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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문정공 양곡 소세양(文靖公 陽谷 蘇世讓),소세양 신도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9호, 황진이 '알고싶어요'

구름에 달

by 碧巖 2017. 10. 10.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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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 양곡 소세양(文靖公 陽谷 蘇世讓) 묘소

전북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 산33번지

 

 

 

 

 

 

 

 

 

문정공 양곡 소세양(文靖公 陽谷 蘇世讓)

1486(성종 17) ~1562(명종 17)

본관은 진주(晋州). 는 언겸(彦謙), 는 양곡(陽谷퇴재(退齋퇴휴당(退休堂).

중군사정(中軍司正) 소희(蘇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소효식(蘇效軾)이고,

아버지는 의빈부도사 소자파(蘇自坡)이다.

어머니는 개성왕씨(開城王氏)로 왕석주(王碩珠)의 따님이다.

1504(연산군 10) 19세에 진사시에 이어 1509(중종 4)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언을 거쳐 수찬에 재직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하여 현릉(顯陵)에 이장하게 하였다.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직제학을 거쳐 사성이 되었다.

1521년 영접사(迎接使) 이행(李荇)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았고,

그 뒤 왕자사부(王子師傅) 등을 지냈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나,

1530년 왜구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형조판서 등을 거쳐

1533년 지중추부사에 올라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37년 형조·호조·병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다. 

이듬해 성주사고(星州史庫)가 불타자 왕명에 따라 춘추관(春秋館)의 실록을 등사, 봉안하였다.

1545(인종 1) 윤임(尹任) 일파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이 해 명종이 즉위한 뒤 을사사화로

윤임 등이 몰락하자 재기용되어 좌찬성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익산에 은퇴하였다.

문명이 높고 율시(律詩)에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익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諡號는 문정(文靖)이다.

저서로는 양곡집(陽谷集)이 있으며,

글씨는 양주에 임참찬권비(任參贊權碑)소세량부인묘갈(蘇世良夫人墓碣)이 있다.

 

通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 領 經筵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통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 영 경연춘추관성균관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

五衛都摠府都摠管世子貳師 文靖公 陽谷蘇先生之墓 貞敬夫人昌平曺氏之墓 雙墳

오위도총부도총관세자이사 문정공 양곡소선생지묘 정경부인창평조씨지묘 쌍분

 

 

 

 

 

 

소세양신도비蘇世讓神道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9호

소세양신도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嘉靖四十三年(가정43)”이라 되어 있어 1564(명종 19)임을 알 수 있다.

199819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되어,

진주소씨 익산 화종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된 장방형의 기단석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옥개형(屋蓋形) 개석을 얹은 형태이다.

기단석은 가로 196, 세로 112, 높이 90의 크기로서 사면에는 국화문을 조각하였고

윗부분은 연판문(蓮瓣紋)으로 장식하였다.

비신은 높이 218, 103, 두께 25의 대리석으로서

전면 상단에 자경(字經) 12

左贊成蘇公神道碑銘(좌찬성소공신도비명)”이라 새겨져 있는데,

경기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였던 심전(沈銓)이 전서(篆書)하였다.

비문은 해서체로서 강녕군(江寧君)홍섬(洪暹)이 찬()하였고,

비명(碑銘)은 소세양의 아들 소수(蘇遂)가 썼다.

이수(螭首)는 가로 128, 세로 77, 두께 43의 화강암 석재로서

한 마리의 용이 똬리를 튼 형태로 힘차고 굵게 조각되어 있다.

 

 

 

 

 

 

 

 

 

 

 

 

 

 

 

 

 

 

 

문정공 양곡 소세양 文靖公 陽谷 蘇世讓

전북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 산33번지

1486(성종 17) ~1562(명종 17)

 

 알고 싶어요 / 이선희

이선희가 부른 노래 "알고 싶어요"는  황진이의 시를 번안하여 만든 노래라고 한다.

소세양과 한달간 동숙(동거)하고 헤어진 뒤 황진이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

소세양을 그리는 애타는 마음을 글로 적어서

동선이를 시켜 한양에 있는 소세양에게 보냈던 漢詩 라고 합니

 

달밝은 밤이면 그대는 무엇을 생각하나요?

(蕭寥月夜思何事)소요월야사하사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을 꾸시나요?

(寢宵轉輾夢似樣)침소전전몽사양

붓을 들면 때로는 제 이름도 적어보나요?

