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홍건신도비高弘建神道碑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1호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석불산길 138(하서면 청호리 산 135)
고홍건신도비---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1호
有名朝鮮國資憲大夫知中樞府事瀛原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高公神道碑銘
유명조선국자헌대부지중추부사영원군겸오위도총부도총관고공신도비명
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 經筵春秋館事藝文管提學成均館大司成 世子右副賓客趙復陽撰
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 경연춘추관사예문관제학성균관대사성 세자우부빈객조복양찬
嘉善大夫兵曹參判李正英書
가선대부병조참판이정영서
거북과 용머리를 새긴 이 비는 조선 현종 9년(1668)에 세운 것으로,
용두귀부의 절묘한 솜씨는 대표적인 걸작으로 평가되어 지방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당대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홍건[高弘建]의 신도비명(神道碑銘) 조복양(趙復陽)
영원군 고공묘갈명 병서 瀛原君高公墓碑銘 幷序
공의 휘(諱)는 홍건(弘建)이고, 성(姓)은 고씨(高氏)이며, 자(字)는 입부(立夫)인데,
그의 선계(先系)는 제주(濟州)에서 나왔다.
고적(高迪)이란 분이 있었으니 고려의 감찰 어사(監察御史)가 되었으며,
그 뒤 대대로 창대하여 경상(卿相)이 서로 잇달았다.
증조는 고세호(高世豪)인데, 벼슬이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으로 공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조부는 고사렴(高士廉)인데, 함경남도 우후(咸鏡南道虞候)로 병조 판서(兵曹判書) 제원군(濟原君)에 추증되었으며,
고(考)는 고희(高曦)인데, 호성공신(扈聖功臣) 영성군(瀛城君)으로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부령 김씨(扶寧金氏)로 김의복(金義福)의 딸이다.
영성군의 아우 성주 판관(星州判官)으로 병조 참의에 추증된 고현(高晛)이
사의(司議)인 한양(漢陽) 조필(趙珌)의 딸에게 장가들어 실제로 공을 낳았지만
영성군이 아들이 없어 공을 후사로 삼았다.
공이 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 13년) 7월 22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기상과 풍도가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에 수문장(守門將)이 되었으며,
공신(功臣)의 적장자(嫡長子)라 하여 6품(六品)에 승진하였다.
임술년(壬戌年, 1622년 광해군 14년)에 찬획사(贊畫使)의 군관(軍官)이 되어
공이 있었으므로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624년 인조 2년)에 역적 이괄(李适)의 변란이 있자 (인조(仁祖)를) 공주(公州)로 호종하여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고 영원군(瀛原君)으로 습봉(襲封)되었다.
이듬해 을축년(乙丑年) 겨울에 희천 군수(熙川郡守)로 임명되고,
신미년(辛未年, 1631년 인조 9년)에 여산 영장(礪山營將)이 되어서는 사졸(士卒)들에게 매우 인심을 얻었으므로,
임기가 만료된 뒤에 1년을 더 유임하였는데, 그곳의 군사들이 유애비(遺愛碑)를 세웠다.
갑술년(甲戌年, 1634년 인조 12년)에 오위장(五衛將)에 임명되었으며,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 난리에는 대가(大駕)를 호종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
서문 협수장(西門協守將)이 되었다가 장단 부사(長湍府使)가 궐원(闕員)이 되자 공을 부사로 삼았으며,
조금 있다가 출전하기를 자청하였으므로, 충청도 병마 절도사에 임명하여 가의 대부(嘉義大夫)로 승진시켰는데,
임금이 도성(都城)으로 돌아와 인견(引見)하고 위로하여 보냈다.
군영에 이르러 흩어지고 도망한 자들을 수습하여 마음을 다해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면서
몸가짐을 간결하게 하고 여러 사람들을 통솔하는 데는 너그럽게 하자, 군사들의 마음이 매우 즐거워하였는데,
떠난 뒤에 비(碑)를 세워서 사모한 것이 여산에 있을 때와 같았다.
임오년(壬午年, 1642년 인조 20년)에는
오위 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임명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서흥 부사(瑞興府使)가 되었다.
당시 임통(任統) 공이 감사로 있었는데, 성격이 엄정하고 급하여 수령들이 책망과 징벌을 받은 이가 많았지만
유독 공에게는 매번 장자(長者)답다고 칭찬하였으며,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반드시 관대하게 용서하였다.
정해년(丁亥年, 1647년 인조 25년)에 영국 공신(寧國功臣)의 회맹(會盟)에 참여하고
자헌 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였으며, 이듬해 무자년(戊子年)에 도총관(都摠管)에 임명되었고,
신묘년(辛卯年, 1651년 효종 2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는데,
이해 가을에 벼슬에서 물러나 호남 부안(扶安)의 옛 주거지로 돌아와 대나무 숲속에다 집을 짓고
여유 있게 스스로 즐기다가 을미년(乙未年, 1655년 효종 6년) 8월 28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76세이다.
이해 10월에 부안 하서(下西)의 선영[先隴]곁 자좌 오향(子坐午向)의 산록에 장사지냈다.
조정에서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공은 기골이 장대하고 수염이 보기 좋았으며 말 타고 활 쏘기를 잘하였다.
사람됨이 독실하고 후덕하여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우애한다고 알려졌다.
젊어서 글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벼슬에 나가거나 일에 임해서는 글을 아는 사람보다 뛰어났다.
전부인(前夫人)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생원(生員) 박홍립(朴弘立)의 딸로 자식이 없었으며,
후부인 기계 유씨(杞溪兪氏)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유제증(兪悌曾)의 딸로
1남(男)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으므로, 족제(族弟) 고홍선(高弘選)의 아들 고두황(高斗煌)을 후사로 삼았다,
고두황이 사인(士人) 김자약(金自躍)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는데,
子 고수일(高守一)ㆍ고재일(高宰一)ㆍ고우일(高宇一)은 모두 어리고, 딸은 출가하지 않았다.
측실(側室)의 아들 고두숙(高斗熽)이 사인(士人) 나헌(羅瓛)의 서녀(庶女)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이흔(李焮)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나 조복양이 젊었을 적에 공의 명성을 익숙하게 들었었는데,
고두숙이 유 부인(兪夫人)의 명으로 부안에서 서울까지 달려와서 비명(碑銘)을 청하기를
매우 간절하게 하기에 사양할 수가 없어 마침내 위하여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헌걸찬 모습이며 성실한 그의 바탕이네. 이런 행실과 능력 드러났으니 공훈 있는 집안 뿐만이 아니네.
높은 벼슬에다 나이도 많으셔 편안히 사시다가 돌아가셨네.
산에 만년 살 집이 있으니 이미 단단하고 또한 길 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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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 고사렴 신도비
濟原君高公士濂神道碑제원군고공사렴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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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부 고희 신도비
瀛城君高公曦神道碑영성군고공희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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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자 고두황 신도비
瀛海君高公斗煌神道碑영해군고공두황신도비
벽암 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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