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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운초 김부용(雲楚 金芙蓉), 연천 봉조하 김이양(淵泉 奉朝賀 金履陽)

구름에 달

by 碧巖 2017. 8. 18.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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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초 김부용(雲楚 金芙蓉)묘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리 산 179-1

 

 

 

 

김부용(金芙蓉)1812년 평안도 성천에서 무산(巫山) 12봉의 정기를 받고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하였으며,

열 살 때 부친을, 열한살 때 어머니 잃고 ,

부용은 어쩔 수 없이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시명(詩名)이 운초(雲楚)인 부용은 한번 배우면 둘을 깨우칠 만큼 영특하였고,

용모도 몹시 고와 뭇 사내들의 가슴을 태웠다.

그러나 운초는 오만함 없이 사람을 정성으로 대하고, 물리치되 서운함이 없도록 하였다.

열 두 살에 기적에 오르고,

열다섯살엔 시문과 노래와 춤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얼굴마저 고와 천하의 명기가 되었다.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풍류객이 찾아와 재기를 칭찬하고,

수령의 수청을 독차지해 동료 기생의 시샘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외로움과 설움으로 슬픈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열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운초에게 일생의 전환기가 왔으니 성천에 신임 사또가 부임해 온 것이다.

그는 정사에만 힘쓰는 명관(名官)으로 운초의 특출한 용모와 재색을 아껴

자기 스승인 평양감사 김이양(金履陽)에게  운초를 소개하였다.

 

 당시는 사또가 부임하면 곧 직속상관에게 부임 인사를 하는 것이 정례로 되어 있어,

신임 사또는 정무가 대략 파악되자 운초를 데리고 평양으로 김이양을 찾아갔다.

특별히 아끼는 제자가 오자 김이양은 그를 위해 대동강가 '연광정'에서 환영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 자리에서 신임 사또는 부용을 소개하였는데,

그 때 김대감의 나이는 이미 77세였고, 부용의 나이는 겨우 19세였다.

시문을 통해 일찍이 김이양의 인품을 흠모해 온 부용은

평양에 머물면서 김이양의 신변을 돌보아 드리라는 사또의 명에 기쁜 마음으로 따랐다.

천거에 대해 김이양이 거절하자,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연세가 무슨 상관이겠읍니까.

세상에는 삼십객 노인이 있는 반면 팔십객 청춘도 있는 법입니다." 라고 말하여 부용을 거두게 되었다.

김이양은 총명하고 아름다운 부용을 끔찍히 사랑하였고, 부용 역시 연만한 늙은 감사의 공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두사람은 비롯 김대감이 나이가 들어 남자 구실은 못해도 서로 마음을 나누며 정답게 지냈다.

 

그러던 중 김이양이 호조 판서가 되어 한양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하게 되자 김이양은 직분을 이용하여 부용을 기적에서 빼내 양인의 신분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정식 부실()로 삼았으나, 훗날을 기약하며 혼자서 한양으로 떠나 갔다.

이별이란 누구에게나 애타고 눈물겹다. 그러나 그 깊이는 전적으로 그가 겪은 사랑의 질에 좌우된다.

'정의 문을 닫으면 마음은 한가로운 가운데 외롭고, 정의 문을 열면 마음은 괴로운 가운데 행복하다'란 말이 있다.

생이별을 한 운초는 재회의 날만 기다리며 외로움과 그리움의 나날을 보냈다.

몇 달이 가도 소식이 없자 원망도 많이 하였다.

멀리 있는 님을 생각하니 때로는 보고도 싶고, 때론 잊지나 않았나 의심도 하고,

때론 걷잡을 수 없는 이별의 슬픔으로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부용은 피를 토하는 듯한 애절한 시를 써서 인편으로 보냈다.

이 시가 부용이 남긴 가장 아름다운 '부용상사곡'이라는 보탑시(寶塔詩)이다.

