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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충정공 양곡 오두인(忠貞公 陽谷 吳斗寅) 오두인 묘소, 신도비

구름에 달

by 碧巖 2017. 5. 14.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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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貞公 陽谷公 吳斗寅 충정공 양곡공 오두인묘역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산47-1

 

 

吳斗寅오두인1624(인조 2)1689(숙종 15).

본관은 해주(海州). 원징(元徵), 양곡(陽谷).

병마절도사 오정방(吳定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사겸(吳士謙)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오상(吳翔)이다.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 이효길(李孝吉)의 딸이다.

숙부 오숙(吳淑)에게 입양되었다.

1648(인조 26)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50(효종 1) 지평(持平)을 거쳐 1656년 장령(掌令), 1661(현종 2) 헌납(獻納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67년 부교리(副校理사간 등을 역임하였다.1679(숙종 5) 공조참판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호조참판, 1682년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다음해 공조판서에 올랐다. 1689년 형조판서로 재직 중에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세번이나 임명되고도 나가지 아니하여 삭직당하였다이해에 사직(司直)을 지내고,5월에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가 폐위되자 이세화(李世華박태보(朴泰輔)와 함께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국문을 받고, 의주로 유배 도중 파주에서 죽었다. 그 해에 복관되었다.169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풍계사(豊溪祠),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 양성(陽城: 지금의 경기도 안성)의 덕봉서원(德峰書院), 의성(義城)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곡집이 있다.   諡號는 충정(忠貞)이다.

 

 

有明朝鮮旋表忠臣刑曹判書  贈議政府領議政諡忠貞吳公斗寅之墓

유명조선선표충신형조판서  증의정부영의정시충정오공두인지묘

 

 

 

 

 

 

정무공파, 해주오씨의 커다란 줄기가 되다

오수억의 손자 정무공 오정방(1552-1652)은 임진왜란 때 도총부도사로 전공을 세웠으며,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사직 당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포도대장에 등용(1623)되었으며,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이괄李适의 난 때(1624) 왕을 공주에까지 호종하였다.

 

오수억의 증손자 네명

오숙(2, 관찰사), 오빈(2, 지중추부사),

오상(6, 사복시주부), 오핵(5, 지평) 가문을 반석위에 올렸다.

오숙의 아들 오두인(1624-1689)은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숙종 때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다가 장형으로 모진 고문을 받고 유배도중 66세로 파주에서 죽었다.

오두인의 셋째 아들 태주가 현종의 부마(해창위)였음에도 아버지의 일로 삭탈관직 당하였다.

그래도 18일 만에 직첩을 돌려주라는 숙종의 명이 내려졌다.

 

숙종의 변덕스런 성정이 오두인을 죽였다.

그의 인생 여정은 증조부 오정방과 닮은꼴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정무공 후손에 대한 왕가의 믿음은 더욱 강하여졌고,

오두인의 손자 오원과 증손자 오재순은 부자 대제학으로 해주오씨 정무공파를 조선의 명문가 반열에 올린다.

 

 

 

 

 

 

 

 

 

 

 

 

 

 

 

 

 

 

 

충정공 오두인(吳斗寅) 선생

덕봉리는 해주오씨 휘 현경 통례공(諱 賢卿 通禮公)이 서기 1500년경에 입향한 터전으로

지금까지 510년간 오씨 집성촌으로 대문벌을 이루고 번창하며 세를 이어오며

 유능한 인재들이 사회 각계각층에서 보국(報國)하고 있다.

고성산에는 해주오씨 선대의 묘소가 수려하게 관리되고 있는데 그

 중에도 양곡 오두인 선생의 묘가 능에 버금갈 정도로 규모가 장엄하고

수백 년 된 노송과 어우러져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선생은 입향조 통례공의 세가 되고 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는 원징(元徵) 호는 양곡(陽谷)이고 휘두인(諱斗寅)이다.

사후에 숙종으로부터 영의정 충정(領議政 忠貞)의 증직과 시호를 받았으며,

인조26(1648)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1649년에는 별시 문과에도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므로,

양곡선생의 학문 경지는 범인이 따를 수 없는 당대에 명성을 떨치신 분이다.

 

선생의 학문과 인격 덕망에 감탄한 현종(18대임금)은 자신의 셋째딸을 선생의 자부로 보내 국혼을 맺었으니

선생의 자 오태주(泰周)가 현종의 사위이고 양곡 선생은 현종과 사돈의 연을 맺은 것이다.

