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 무궁화공원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연봉리 363-1
강원 홍천군 홍천읍 장전평로 18
反共犧牲者慰靈塔
반공희생자위령탑
反共犧牲者慰靈塔
반공희생자위령탑
무궁화공원을 찾으면 우뚝 서 있는 반공희생자위령탑을 만날 수 있다.
이 탑은 6ㆍ25 전란 당시 군번 없이 싸우며 산화한
대한청년단원과 호국의 영령들을 위로하고 그 얼을 기리기 위해 전 군민의 성금 3,300만원으로 건립한 것이다.
탑은 높이 14.7m로서 오석과 화강암을 사용하였고, 여섯 모의 10층 탑신 위에 지구의를 올려놓았는데,
여섯 모는 6ㆍ25전쟁이 발발한 6월을 뜻하며,
10층의 탑신은 홍천군의 읍면 10개소의 정성을 모아 하나로 뭉쳐진 화합과 끝없는 약진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위령탑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과 건립기가 새겨져 있다.
<비문(碑文)>
여기
조국수호를 위해 준마로 달리시다
가슴을 열어 광풍을 막고
목숨을 태워 어둠을 밝혀
자유와 평화의 안식 이룬
태백의 허리
꽃뫼 마을
그날
붉은 이리떼의 사나운 발톱에 육신이 찢겨
천지가 몸채로 진동하고
동족의 가슴에 못을 박는
공산도배의 만행에
화양강 물줄기가 분노로 넘치던 날
한번 죽어 영원히 살아
호국의 표상 되신
님들을 모신 이 무궁화동산
이제
천년의 비바람도 지우지 못할
거룩한 충혼을
홍천군민의 정성 모아 여기에 새기노니
님이여
열 개의 돌비마다 새겨진 드높은 넋이여
이 나라 지키는 수호신 되어
천세 만세 영원하리라
洪川地區戰鬪戰蹟碑
홍천지구전투전적비
홍천지구전투전적비는 홍천읍 연봉리 363-1번지 소재하고 있으며,
한국전쟁 당시(1950. 12. 13 ~ 1951. 5. 20) 홍천지구전투에서
국군 제 3·5·8사단과 미해병 1사단, 캐나다 및 뉴질랜드 장병들이
북한군 제6, 11, 12, 45사단과
중공군 제63군을 맞아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중부전선을 확보한 것을 기념하고
이 전투에서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육군 제1군단에서 이 비를 건립하였다.
비문>
피에 굶주린 이리 떼와 같이 침공하여 오던 북쪽 오랑캐에 대하여 이 반격이 없었던들 이날과 이곳에 있을 것인가.
피땀에 젖은 장병들의 혈투사는 불후의 무공으로서 길이 남을 것이다.
단기 4283년 12월 13일부터 다음해 5월 20일까지 전개되었던 홍천지구 전투에서
영용무쌍한 국군 제3, 5, 8사단과 영웅적인 미해병 제1사단 및 캐나다, 뉴질랜드 부대의 장병들은
괴뢰군 제6, 11, 12, 45사단과 중공군 제63군의 큰 적과 대적하여
시산혈하의 일대 혈전을 전개하게 됨에 우리 용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이 장한 기백과 필승의 신념은 끝끝내 적을 섬멸하고 중부전선과 요지인 이 지구를 최후까지 확보함으로써
요원들의 불길 같은 우리의 진군을 계속할 수 있었으니, 이 어찌 우리의 영광과 감격이 아니랴.
이 전투로 말미암아 애석하게도 쓰러진 장병들의 명복을 빌며,
그들의 찬란한 무공을 천추만대에 전하고자 이에 이 비를 세우노라.