 

 

                                               芙蓉花부용화

 

 

운초 김부용의 相思曲(상사곡)

()

이별 합니다.

(사)

그립 습니다.

路遠

 (로원)

길은 멀고

信遲

(신지)

믿음의 글월은 더디 옵니다.

念在彼

 (념재피)

생각은 님께 있으나

身有玆

 (신유자)

몸은 이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紗巾有漏

(사건유루)

비단수건은 눈물에 젖어건만

雁書無期

(안서무기)

가까이 모실날은 기약이 없습니다

香閣鍾鳴夜

(향각종명야)

향각에서 종소리 들려오는 이밤

鍊亭月上時

 (연정월상시)

연관정에 달이 떠오르는 이밤

依孤枕驚殘夢

(의고침경잔몽)

쓸쓸한 베게에 의지했다가 잔몽에 놀라깨여

望歸雲悲遠離

(망귀운비원리)

돌아오는 구름을 바라보니 멀리 떨어져 있음이 슬픔니다.

日待佳期愁屈之

(일대가기수굴지)

만날날 수심으로 날마다 손꼽아 기다리며 새벽이면 정다운 얼굴 펴들고

神開情受札泣之

 (신개정수찰읍지)

턱을 개고 정을 받고저 우옵니다.

容貌憔悴把鏡下漏

(용모초췌파경하루)

용모는 초췌해저 거울을 대하니 눈물뿐이고

歌聲鳴咽對人含悲

(가성명인대인함비)

목소리도 흐느끼니 사람 기다리기가 이다 지도 슬픔니다

銀刀斷弱腸非難死

(은도단약장비난사)

은장도로 애간장을 끊어 죽는 일은 어렵 지 안으나

珠履送遠眸更多疑

(주리송원모경다의)

비단신 끌며 먼하늘 바라보니

朝遠望暮遠望郎何無信

(조원망모원망낭하무신)

아침에도 멀리 바라보고 저녁에 도 멀리 바라보니 낭군은 어찌 그리 신의가 없으십니까?

昨不來今不來妾獨見詐

(자불래금불래첩독견사)

어제도 안이 오시고 오늘도 안오 시니 첩만 홀로 속고있는 것은 아닌가요.

沮江成平陸後鞭馬過否

(저강성평육후편마가부)

대동강이 평지가 된 뒤에나 말를 몰고 오시렵니까?

長林變大海初乘船欲渡之

 (장림변대해초승선욕도지)

장림이 바다로 변한뒤 노를 저어 배를 타고 오시렵니까?

見時小別時多世情無人可測

(견시소별시다세정무인가측)

이별은 많고 정은 적으 니 세상사를 누가 알수 있으며

好緣短惡緣長天意有誰能知

 (호연단악연장천의융수능지)

악연은 길고 호연은 짧으니 하늘의 뜻을 누가 알수 있겠습니까?

一片香雲楚臺夜神女之夢在某

(일편향운초대야신녀지몽재모)

운무산에 행적이 끊기니 선녀의 꿈을 어느 여자와 즐기 시나요.

數聲良甥奈樓月弄玉之情

 (수성양생나루월농옥지정촉수)

월하봉대에 피리소리 끊기었으니 농옥의 정을 어떤여자와 나누고 계십니까?

欲忘難忙强登浮碧樓可惜紅顔老

(욕망난망강등부벽루가석홍안노)

잊고자 해도 잊기가 어려워 억지로 부벽루에 오르니 안탑갑게도 홍안만 늙어가고

不思自思作何牧丹峯每歎綠髮衰

(불사자사작의모란봉매탄록발쇠)

생각하지 말자해도 절로 생각나 몸을 모란봉에 의지하니 슬프도다. 검은머리 자꾸 쇠해가고

獨守空房下漏佳弱寧有變

(독수공반하루어유산행)

홀로 빈방에 누우니 눈물이 비 오듯 하나 삼생의 가약이야 어찌 변할수 있으며

孤處香閨頭雖欲雪百年貞心自不移

(고처향규두수욕설백년정심자불이)

혼자 잠자 리에 누었으나 검은머리 파뿌리 된들 백년 정심이야 어찌 바꿀수 있으랴.

