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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외암민속마을, 영녀안동권씨, 외암신도비, 백산처사 이용정 송덕비,외암동천,동화수석

구름에 달

by 碧巖 2017. 9. 1.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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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민속마을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236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길 42-7

봉수산과 설화산의 맑고 깨끗한 물과 공기를 이어받은 외암마을에는 500여년전 강씨와 목씨가 살았고

일정 기간 동안 평택진씨가 주로 살았다. 지금도 참봉 진한평의 묘가 외암마을 남쪽으로 약 500미터 거리에 있다.

그런데 16세기에 이사종(?~1589)이 참봉 진안평의 맏딸과 결혼하면서 예안이씨 일가가 정착하기 시작했다.

烈女安東權氏旌閭閣

영려안동권씨정려각

아산시 송악면 역촌리 67-2 


烈女安東權氏旌閭

열려안동권씨정려


외암 마을 입구 다리를 건너기전에 정려각이 있다.

열녀 안동권씨는 진사를 지낸 권연(權淵)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온순하고 부모님을 봉양함에 극진한 효성으로 섬기다가

13세의 어린 나이에 예안이씨 가문의 이용덕에게 시집으로 가게 되었다.

이용덕은 예안이씨 20세손으로 외암 이간의 후손이며, 퇴호거사 참판 이정렬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시집간 다음해에 남편이 15세가 되면서 요절하였다.

청상과부가 된 안동권씨는 늙은 시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변변치 못한 제물이지만 죽은 남편을 위해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냈고, 나아가 집안을 화목하게 이끌었다.

평생 과부로 지내다가 나이 86세가 되어 조카인 이홍선을 아들로 삼았으나

불행히도 세상을 떠나 이홍선의 동생인 이득선의 아들을 손자로 삼아 가문을 일으켰다.

안동권씨 부인의 삶은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으며,

마을 사람들이 문교부와 문공부에 특별히 천거하여 표창장과 함께 거액의 상금을 받게 되었다.

정려기는 안동권씨의 조카인 이득선씨의 부탁으로 1978년에 전원식씨가 글을 짓고 최병무씨가 글씨를 썼다.



有名朝鮮國 經筵官 贈資憲大夫吏曹判書成均祭酒巍巖李先生神道碑

유명조선국 경연관 증자헌대부이조판서성균좨주외암이선생신도비





                     白山處士禮安李用政先生頌德碑

                     백산처사예안이용정선생송덕비



외암동천(巍岩洞天) 李用瓚 書

동화수석(東華水石) 李伯善 書

외암마을이 본격적으로 예안 이씨의 터전이 된 것은 입향조 이사종의 5대손 외암 이간(1677~1737)부터다.

그는 숙종 36(1710) 장릉 참봉에 천거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는데,

숙종 42(1716) 다시 천거되자 세자시강원 자의가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 그의 나이가 젊었는데

벼슬이 뛰어오름을 논란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볼 때 능력이 매우 탁월했던 모양이다.

이후 종부시정, 회덕현감, 충청도도사 등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서 주로 지내면서 권선재를 건립해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외암유고를 남겼다.

그는 조선 후기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명으로 호서 사림파의 학맥을 계승한 것으로 명망이 높았다.

51세인 1737년에 사망하자 정조는 이조참판을, 순조는 이조판서를 추증했다.

문정공이라는 諡號를 받고 死後에 불천지위로 모셔지면서 외암마을이 예안 이씨의 씨족 마을로 자리를 굳힌다. 외암의 묘는 현재 마을 입구의 소나무 숲에 서향으로 위치해 있다.

외암리는 조선 후기에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이성렬은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해 응교, 직각승지, 대사성, 참찬까지 지냈으며 독립 운동에 관여했다.

퇴호 이정렬(1868~1950)도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해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며

고종으로부터 '퇴호거사'라는 호를 받았다.

이정렬은 근현대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이정렬의 할머니가 명성황후의 이모로 그는 어려서부터 명성황후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17세 때(1884)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위험을 무릅쓰고 내전에 들어가

사건의 전말을 명성황후에게 고해 명성황후로부터 직접 '원대지기(遠大之器)'라는 칭송을 들었다.


24세 되던 해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 생활에 들어섰는데

34세 때 일본이 강제로 통상 조약과 사법권 이양을 요구하자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당시 책임자인 외부대신을 탄핵할 것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은 나라를 팔아먹는 조정의 신하가 될 수 없다며 관직을 포기하고 낙향했다.

관직에서 물러나자 고종이 직접 복직하라는 전교를 내렸으나 끝내 사퇴했고,

일제 강점기가 되자 충남 일대의 항일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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