(問君有時錄忘言)문군유시녹망언

저를 만나 기쁘셨나요?

(此世緣分果信良)차세연분과신량

그대 생각하다 보면 모든게 궁금해요.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하루에 제 생각 얼마만큼 하나요?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

바쁠 때 얘기해도 제 말이 재미있나요?

(忙中要顧煩或喜)망중요고번혹희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정겨운가요?

(喧喧如雀情如常)훤훤여작정여상

 

 

황진이의  러브스토리

 

소세양(蘇世讓)이 송도에서 황진이를 만났을 때의 일이다.

소세양은 젊었을 때 친구들에게 

당시 이름을 날리던 황진이를 유혹해 한달 간 동숙을 하리라 약속을 하고 송도에 와서 황진이를 만났다.

 

소세양이 먼저 황진이에게 인편으로 편지를 보냈다.

-석류나무 류(), 석류 류

편지에는 단 하나의 한자만 적혀있었다.

이 편지를 본 황진이도 답장을 써서 보냈다.

-고기잡을 어

답장에도 역시 단 하나의 한자만 적혀있었다.

 

의 뜻은 碩儒那無遊[석유()나무유()]로 해석을 하면

'큰선비가 여기 있는데, 어찌 놀지 않겠는가?' 가 된다.

'내가 왔으니 어서 와서 나랑 놀자' 라는 뜻과 비슷하다.

 

황진이의 답장

의 뜻은 高妓自不語(고기자불어)

'높은 기생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라는 뜻으로 다시 말하면,

'높은 기생인 나는 마음에 드는 남자라도 먼저 꼬시지 않으니까

네가 먼저 직접 와서 말해라' 가 된다.

 

둘은 어쨌든 한달 간 동숙(同宿)을 하였고 이별할 때는 황진이가 멋진 시까지 지어서 남기고 있다

 

송도의 명기 황진이의 소문을 들은

당대의 문장가 소세양은 아무리 황진이가 재색을 겸비하였다지만

한달 기한으로 그녀와 동숙하고 나면 반드시 떠날 것이라고

머리카락만큼도 미련두지 않으리라 친구들에게 호언장담한다.

 

정말 그와 함께 꿈 같은 한달을 보낸 황진이는 그와 더불어 누각에 올라 이별주를 나눈다.

그녀는 이별을 슬퍼하는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고 다만 이렇게 말한다.

"당신과 이별하며 어찌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졸구를 올리고자 하오니 되겠습니까?"

소세양이 그러라고 하자 그녀는 다음과 같은 율시를 써서 바쳤다.

 

奉別蘇判書世讓(봉별소판서세양) 소세양판서를 보내며 / 황진이

 

月下梧桐盡(월하오동진) 달빛 아래 오동잎 모두 지고

霜中野菊黃(설중야국황)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樓高天一尺(누고천일척)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流水和琴冷(유수화금랭)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이에 소세양은 황진이의 시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다음과 같은 시로 보답을 하고

친구들과 사나이 약조을 저버린 채

그녀 곁에 더 머물렀다고 하는데.......

 

     달빛 아래 소나무만이 푸르르고

     눈에 덮인 한포기 꽃들은 고개를 떨구었구나.

     강물은 하늘과 맞닿아 슬픈 줄을 모르고

     쌓여가는 술은 그저 강물에 흘러갈 뿐

     흐르는 강물은 나의 마음을 실어 보내주지 않고

     저멀리 절벽에서 살아남은 한포기 꽃은

     아름다운 낙화를 보여주는구나.

     내일 아침 그녀를 보내고 나면

     슬픔은 비가 되어 나의 몸을 짓누르리.

 

漢詩 / 황진이

소솔한 달밤 무슨 생각하시온지

뒤척이는 잠자리 꿈 인듯 생시인 듯

님이여 제가 드린 말 기억하시는지

이승에서 맺은 연분 믿어도 좋을지요

멀리계신 님 생각, 끝없어도 모자란 듯

하루 하루 이 몸을 그리워하시나요

바쁜중에도 돌이켜 생각함은

괴로움일까, 즐거움일까,

참새처럼 지저귀어도 제게 향하신

정은 여전하신지요.

 

오백여년전 조선의 콧대높은 기생 황진이가

유일하게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정을 느꼈던 사내 소세양

 

그와의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였지만

속끓는 애절함의 싯귀속에

참 사랑의 가치가 있으리라.

 

벽암 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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