단기 4290년 3월 15일
제1군단 세움
洪川忠魂塔, 홍천충혼탑
忠魂塔충혼탑
홍천지역은 중부전선에서 요충지인 만큼 많은 전투가 있었고 아울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6·25동란을 전후하여 홍천군 출신의 젊은이들이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호국의 신으로 산화한 장병과 자유세계에 대한 신성한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이국 월남전에 참전하여 전사한 장병과
중부전선의 요충지인 이지역 전투에서 산화한 호국용사들의 넋을 기리고
이들이 남긴 공훈을 후세에 길이 전파하기 위하여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무궁화공원을 찾으면 충혼탑이 우뚝 서 있다.
홍천 지역은 중부전선의 요충지로서 6ㆍ25전쟁을 전후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1950년 12월 13일부터 1951년 5월 20일까지 약 반년 간에 걸쳐
국군 제3, 5, 8사단과 미해병 제1사단 및 캐나다, 뉴질랜드 부대가
북한군 제6, 11, 12, 45사단 및 중공군 제63군을 맞아 싸운 전투에서
희생당한 홍천군 출신은 군경 468위인데,
이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고 위훈을 길이 전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한 것이다.
국가보훈처 현충시설인 이 충혼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인간생활에 있어서 전쟁보다 더한 환란이 없고, 전쟁에서도 동족상잔보다 더 비참한 전쟁이 없다면
6ㆍ25동란은 그 규모로 보나 잔학성으로 보나 인류 지상에서도 유례없는 일대 비극이 아닐수 없다.
동족 가운데서도 우리의 민족은 단일 민족일 뿐만 아니라
수천년 역사를 통하여 번번이 외적들의 침노에 함께 시달리며
함께 짓밟히며 함께 신음하며 함께 피흘리곤 했던 유별난 동족이요 유별난 형제가 아니던가.
한스럽다. 공산주의가 무엇이더냐.
8ㆍ15를 맞이하여 형제가 한데 뭉쳐 복스럽게 잘 살 줄 알았더니 자의 아닌 타의로 국토는 허리가 잘라지고
민족은 남북으로 갈라지니 분단도 서러운데다 공산주의로 얼이 빠진 형제 아닌 괴뢰군이
총, 칼과 탱크와 비행기로 삼팔선을 넘어온 그때가 바로 6월 25일 미명, 이것이 곧 6ㆍ25동란의 시초요.
38선 인접지에 피로 물들이지 않은 곳이 어디랴마는 우리 홍천은 전투상의 요충지였던 만큼
그 격전 또한 필설로 헤아릴 수 없으니,
1950년 12월 13일부터 1951년 5월 20일까지 약 반년 간에 걸쳐 이 지역에 투입된 적군은
북괴군 제6, 11, 12, 45의 4개 사단에다 중공군 63군이 이어 가담했으며,
아군은 국군 제3, 5, 8의 3개 사단과 미해병 제1사단과 캐나다, 뉴질랜드 부대가 각각 유엔군으로 적을 격퇴하는 데 합세하였다.
이 싸움에서 적의 대군은 시산혈하를 이루고 남은 자들이 겨우 물러갔거니와 아군의 손실도 적지않아
본군 출신 전사자만 해도 군경이 468위, 대한청년단원이 287위의 희생자를 낳았다.
특히 강원도민은 순박하고 정의감이 강하기로 이름 있던 홍천군의 의협 남아들이
당시의 대한청년단에 집결되어 6ㆍ25동란을 전후하여 국가와 민족과 자유의 깃발 아래 용천감투한 사실은
우리 민족의 역사상에 길이 빛나는 한 페이지로 기록될 것이다.
이들은 6ㆍ25가 발발하기 약 1년 전인 1949년 7월에 이미 이북 공산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하자
대한청년단원 약 4,000여명이 국군 제7연대를 도와 몽둥이와 돌멩이로 적을 격퇴했고,
동란이 발발하기 두 달 전 50년 4월에는 화촌면 야시대리에 침투한 공비를 백병전으로 맞아 싸워 섬멸했고,
50년 7월에 남면 시동리에서는 공산분자와 북괴 잔당이 합세하여 난동을 일으키자
역시 몽둥이와 맨주먹으로 이를 타도했고,
50년 8월에는 동면 노천리 화방에서 공산 잔당의 난동을 제압하는 등 혁혁한 공적을 남겼다.
