 역임하였다.

1633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마침 명나라 장군 모문룡(毛文龍)이 가도(假島)에 유진(留鎭: 진을 치고 주둔함.)하자,

대청 관계를 원만히 해결해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사신 황손무(黃孫武)의 접반사로 가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송도에서 죽었다.

문장이 간결 명료했고, 특히 기유시(紀遊詩)에 뛰어났다. 이조참판 겸 양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천파집4권이 있다.

      有明朝鮮慶尙道觀察使  贈吏曹判書吳公䎘之墓 貞夫人固城李氏祔左

      유명조선경상도관찰사  증이조판서오공숙지묘 정부인고성이씨부좌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行通政大夫守慶尙道觀察使吳公䎘之墓  配贈貞敬夫人固城李氏祔

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 행통정대부수경상도관찰사오공숙지묘  배증정경부인고성이씨부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