양곡의 아들 태주 역시 선생의 슬하에서 엄격한 교육과 인덕에 감화되어

명문장으로 인품이 뛰어났으니 현종의 부마가 된 것이 우연함이 아니다 

 

양곡 선생은 효종대(1649) 별시 문과 장원을 한 이래 효종조 10년 현종조 15년 숙종조 15년 도합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공조참판, 광주목사, 경기감사, 평양감사, 공조판서, 형조판서에 이르기까지 국정의 중심에서 충직한 신하로서 소임을 다하였다.

 

당시 노론 소론 남인 서인등 당쟁이 극심하였던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중용과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신념을 지표로 삼고 불의와는 절대 타협을 모르는 올곧은 소신을 견지하며 국정에 임한 강직한 충신이었다.

 

이러한 선생의 정치적 마지막 운명은 신하로서 장희빈(소의장씨)의 계략을 꺾으려는 충정에서 시작되었다.

숙종15(1689) 장소의는 2살 난 아들 균을 남인의 세력을 등에 업고 세자로 책봉하여 영달을 꿈꾸었고,

그를 따르던 간악한 무리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계략과 음모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때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인현왕후가 아직도 젊은데 후궁인 장소의 소생 2살짜리를 세자로 삼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소를 올렸다.

 

그러나 장소의를 따르던 남인들은(이현기, 남치훈, 윤빈, 이익수, 장희재) 숙종을 충동하여

세자()의 명호가 결정되었는데, 그런 반대 소를 올리는 것은

어린 왕자를 모함하는 행동이라고 송시열 일파를 극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맞섰다.

 

이에 숙종은 송시열과 그를 따르던 일당을 모조리 삭탈관직하고 모진 고문으로 선비들을 처형하였다.

이때 숙종은 양곡 오두인 선생을 지의금부사(검찰총장)에 발령하고

송시열 일당을 다스리라는 명을 내렸으나 양곡 선생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숙종의 23차에 걸친 왕명에도 불구하고 양곡 선생은 끝까지 부임을 거절하여 파직되었으니

선생의 올곧은 성품이 대쪽과 같았음을 엿볼 수 있다.

선생으로서는 숙종과 사돈 관계의 연을 맺은 입장에서

송시열 일파들을 고문하는 것이 자신이 할 도리가 아니라는 뜻을 숙종에게 전달한 강력한 항명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을 기사사화 또는 기사환국이라 하는데 송시열은 제주로 유배 보내지고,

여죄 추궁을 위해 제주에서 서울로 재소환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사망한다.

 

이후 남인들은 서인들을 모두 제거한 후 세자책봉을 한 것도 부족하여

인현왕후를 폐위시켜 사가로 보내고 장소의를 왕비로 들이려는 음모를 꾸민다.

이때 양곡 선생은 박태보, 이세화 등과 한뜻이 되어 인현왕후 폐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소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양곡 오두인 선생을 형틀에 묶어놓고 모진 고문을 가하였고 무수한 선비들을 처형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80여 명의 강직한 선비들이 목숨을 잃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이 일로 박태보와 이세화는 의주 유배지에서 숨지고

양곡 선생은 의주로 유배 도중 파주에서 절명하였으니 얼마나 혹독한 고문을 받았는가를 짐작하게 된다.

 

양곡 선생은 숙종에게 자신의 목숨을 담보하고 반대 소를 올렸던 것이다.

송시열 같은 주자학의 대가요 서인의 거두를 독살하는 것을 보면서도 숙종의 어의를 꺾으려 했으니,

선생은 자신의 목숨 따위에 연연하였던 분이 아니다.

자신의 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려서라도

왕실의 법통을 바로 세우고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에서 소를 제기한 것이다.

 

숙종의 입장에서 양곡 선생은 누이동생의 시아버님이니 어엿한 사장(査丈) 어른이다.

선생이 숙종이 하자는 대로 소신을 굽혔다면

세수를 다할 때까지 왕실의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 자리까지도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인현왕후를 아무런 잘못도 없이 폐위시킨다는 것이 패륜적인 망동으로 생각하고

장소의를 중전으로 앉힌다는 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의()를 지키다가 처참한 최후를 맞으니, 선생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절의(節義)를 실천한 거목이었다.

