恭平公 淸原君 韓偉공평공 청원군 한위
군포시 산본동 산170-3
漢城右尹資憲知中樞淸原君 諡恭平公淸州韓公偉 配貞夫人晉州姜氏 配貞夫人順興安氏 之墓
한성우윤자헌지중추청원군 시공평공청주한공위 배정부인진주강씨 배정부인순흥안씨 지묘
資憲大夫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府都摠管 淸原君 贈諡恭平公墓誌銘
자헌대부지중추부사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청원군 증시공평공묘지명
淸原君韓公墓誌銘//한위[韓偉]의 묘지명(墓誌銘) -신용개(申用漑)
공(公)의 휘(諱)는 위(偉)이고, 자(字)는 굉(宏)이며, 성(姓)은 한씨(韓氏)이고, 본관(本貫)은 청주(淸州)이다.
원조(遠祖) 한난(韓蘭)은 고려 태조를 도와서 공(功)을 세워 태사(太師)에 봉하여졌고,
이로부터 대대로 경사가 나서 세상의 명문(名門)이 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한영(韓寧)이라는 분이 있어 증직(贈職)이 병조 판서(兵曹判書)인데 이분이 공의 고조(高祖)이고,
판서공이 한영정(韓永矴)을 두었는데 증(贈)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이며,
이분이 한확(韓確)을 두었는데 정난 좌익 공신(靖難佐翼功臣)에 책훈(策勳)되고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하여져
벼슬이 의정부 좌의정에 이르러 시호가 양절(襄節)이다.
양절의 아들 한치의(韓致義)는 좌리 공신(佐理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청양군(淸陽君)에 봉하여졌으며,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세상을 마치어 시호가 장도(章悼)이다.
이분이 전의(全義)의 망족(望族)인 지풍천군사(知豐川郡事) 이항전(李恒全)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성화(成化) 을유년(乙酉年, 1465년 세조 11년)에 공이 태어났는데, 어릴 적부터 여느 아이들과 달리 영특하였다.
문음(門蔭)으로 여러 산직(散職)을 거쳐
나이 21세 되던 을사년(乙巳年, 1485년 성종 16년)에 동부 주부(東部主簿)를 제배(除拜)하고
다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ㆍ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로 옮기었다.
홍치(弘治) 기유년(己酉年, 1489년 성종 20년)에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로 나갔다가,
임기를 채우고는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으로 들어와 사복시 판관(司僕寺判官)과 첨정(僉正),
충훈부 경력(忠勳府經歷)을 역임하였다.
무오년(戊午年, 1498년 연산군 4년)에 강화도호부사(江華都護府使)를 제수받아 나갔는데,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그리워하여 치적이 좋게 보고되었다.
경신년(庚申年, 1500년 연산군 6년) 가을에 특별히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승급하여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제수받고,
임술년(壬戌年, 1502년 연산군 8년)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좌승지(左承旨)에까지 올랐다.
계해년(癸亥年, 1503년 연산군 9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승급하여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제배하고
이윽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옮기어 고훈(考勳)을 세습하여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졌다.
이해 가을에 천추사(千秋使)로 명(明)나라에 갔다 오고
갑자년(甲子年, 1504년 연산군 10년) 봄에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겸대(兼帶)하였다.
여름에 소혜 왕후(昭惠王后)가 승하하여 공을 수릉관(守陵官)으로 삼았는데,
당시 연산군의 정치가 문란하여 공이 아무 죄도 없이 파면을 당하였으나, 그러나 능은 여전히 지켰다.
을축년(乙丑年, 1505년 연산군 11년)에 능을 지킨 공로로 가정 대부(嘉靖大夫)에 승급하였으나,
그러나 끝내 복직은 되지 않았다.
정덕(正德) 병인년(丙寅年, 1506년 연산군 12년)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였고,
성주(聖主)의 반정(反正, 중종반정)을 만나서 원종 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고
겨울에 특명으로 한 계급 더 승진하였으니, 이는 능을 지킨 공로를 추후 포상한 것이었다.
무진년(戊辰年, 1508년 중종 3년)에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 자헌 대부(資憲大夫)에 승급하여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지고
도총부 도총관(都摠府都摠管)을 제배하였다가, 경오년(庚午年, 1510년 중종 5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옮겼다. 이듬해 신미년(辛未年, 1511년 중종 6년) 4월 3일(무자)에 질병으로 세상을 마치니, 향년 47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조정에서 철조(輟朝)를 하고 의식에 따라 조제(弔祭)를 하였다.
