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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강서구-소요정(逍遙亭 沈貞)

구름에 달

by 碧巖 2017. 7. 16.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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逍遙亭 沈貞 소요정 심정 묘역 1471(성종 2)1531(중종 26).

서울 강서구 방화동 855

 

 

 

 

 

 

 

逍遙亭 沈貞 소요정 심정 1471(성종 2)1531(중종 26).

본관은 풍산(豊山). 정지(貞之), 소요정(逍遙亭).

심구령(沈龜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심치(沈寘)이고,

아버지는 부사를 지내고 적개공신(敵愾功臣)이었던 심응(沈膺)이다.

어머니는 서문한(徐文翰)의 딸이다.

 

1495(연산군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수찬(修撰)이 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화천군(花川君)에 책봉되었고

 이듬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서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09(중종 4) 성천부사 등의 외직을 거쳐, 1515년 이조판서까지 승진했으나 삼사의 탄핵으로 물러났다.

다시 1518년에 형조판서의 물망에 올랐으나 조광조(趙光祖) 등의 사류(士類)로부터 소인(小人)으로 지목되고,

이조판서 안당(安瑭)의 거부로 임명되지 못하였으며,

이에 한강변에 정자를 지어 울분을 달래던 중, 아들 심사손(沈思遜)마저 사류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마침 1519년 조광조 등이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요구하여, 반정공신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받았다.

이에 경빈 박씨(敬嬪朴氏)를 통하여 조씨전국(趙氏專國: 조씨가 나라를 오로지 한다.)의 말을 궁중에 퍼뜨리고,

남곤·홍경주(洪景舟) 등과 모의하여 왕을 움직여,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류를 일망타진하였다.

 

그 뒤 남곤과 함께 정권을 장악하다가 1527년 남곤이 죽은 뒤,

좌의정·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에 올라 수하에 이항(李沆)과 김극핍(金克愊)을 두고 권력을 독점하였다.

동궁(東宮: 후일에 인종)과 인척이며 권력경쟁자였던 이조판서 김안로(金安老)를 귀양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경빈 박씨의 동궁 저주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관련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김안로의 사주를 받은 대사헌 김근사(金謹思), 대사간 권예(權輗)의 탄핵으로 강서로 귀양갔다가

이항·김극핍과 함께 신묘삼간(辛卯三奸)으로 지목되어 사사(賜死)되었다.

후일 김안로가 죽은 뒤에도 많은 사림의 미움을 받아 신원되지 못하고,

남곤과 함께 곤정(袞貞)’으로 일컬어져 소인의 대표적 인물로 길이 매도되었다.

형제간에 우의가 지극하여, 곤경에 처한 동생 심의(沈義)를 끝까지 보살펴주었다고 한다.

교묘한 꾀를 잘 내어 지혜주머니[智囊]라 불렸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문신 심정(147141531)의 묘가 있는

이곳의 개화산의 풍산심씨 묘역 안에는

그의 아들 심사손, 심사순, 손자 심수경 등 풍산 심씨 가문의 묘 60여 기가 함께 있다.

심정의 아들 심사손(14931528)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중종 18(1523) 비변사낭관으로서 서북면의 야인정벌에 공을 세워 많은 관직에 올랐다.

 

 

 

 

 

                      大匡輔國崇祿大夫左議政豐山沈公貞之墓 配貞敬夫人河陽許氏祔左

                      대광보국숭록대부좌의정풍산심공정지묘 배정경부인하양허씨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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