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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瑞鳳寺址 玄悟國師塔碑, 보물 제9호

종교

by 碧巖 2017. 7. 13.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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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瑞鳳寺址 玄悟國師塔碑

보물 제9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산111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瑞鳳寺址 玄悟國師塔碑

보물 제9. 비신 높이 1.88m, 너비 0.97m. 점판암으로 화강암의 부석(趺石) 위에 섰으며 이수(螭首)는 없다.

제액(題額)贈諡玄悟國師碑銘(증시현오국사비명)’8자로 자경(字徑) 8의 전서(篆書)이며,

본문은 자경 3.3의 해서(楷書)이다.

 

명문(銘文)에 의하면 현오국사는 고려 중기의 승()으로

이름은 종린(宗璘), 는 중지(重之), 속성(俗姓)은 왕씨(王氏)이다.

인종이 일찍이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여풍(餘風)을 이을 사람이 없음을 두려워하였으나,

마침내 玄悟가 뒤를 이어 나이 15세에 불일사(佛日寺)에서 수계(受戒)하고 1147(의종 1) 이후 수좌(首座)가 되었다.

 

1178(명종 8)  53(法臘 39)에  시멸(示滅: 고승의 죽음)함에 왕이 심히 슬퍼하며

상서호부원외랑(尙書戶部員外郎) 최광유(崔光裕) 등을 보내어 국사에 봉하고

諡號玄悟현오라 하였으며 동림산(東林山) 기슭에서 다비(茶毘)하게 하였다.

 

비의 설립 연대는 대정(大定) 25, 1185(명종 15)이며, 문인 등이 서봉사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撰찬은 김지명(金知命),  書서는 유공권(柳公權)이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태종실록7(1407) 122일조에 따르면

용구현(龍駒)[용인] 서봉사를 전국적인 자복사(資福寺)의 하나로 선정하고, 천태종 소속으로 삼았다 한다.

또한 조선 전기에 시행된 사찰의 혁파 대상에서 제외된 거찰(巨刹)로서,

명찰(名刹)’ 또는 명당 터의 대가람에 해당하는 절이었다.

그 후 1530년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현존하는 사찰로 명기된 것으로 보아

18세기 후반까지 계속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00년대 초에 편찬된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에는 폐사된 절로 명기되어 19세기경에 폐사를 추정한다.

일부에서는 임진왜란 때 광교산 전투와 연계하여 폐사 시기를 주장하기도 하나

정확한 폐사 시기는 발굴 조사를 통하여 밝혀질 것이다.

수원시와 용인시의 경계인 광교산 동남록 해발 260m의 구릉에 자리하고 있다.

 

절터는 자연 경사면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6단의 석축 계단을 조성하여 건물을 배치한 산지가람이다.

절터의 전체 남북 길이는 130m, 동서 폭은 90m이다.

현재 절터 대부분은 폐허 상태로 탑재와 부도 및 석등의 부재들이 널려 있고,

현오국사비각과 탑지 부분만 부분 정비된 상태이다.

 

 

20164월부터 2017년 5월까지 이어진 4차 조사에선 나머지 9385를 발굴해

3단 터를 만들기 위해 쌓은 대형 축대를 비롯해 4~6단의 계단식 진입구와 배수시설 등을 찾아냈다.

 

절의 중심구역인 3단 지역은 가로 90m, 세로 40m나 되는 넓은 터에 석가모니 등 부처를 봉안하는 금당(金堂)

대형 강당 등 13동의 건물로 꽉 차 전성기 절의 위상을 추정케 했다.

 

3단 축대 앞에는 보물 제9호 현오국사탑비가 있으며 그 아래 4·5·6단에서 계단형으로 된 출입시설과

고려시대 건물터 등이 확인돼 12세기에 이미 대규모 사찰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됐다.

 

조사단은 지금까지 발굴 결과를 토대로 서봉사가 고려 말 홍수와 산사태로 붕괴됐다가

조선 초에 중건돼 19세기까지 이어져왔으며,

이 과정에서 초기 아래 5·6단에 있던 절의 중심구역이 위 3단으로 옮겨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서봉사지의 역사적 가치

서봉사는 조선 태조 때 자복사(왕실의 복을 기원하는 대형사찰)로 지정됐다.

또 절터에서 발견된 무기류의 불탄 시점 등을 종합할 때

이곳이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일성록(日省錄)’ 등에서 언급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광교산 전투의 격전지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또한, “광교산 자락에 있던 많은 절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물론이고

경기남부권 산지가람 중에서 가장 큰 규모라고 전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서봉사지가 조선시대 호국불교의 유적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시는 보고 있다.

 

 

 

 

 

 

상단의 제액은 띠를 장식한 테두리안에

贈諡玄悟國師碑銘 8글자가 전서로 써 있다.

증시현오국사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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