이 고을 젊은이들의 피 끓는 정의감과 자유에 대한 목마른 정열은
이 지역에 준동하는 공산당을 계속 타도 봉쇄하였고 다시 나가 자유세계에 대한 신성한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월남까지 출전하여 고귀한 목숨을 바친 이도 허다하니 장하다.
이 고을 젊은 넋이여,
조국은 그대들의 의로운 피에서 기필코 통일될 것이며 자유를 지킬 것이다.
여기 조국과 자유를 위하여 쓰러진 그대들의 의로운 넋을 천추만대에 전하고자 충혼탑을 세우니,
그대들은 부디 눈감고 쉬라.
서기 1972년 8월 15일 세움
翰西 南宮檍先生한서남궁억선생
홍천군 홍천읍 궁화동산은 일제강점기에 무궁화를 널리 보급한 한서 남궁억 선생을 기념하여 세운 공원이다.
일제 강점기 때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자, 언론인이었던 한서 남궁억(1863-1939) 선생은
1918년 모곡으로로 낙향해 모곡교회와 모곡학교를 짓고 교육에 힘쓰며 무궁화를 전국적으로 퍼뜨리는 데 힘썼다.
1933년 체포됐다가 2년 뒤 병으로 석방됐지만 77세인 1939년에 사망했다.
《조선이야기》, 《한국위인(전5권)》,《동사략 (전4권)》등을 지어 민족사 교육을 통해조국애를 고취하였다. 무궁화를 보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 하였다.
보리울에는 한서기념관과 무궁화동산이 들어서고, 초기의 예배당이 복원돼 있다.
홍천군의 캐릭터와 심벌마크도 무궁화 꽃을 형상화했다.
2008년 산림청에서 ‘무궁화 메카 도시’로 홍천군을 선정하였다.
강원도 홍천은 무궁화의 고장이다.
이 고장 출신인 한서 남궁억(翰西 南宮檍.1863~1939)선생은
고종의 어전통역관, 궁내부 토목국장, 독립협회 수석총무, 성신문사 초대사장 등을 역임했다.
구한말의 사상가, 독립운동가, 언론인, 교육자로서 나라사랑과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분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낙향, 무궁화 밭을 일구어 가꾸고,
그 묘목을 전국에 배포하며 무궁화 보급운동을 펼쳤다.
1918년에는 홍천군 보리울(모곡)에 학교를 세우고 무궁화로 광복에 대한 의지를 승화시키며
민족혼 고취에 힘쓰셨는데 일본경찰에 의해 무궁화는 모두 소각되고 갖은 고문을 당하며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1933년의 이 일이 ‘무궁화사건’인바,
이 사건을 계기로 무궁화는 국민들로부터 민족의 꽃, 민중의 꽃, 나라의 꽃으로 확고히 자리매김이 되기도 했다.
인류역사상 민족의 이름으로 특정식물이 가혹한 수난을 겪은 일은 무궁화가 유일하다고 한다.
홍천군에서는 한서 남궁억 선생을 기리기 위해 홍천읍내 장전평로 18번지에 무궁화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國會副議長 東恩李在鶴先生功績碑
국회부의장 동은이재학선생공적비
동은 이재학 선생은 1904년 홍천군 면 팔봉리 출신으로
홍천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강원지사 서리 겸 춘천농대(현 강원대) 학장을 지내고,
제헌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 옥중 당선까지 제5대 국회의원,
제3~4대 국회부의장 등 공무원과 정치인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동은 이재학 선생은 당시 낙후된 홍천지역 농업환경 개선을 위해
시동면, 성동면, 좌운면 저수지 등 수리시설 확충에 힘썼으며
각 읍ㆍ면 마다 중학교를 설립하는데 크게 기여하는 등 지역발전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歷代洪川縣監善政碑
역대홍천현감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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