 

장희빈이 왕후에 앉고 나서도 조정을 뒤흔드는 일이 계속되자,

숙종20(1694) 서인 김춘택, 한중혁 등이 인현왕후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고발되었다.

이때 장희빈 편에 있던 우의정 민암 일당들은

서인을 완전 소탕하려고 김춘택 등 수십 명을 투옥시키는 갑술옥사가 발생한다.

그러나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것을 반성하고

우의정 민암을 파직하였고 인현왕후를 폐위 5년 만에 복위시키며 남인들을 몰락시켰다.

그리고 빈어(嬪御 왕의 첩)에서 왕후로 승격시키는 것을 금하는 법까지 만들었으니

숙종으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조치였던 것이다.

숙종은 이 사건 후 숙종 21(1695) 자신의 사장(양곡 오두인 선생)을 숨지게 한 것을 후회하고

승정원에 어명을 내려 선생을 극진히 예우하여 모시도록 하며 덕봉서원을 건립하고

숙종의 자필로 쓴 현판도 사액하였고,

양곡 선생을 엄숙히 추모토록 하였으며 서원에서는 후세교육의 산실역할을 하였다.

선생은 사후에 충정이라는 시호와 영의정에 추서되는 등 숙종은 국왕으로서 사장(査丈)에 대한 예를 다하였다.

 

 

선생의 묘비에는 유명조선 정표충신 형조판서 증의정부 영의정 시 충정 오공두인지묘라 쓰여져 있다.      

      (有名 朝鮮 旌表忠臣 刑曹判書 贈 議政府 領議政 諡 忠貞 吳公 斗寅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그리고 송덕비가 별도로 둘이 서 있는데 이 비문은 예조판서 대제학 김창협(金昌協)이 짓고,

선생의 태주(泰周)가 썼다고 하는데 서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을 주는 명필이다.

선생은 양곡문집을 남겼는데 현재 지역 유림들이 소장하고 있다.

만약 선생이 중도에 형장에 서지 않았다면 만년에 무수한 문집 저술을 활발히 하였으리라는 생각도 해본다.

 

 

 

 

 

 

 

 

 

 

 

 

 

 

 

 

 

 

 

 

 

 

 

 

 

忠貞公 吳斗寅 元配 繼配 墓域

충정공 오두인 원배 계배 묘역

 

 

忠貞公 元配 驪興閔氏묘소

충정공 원배 여흥민씨묘소

 

                 有明朝鮮忠臣吳忠貞公元配  贈貞敬夫人驪興閔氏之墓

                 유명조선충신오충정공원배  증정경부인여흥민씨지묘

 

 

 

 

忠貞公 繼配 原州金氏묘소

충정공 계배 원주김씨묘소

 

 

                  有明朝鮮忠臣吳忠貞公繼配  贈貞敬夫人原州金氏之墓

                  유명조선충신오충정공계배   증정경부인원주김씨지묘

 

 

 

 

 

 

 

 

 

 

 

 

 

 

 

 

 

 

 

 

 

 

               ---가계도---

               吳仁裕오인유 고려검교 군기감감해주오씨 시조

               吳周裔오주예 내고부사

               吳民政오민정

               吳札오찰

               吳昇오승

               吳孝沖오효충 풍저창승

               吳士雲오사운 지군사공파 파조

               吳顯오현  군기감소윤

               吳輪오륜  판예빈시사

               吳戒從오계종

               吳賢卿오현경 通禮公통례공 弟 吳弼卿오필경 -- 吳慶先오경선

               吳慶雲오경운 配位 豐産沈氏

               吳壽億오수억 --- 吳壽千오수천- 吳正邦오정방

   曾祖父  吳定邦 貞武公(生父 吳壽千)

      祖父  吳士謙오사겸,

         父  吳䎘오숙--吳斗寅--세째吳泰周오태주-오원-오재순

      叔父  吳䎙오빈(와혈)吳斗憲오두헌,吳斗宣오두선,吳斗完오두완

      叔父 吳翔오상(돌혈)-吳斗興,吳斗奎-세째 오두인 출계 숙부 오숙

      叔父 吳翮오핵-吳斗光오두광-吳冕周오면주

                            吳斗龍오두룡-吳昌周오창주

                            吳斗雄오두웅-吳宗周오종주,吳文周오문주

 

 

 

 

 

 

 

 

 

 

 

 

벽암 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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