罷春夢開竹窓迎花柳少年總是無情客

(파춘몽개죽창영화유소년총시무정객

낮잠을 깨여 창을열고 화류소년을 맞아들여 즐기기도 했으나 모두 정없는 나그네 뿐이고

推玉枕藍香衣送歌無子莫非可憎兒

(추옹침랑향의송가무자막비가증아)

베게를 밀 고 향내나는 옷으로 춤을 춰봤으나 모두가 가증한 사내 뿐입니다.

千里待人難待人難甚矣君子薄情豈如是

(천리대인난대인난심의군자박정개여시)

천 리에 사람 기다리기 어렵고 사람 기다리기 이토록 어려우니 군자의 박정은 어찌 이다지도 심하십니까?

三時出門望出門望悲哉賤妾苦懷果何其

 (시출문망출문망비재천망고회과하기)

삼시에 문을 나가 멀리 바라보니 문을 나가 바라보기 애처로운 천첩의 심정은 과연 어떠 하겠습니까?

惟願寬仁大丈夫決意渡江舊綠燭下欣相對

(유원관인대장부결의도강구록촉하흔상대)

오직 바라옵건데 관인하신 대장부 께서는 강을건너 오셔서 구연의 촛불아래 혼 연이 대해 주시고

勿使軟弱兒女子含漏歸泉哀魂月中泣相隨

(물사연약아녀자함루귀천애혼월중읍상수)

연약한 아녀자가 슬품을 머금고 황천객이 되여 외로운 혼이 달 가운데서 울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明珠一千斛 量琉璃盤 옥구술 천만 말을 유리 반에 쏟는 고야

圓樣 水仙九轉丹 알알이 동골 동골 신선의 환약 일래.

 

이 시는 부용의 시인데 김이양이 부용을 처음 만났을 때 이시가 부용의 시가 맞느냐고

질문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물 방울을 환약 알에 비교한데 대한 감탄을 한 김이양과

김부용은 이미 시로서 일생을 같이 할 시우가 되었다고 소설가 정비석 선생은

명기열전에서 설명하고 있다.

 

 

 

 

운초 김부용 雲楚 金芙蓉)과 부용화에 얽힌 시

희제(戱題)

芙蓉花發滿地紅 / 부용화발만지홍 / 부용이 피어 연못 가득 붉으니

人道芙蓉勝妾容 / 인도부용승첩용 / 사람들 부용꽃이 나보다 더 예쁘다네

朝日妾從堤上過 / 조일첩종제상과 / 아침에 제방 따라 걸었더니

如何人不看芙蓉 / 여하인불간부용/ 사람들은 부용꽃을 보지 않네

 

이 시에 보면 부용이 둘 나오는데 실제 부용화와 부용이란 이름의 여인(기생)이다

시의 속내를 들여다 보면 정자에서 연회할 때 연못의 부용꽃을 보고 부용꽃이 나보다

훨씬 이쁘다고 놀리지만 내가 아침에 강둑을 산책하는데

강둑따라 핀 부용화는 안보고 나만 보면서 침 흘린다는

내용으로 이 정도 되면 시를 지은 여인은 가히 원조 공주병이라고 해도 충분한 것 같다.

'사람들은 나보다 부용꽃을 예쁘다 하네'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로

작자는 운초(雲楚) 김부용(金芙蓉`1805~1854 추정)이다.

19살때에 50살이나 차이가 나는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1755~1845)의 소실(小室)이 되었다.

황진이, 이매창과 함께 조선 3대 시기(詩妓)로 불린다고...

 

 

 

 

 

시인운초김부용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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