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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묘지/지석영,지성주,유상규,도산안창호

구름에 달

by 碧巖 2018. 2. 9.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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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촌 지석영 松村 池錫永 묘소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 산57-1

 

송촌(松村지석영池錫永

1855(철종 6)1935. 의사·한글학자.

본관은 충주(忠州). 는 공윤(公胤), 는 송촌(松村). 서울 낙원동에서 태어났다.

의학교육을 받은 일은 없었으나 일찍부터 서학(西學)을 동경하여 중국에서 번역된 서양의학책을 탐독하였는데, 특히 관심을 둔 것은 영국인 제너(Jenner,E.)의 종두법(種痘法천연두 예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1876(고종 13) 병자수호조약이 일본과 체결되면서

그 해 수신사로 지석영의 스승인 박영선(朴永善)이 가게 되어

그에게 일본에서 실시되고 있는 종두법의 실황을 조사하도록 간청하였다.

그래서 박영선은 오다키[大瀧富川]에게 우두법을 배우고

구가[久我克明]종두귀감(種痘龜鑑)을 얻어다 전해주었다.

 

그 뒤 1879년 일본해군이 세운 부산의 제생의원(濟生醫院)에 가서  2개월간 종두법을 배우고

두묘(痘苗우두의 원료)와 종두침 두 개를 얻어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처가가 있는 충주에 들러 40여 명에게 우두를 놓아주었다.

이것이 우리 나라 사람에 의한 공개적인 종두법 실시의 시초이다.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 도쿄에 건너가서

그곳 위생국 우두종계소장(牛痘種繼所長) 기쿠치[菊池康庵]에게 종두기술을 익히고 두묘의 제조, 저장법과

독우(犢牛송아지)의 사양법(飼養法채장법(採漿法)을 배운 뒤 두묘 50()을 얻어가지고 귀국하였다.

 

서울에서 두묘를 만들어 종두를 보급하면서 군의 마에다[前田淸則]로부터 서양의학을 배웠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에서 종두법을 배워왔다는 죄목으로 체포령이 내렸다.

그는 재빨리 피신하였으나 종두장은 난민들의 방화로 불타버렸다.

정국이 바뀌면서 서울로 돌아와 종두장을 재건하였다.

 

 

                松村居士池公錫永之墓

                송촌거사지공석영지묘

 

그는 전라도어사 박영교(朴永敎)의 초청을 받아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종두를 실시하면서

종두법을 가르쳤고, 이듬해에는 충청도어사 이용호(李容鎬)의 요청에 의하여 공주에도 우두국을 만들었다.

 한성순보(漢城旬報)에 외국의 종두에 관한 기사가 실려 종두법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종두법의 보급에 진력하면서도 1883년 문과에 등제(登第)하여 성균관전적과 사헌부지평을 역임하였다.

   1885년 그 동안 쌓은 지식과 경험을 종합하여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지어냈다. 

같은 해 우두교수관으로서 전라도지방을 순회, 시종(施種)을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고,

1887년전라남도 강진의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어서도 여전히 우두를 실시하였다.

   1892년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 우두보영당(牛痘保嬰堂)을 설립하고 많은 어린이들에게 시종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위생국의 종두를 관장하게 되어 떳떳하게 우두를 보급할 수 있었다.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형조참의·승지를 거쳐 동래부사를 지내며 임지에서도 우두를 실시하였다.

1899년 의학교가 설치되자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일본인 교사들을 초빙하고 일본 의학책을 번역하여 가르치게 하였다.

1902년 그의 제창으로 훈동(勳洞)에 의학교의 부속병원이 설립되었고,

이듬해 의학교는 첫 졸업생 19명을 배출했다.

  

 

春雨居士池公成周之墓

춘우거사지공성주지묘

지석영의 계자 지성주 묘소

1905년 널리 교육을 펴기 위하여 알기 쉬운 한글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더욱이 주시경(周時經)과 더불어 한글의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구자였다.

