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걸리 마방터馬房터
강원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218
물걸리 동창마을에는 기미만세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팔열각 주변은 3·1만세시위가 전개되었던 곳이다.
그 옆에는 김덕원이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추진했던 마방터가 있다.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는 교통의 요지이기에 3·1운동 때 주변 여러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만세시위운동을 하였다.
교통이 편리한데다가 농사짓기도 좋은 여건을 갖춘 물걸리 주변은 수탈의 대상이었다.
수탈에 견디지 못한 이곳 사람들이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양반들에 대항하였다.
이러한 동학농민전쟁은 3·1운동으로 이어져
1919년 4월 3일에 물걸리에서 만세운동이 대대적으로 행해질 수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19년 3월 말부터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의 김덕원과 전성열은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1919년 3월 30일 서울에서 홍천감리교회 원익상 목사를 거쳐 내촌면의 물걸리 동창감리교회의
미국인 선교사에게 비밀리에 전달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1매는 기독청년인 전우균에게 전해졌다.
전우균은 이미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있던 장두(총지휘자) 김덕원, 부장두(부지휘자) 전성열과 함께
김덕원과 전영균의 집을 오가며 모여 계획을 짜고 있었다. 여기에 서석면 수하리의 이문순도 참여하였다.
이들은 모두 천도교인이었으며,
물걸리도 동학란 때 동학군이 진을 치고 싸우던 곳으로 전통적으로 천도교와 관계 깊은 마을이었다.
전우균은 3·1운동 직후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지만 만세 시위 준비에는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김덕원은 대형 태극기 3매를 그렸고 전성열과 전우균은 작은 태극기 300여 매를 그렸다.
그리고 4월 1일 홍천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이들은 4월 3일에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시위에 참여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부장두 전성열은
인근 5개면(기린, 화촌, 서석, 두촌, 내촌)을 다니면서 연락하였고,
이장집의 인부었던 이오실이 물걸리 집집마다 방문하여 소식을 알렸다.
그런데 4월 2일 도관리 헌병주재소에서 보조원 홍재호가 물걸리에 와서 만세시위를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덕원과 전성열은 있는 김도명의 주막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홍재호에게
‘같은 민족’이라는 점을 들어 일본군에게 보고하지 말라고 설득하였다.
홍재호는 오히려 이들에게 호통을 치니 분개한 김덕원과 전성열은 술상을 엎어 버리고
보조원을 때리고 밟아 폭력으로 그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4월 3일의 동창마을의 비석거리(현 팔열각 일대)에는 5개 면에서 모여든 1천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장두 김덕원이 “우리는 자유와 독립을 찾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한 사람도 이탈하는 사람이 없이 최후의 일각까지 싸웁시다.”라고 말하자
사람들이 저고리에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꺼내어 들었고, 김자선, 전영균, 이기선 등이 대형 태극기 3매를 들었다.
이어서 전우균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사람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양도준이 치는 징소리에 맞춰 시위대열이 내촌방향으로 행진을 시작하였다.
김덕원의사항일투쟁기공비
전날 김덕원, 전성열에게 쫓겨난 홍재호가
일본 헌병과 보조원 4명과 함께 나타나 시위하는 군중을 해산시키려고 공포를 쏘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동요하지 않고 계속 만세를 외치며 내촌 방면으로 행진하였다.
이에 일본 헌병과 보조원들은 군중을 향하여 실탄을 쏘았다.
이들의 총에 맞은 여덟 사람(이순극李順克, 전영균全榮均, 전기홍全基弘, 이기선李基先, 이여선李麗先,
연의진延義鎭, 김자희金自喜, 양도준梁道俊은 현장에서 숨지고 함춘광, 승만수 등 20여 명은 중경상을 입었다.
이에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김덕원 장두는 해산하라고 외쳐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다.
만세 시위가 진압된 것으로 여긴 일본 헌병 일행은
내촌 헌병분견대로 돌아갔고 시위군중은 복골 방향의 산속에 숨어 있었다.
이 날 현장에서 숨을 거둔 사람들을 거두지 못하고 흩어지자
시위 현장 주변에서 주막을 경영하던 정익화 할머니와 남씨 부인이 시신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 관헌은 계속하여 만세 군중을 수색 체포하였으니,
최공직의 가게에 피신해 있던 10여 명을 비롯한 많은 인원이 검거되었다.
4월 4일 내촌 분견대의 헌병들이 다시 물걸리에 나타나 장두 김덕원의 집에 불을 지르고
마을을 순찰하며 다시 만세시위를 하면 마을 전체를 불살라 버리겠다는 협박하고 돌아갔다.
김덕원 장두는 체포를 피해 가족과 함께 서석면 수하리 깊숙한 산속에 숨어 3년간 피신생활을 하다가
결국은 잡혀 일경의 혹독한 고문으로 두눈을 잃고 옥살이에서 풀려나 척약산 기슭에서 비참히 살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숨을 거두었으니 시신조차 거두어 찿지 못하는 비운의 삶을 마치었다고 하며,
그를 기리는 척야산 문화수목원이 후손에 의하여 조성되어 있다.
전성열 부장두는 서울에서 수년간 피신하다가
인제군 남면 갑둔리(서낭거리)에서 화전을 하며 살다가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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