아무 달에 과천현(果川縣) 수리산(隨理山) 아무 향(向)의 터에 안장하였다.
아들 한수선(韓守善)이 슬픔 속에서 예조 판서 신용개(申用漑)에게 편지를 보내어 묘지명(墓誌銘)을 청하며 하는 말이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부유한 집안에서 생장하였으나 교만하고 으스대는 기색이 전혀 없이
벼슬이 2품에 이르도록 부귀(富貴)로 남에게 내세우지 않았고,
평생에 애첩을 두지 않고 벼슬살이에 청렴하고 부지런하여 간 곳마다 좋은 치적을 남겼으며,
형제와 친척을 대함에 있어서는 기쁨과 사랑을 다하고 노복을 부림에 있어서는 너그러움을 다하였으며,
자제들을 옳은 방향으로 경계하여 선조(先祖)에게 누를 끼치지 말도록 하고
병세가 위독할 때에는 좌우의 사람에게 부축을 명하여 일어나 앉아서 집안 식구와 영결하기를,
‘내가 아무 덕도 없이 벼슬이 재상(宰相)에 이르렀으니, 영광이 이미 극에 달하였다.
이제 죽은들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하고는,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연세가 50도 못 되어 갑자기 대화(大化)에 이르렀으니, 영원한 슬픔은 끝이 없습니다.
문한(文翰)을 주관하시는 분의 한마디 말을 얻어내어
묘도(墓道)에 간직하여 두어서 뒷날에 대비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는데,
나 신용개가 그 말이 애처로워서 다시 생각하여 보니
내가 공과는 승정원(承政院)과 도총부(都摠府)에서 같이 벼슬살이를 하며 서로 상종한 지가 오래되어
사실을 자세히 알고 또 윤자(胤子, 맏아들. 곧 한수선(韓守善)임)의 말을 보니 지나침이 없으며,
그리고 윤자는 우리 맏형 군수(郡守) 신용관(申用灌)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서로 인척 관계이다.
묘지명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공평공 한위 묘소 후경
공의 첫 부인은 청주 목사(淸州牧使) 강자정(姜子正)의 딸로, 후사가 없이 공보다 먼저 죽었고,
나중의 부인은 선공감 정(繕工監正) 안우삼(安友參)의 딸로, 두 아들을 낳았으니,
맏이는 곧 한수선(韓守善)이고, 다음은 한수도(韓守道)인데 판관(判官) 최인수(崔仁壽)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世貂蟬能繼承。 대마다의 아름다운 벼슬 잘도 계승하였고
保名門不驕矜。명망의 가문을 보존하며 교만하지 않았네.
天畀官嗇於壽。하늘이 벼슬에는 너그러우면서 수명에는 인색하였으니,
之與奪莽難究。주고 빼앗는 그 이치 아득하여 구명하기 어렵네.
宅于茲安且堅。이곳에 유택을 잡아 편안하고 견고하니,
神佑護萬爲年。신명이 보우하여 천만년 영원하리라.
호조정랑 한수도 묘소
군포시 산본동 산170
通訓大夫戶曹正郎淸州韓公守道 配淑夫人完山崔氏 之墓
통훈대부호조정랑 청주한공수도 배숙부인완산최씨 지묘
禦侮將軍行忠佐衛副護軍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墓碣
어모장군행충좌위부호군 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 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묘갈
子 韓亢한항, 韓箕한기,韓奎한규,韓翼한익,韓斗한두
호조참의 한항 묘소
戶曹參議淸州韓公亢 配淑夫人竹山安氏 之墓
호조참의청주한공항 배숙부인죽산안씨 지묘
贈通政大夫戶曹參判禦侮將軍行忠佐衛副司果墓碣
증통정대부호조참판 어모장군행충좌위부사과묘갈
병조참의 한두 묘소
兵曹參議淸州韓公斗之墓 配淑夫人南陽洪氏祔右
병조참의청주한공두지묘 배숙부인남양홍씨부우
//청원군 한위//
조부 한학韓確 양절공襄節公
부 한치의韓致義 청양군 장도공淸陽君 장도공 한치의章悼公 韓致義
한위韓偉 淸原君,
제 한탁韓倬 평해공
자 한수도韓守道 忠佐衛副護軍
손 한항韓亢 戶曹參議, 韓箕한기, 韓奎한규, 韓翼한익, 한두韓斗 兵曹參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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