1908년 국문연구소 위원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자전석요(字典釋要)를 지어냈다.

 

그의 주장은 인정을 받아 많이 받아들여졌고,

고종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태극장(太極章팔괘장(八卦章) 등을 내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일합병을 당하자 모든 공직을 버렸다.

일본의 간곡한 협조요청이 있었으나 초야에 묻혀 살다가 80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태허공 유상규묘소

 

유상규(劉相奎, 1897~1936)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외과의사로서 대중 의료보건에 힘썼다.

는 태허(太虛). 본관은 강릉.

 1897년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읍 서부동에서 태어나  

19163월 제11회로 경신붕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에 새로 설립된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에 제1회로 입학하였다.

19193·1운동 에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을 모으고 동원하는 등 3.1 독립운동의 주된 역할을 하였으며

경성의학전문학교 (서울) 졸업을 1년 앞둔 3학년을 마칠즈음  상해로 망명하여 학교는 퇴교를 당하였다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상하이로 건너간 유상규는 임시정부 교통국에 근무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조직한 임정 조사원 강계지역 책임자가 되어 독립운동 자료조사 및 수집 등 활동을 하였다.

19195월에는 상해에서 임정의 내무총장을 지낸 요인 안창호의 비서관이 되었으며

그 시기에 흥사단에 입단하여 흥사단 원동지부에 속 하였다 

 

 

한민족은 인재가 필요한 민족이니 고국에 돌아가 학업을 마치라는 안창호의 권고로

19236월 상해를 떠나면서 일본 오사카로가서 노동을 몸소 체험하였다.

6개월간 토목현장 막노동자, 공장 노동자로서  육체노동을 하였다.

1924년에 귀국하하려 할때 경찰에 검거되어 수감되었다가 동년 4월에 일본서 추방 강제 귀국하게된다.

관동대지진을 오사카에서 겪으며 일본 노동환경에대한 체험을 한것이다.

 

귀국 후 1925년 다시 경성의학전문학교 3학년으로 복학하여, 입학 동기들 보다 7년을 늦게 졸업하였다.

그의 학교 동문으로는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 의사 유석창 등이 있다.

유상규는 졸업 후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외과의사로서 경성의전의 강사로 근무하면서

후배 양성과 환자치료를 하고 박사학위를 준비하며

1930년 조선의사협회 그리고 조선위생협회 창설도 주도하였다.  

 

 

유상규는 의전에서 교육과 치료 및 국민 보건위생계몽에 몸바치면서도 흥사단 운동 확장에 앞장 서 일하였다.

그러다 환자를 치료하던 중 단독(丹毒)에 감염되어

193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외과 강사로 근무 중 순직했다(1936.7.18.).

 

그의 장례는 마침 대전에서 출옥하고 국내에 체류하던

안창호가 주관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정에서 치러졌다(1936.7.20.).

장의 행열은 경성의전부속병원(현 삼청동)으로부터 식장(현 이화동)까지 이어졌고

당시 기록에는 유상규의 장례식은 불법집회로 의심받을 만큼 많은 친지와 동지가 모였고,

그의 은사 오사와 마사루 교수도 슬픔에 떨리는 음성으로 조사를 낭독했다고 한다.

그는 뒤늦게 1990815일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되었다.

 

              愛國志士江陵劉公諱相奎 配孺人淸州李氏 之墓

              애국지사강릉유공휘상규 배유인청주이씨 지묘

 

 

도산 안창호 선생

 

안창호 安昌浩 1878(고종15).11.9~1938.3.10)

본관 순흥(順興)

도산(島山)

일제강점기 애국계몽 활동을 전개하고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나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했으며 공부를 마친 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1907년 신민회를 조직,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결성하였다.

19262월 상하이로 돌아와서 만주에 흩어진 군사 활동을 통일하여 대독립당을 결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민족운동의 이념과 노선이 통일되지 못해 실패로 끝났다.

19324월 윤봉길의 폭탄투척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4년형을 선고받은뒤 가출옥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다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이듬해 졸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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