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조하 연천 김이양(淵泉 金履陽) 묘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리 산 179-1
1755(영조 31)∼1845(헌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신안동(新安東). 字는 명여(命汝). 號 淵泉연천,
초명은 김이영(金履永)이었으나 예종과 이름이 비슷하여 피휘(避諱: 임금의 이름을 피함)하기 위해
김이양이라 개명할 것을 청해 왕의 허락을 받았다.
1795년(정조 19) 생원으로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1812년(순조 12) 함경도관찰사로 있으면서
그 지방의 기강확립에 힘쓰는 한편 고장주민들의 민생고 해결에 노력하였다.
또한, 이듬해에는 계문(啓文: 왕에게 드리는 형식을 갖춘 글)를 올려 변경지방 군사제도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여,
시정하고 어염선세(漁鹽船稅)와 둔전세(屯田稅) 및 마필(馬匹)의 헌납을 감면해주도록 주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함경도의 진환곡(賑還穀) 확보를 위하여 영남포항창(嶺南浦項倉)의 곡식 3만석을 이급해주도록 주청하여
2만 3000석을 얻는 데 성공하는 등 치적을 남겼다.
1815년 차대(次對: 임금의 요청에 의한 임금과의 대좌)에서는
함경감사 때의 경험을 들어 국경지방 군사제도 개선을 주장, 허락을 받았다.
같은 해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내고
이듬해 호조판서가 되어 토지측량의 실시와 세제 및 군제의 개혁, 화폐제도의 개선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819년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이 되었고, 이듬해 판의금부사를 거쳐 좌참찬에 올랐다.
1844년(헌종 10)에는 만 90세가 되어 궤장(几杖)이 하사되었으며,
그 이듬해 봉조하(奉朝賀)로 있다가 졸 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김이양(金履陽, 1755∼1845)은 號가 연천(淵泉)으로,
풍채가 뛰어나고 시문에 능하였으며, 예조 판서를 거쳐 평안감사를 역임하고 있었다.
성품이 너그러운 김이양은 젊었을 때 몹시도 가난하여 굶기를 밥먹 듯하였다.
하루는 저녘도 못 먹고 굶고 자는데, 도둑이 들어 쌀이 없자 부뚜막을 헐고 솥을 떼어가는 소리가 났다.
부인이 남편을 깨워 살림살이의 전부인 솥을 가져 간다고 하자 김이양은,
"오죽 가난하면 남의 집 솥을 떼어가겠소. 우리보다 못한 사람인 것 같으니 내버려 둡시다" 하였다.
이 소리를 들은 도둑은 크게 깨달아 솥을 그냥 두고 갔으며, 그 후로 열심히 일하여 부자가 되었다.
훗날 김이양이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옥당학사(玉堂學士)로 있을 때
은혜를 갚고자 찾아와 둘은 그 후 백년지기처럼 친하게 지냈다는 야사가 있다.
김이양은 영조(英祖)31년(1755년)에 천안에서 태어나
헌종(憲宗)10년(1845년)에 90세로 사망한 문장가로 순조(純組)의 사돈이기도 하다.
김이양은 정조7년(1783년)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하였고
정조12년(1795)에 정시문과(庭試文科)의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1811년 이조참판,
1812년에 함경감사(咸鏡監司)로 재직하고 이후 77세경 평양을 유람하던 중
평양 사또로 부임한 제자 강순황(姜順璜 후일 예조참판)의 배려로 처음 운초 김부용을 만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는 사또가 부임하면 곧 직속상관에게 부임 인사를 하는 것이 정례로 되어 있어,
신임 사또는 정무가 대략 파악되자 운초를 데리고 평양으로 김이양을 찾아갔다.
특별히 아끼는 제자가 오자 김이양은 그를 위해 대동강가 '연광정'에서 환영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 자리에서 신임 사또는 부용을 소개하였는데,
그 때 김대감의 나이는 이미 77세였고, 부용의 나이는 겨우 19세였다.
시문을 통해 일찍이 김이양의 인품을 흠모해 온 부용은
평양에 머물면서 김이양의 신변을 돌보아 드리라는 사또의 명에 기쁜 마음으로 따랐다.
천거에 대해 김이양이 거절하자,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연세가 무슨 상관이겠읍니까.
세상에는 삼십객 노인이 있는 반면 팔십객 청춘도 있는 법입니다." 라고 말하여 부용을 거두게 되었다.
김이양은 총명하고 아름다운 부용을 끔찍히 사랑하였고, 부용 역시 연만한 늙은 감사의 공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 김이양이 호조 판서가 되어 한양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하게 되자 김이양은 직분을 이용하여 부용을 기적에서 빼내 양인의 신분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정식 부실(室)로 삼았으나, 훗날을 기약하며 혼자서 한양으로 떠나 갔다.
이별이란 누구에게나 애타고 눈물겹다. 그러나 그 깊이는 전적으로 그가 겪은 사랑의 질에 좌우된다.
정의 문을 닫으면 마음은 한가로운 가운데 외롭고, 정의 문을 열면 마음은 괴로운 가운데 행복하다'란 말이 있다.
생이별을 한 운초는 재회의 날만 기다리며 외로움과 그리움의 나날을 보냈다.
몇 달이 가도 소식이 없자 원망도 많이 하였다.
멀리 있는 님을 생각하니 때로는 보고도 싶고, 때론 잊지나 않았나 의심도 하고,
때론 걷잡을 수 없는 이별의 슬픔으로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부용은 피를 토하는 듯한 애절한 시를 써서 인편으로 보냈다.
이 시가 부용이 남긴 가장 아름다운 '부용상사곡'이라는 보탑시(寶塔詩)이다.
<봉조하 연천 김이양 가계도>
조부 김시술金時述
부 김헌행金憲行 한성부판윤
모 칠원윤씨(漆原) 정민공 윤지술(正愍公尹志述0의 딸
봉조하 김이양奉朝賀金履陽 공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좌참찬.
자 김한순金漢淳 工曹判書 兼判義禁府事
손 김대근金大根 이조판서
증손 김병익金炳翊 형조판서
인근의 후손 묘소인듯한데.....
여기도 인근의 후손 묘소인듯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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