群山 近代歷史博物館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전라북도 군산시 해망로 240[장미동 1-67]
2011년 9월 개관
군산동 국사 소조 석가 여래 삼존상 복장 유물 특별전,
2012년에는 8·15 특별전 우리 땅, 그들만의 축제를 기획 전시하였다.
2013년에는 2013 특별전 화교의 삶과 문화를 개최하였고, 역시 특별전인 쌍천 이영춘 박사의 삶,
파란 눈의 선교사가 전해준 선물, 독도, 우리의 소중한 영토 특별전을 개최하였다.
은적사 삼층석탑
隱寂寺 三層石塔
이칭/별칭 선종암 오층 석탑
전라북도 군산시 설림3길 49[소룡동 1332] 에 있는 은적사
삼층석탑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흔히 ‘선종암 오층 석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탑이 본래 선종암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 말기 당나라가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를 침략할 때 소정방이 군산 지역으로 들어왔는데
갑자기 풍랑이 일고 짙은 안개가 끼자 선종암을 찾아가
그 곳에서 수도하고 있던 자장율사의 도움을 받아 안개를 걷히게 했다는 연기 설화를 가지고 있는 사찰이다.
1914년 이 지역에 군산시의 상수도용 수원지가 개설되면서 선종암이 수몰 지구에 들어가 폐사되었다.
이때 절에 있던 불상 등은 은적사로 옮겨지고, 삼층석탑은 수원지 사무소 옆으로 옮겨졌다가
1976년에 은적사 경내로 옮겼다가 역사박물관을 개설하면서 박물관 앞쪽에 이설하였다.
은적사 삼층석탑은 갑석과 1, 3층 옥신의 일부를 석회로 보수한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상륜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볼 때 안정감을 주면서 매우 우아하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고려 시대의 석탑으로,
상륜부의 원형은 멸실되었고 현재 놓여 있는 연화봉을 조각한 4각의 보개석은 최근에 조성한 것이다.
의병장 돈헌 임병찬 遯軒 林炳瓚---- 1851(철종2)∼1916. 조선 말기의 의병.
본관은 평택(平澤). 字는 중옥(中玉), 號는 돈헌(遯軒). 전라북도 옥구 출신.
아버지는 임용래(林榕來)이다. 16세에 전주 지방시에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하였으며
1888년 호남에 대흉년이 들자 11월에 1,000냥을 내어 구휼하고,
이어 3,000냥과 조(租) 70석을 내어 백성을 진휼하고,
다음해 징세(徵稅)할 때 1석에 25전의 저리를 받아 백성을 구하였다.
그 결과 1899년 호남의 선비들이 임병찬의 공을 추천하여,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의 직첩을 받고,
1899년 7월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樂安郡守兼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에 임명되었다.
1906년 2월 최익현(崔益鉉)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초모(招募)·군량·연병(鍊兵)의 책임을 맡아 홍주의병장 민종식(閔宗植)과 연락하면서
태인·정읍·순창·곡성 등을 쳐서 관곡을 군량으로 충당하고, 진용을 정비하였다.
1906년 6월 순창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하다가 최익현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감금 2년 선고를 받고,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가 1907년 1월 귀국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은거하면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도모하던 중,
1912년 9월 고종의 밀조(密詔)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전라남도 순무대장(巡撫大將)에 임명되었다.
이에 각지에 격문을 보내 동지를 초모하는 한편,
조직을 확대하여 12월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 이명상(李明翔)·이인순(李寅淳)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의군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총사령 자격으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 이하 대소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냈다.
여기에서 합방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한국통치의 곤란함을 주지시키며,
외국에 대해서는 일제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한편,
일제를 일시에 구축하려는 의병운동을 계획하였다.
같은 해 5월 일본경찰에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잡힌 뒤 독립의군부의 조직과 계획이 탄로나면서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6월 13일 거문도로 유배되었으나,
1916년 5월 이곳에서 병사하였다.
저서로는 『돈헌문집(遯軒文集)』이 있으며,
그 중에 수록된 「돈헌문답기(遯軒問答記)」는 태인의거 후 잡혀 취조당할 때의 기록과
1908년 5월 천안에서 세 차례에 걸쳐,
일본헌병대장과 문답한 기록으로, 의병운동사 및 사상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하청(河淸)에 사당이 건립되어 최익현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앞에 창의기념비가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의병장 돈헌 임병찬 遯軒 林炳瓚 가계도//
증조할아버지 임경손(林慶孫)
할아버지 임민규(林玟圭)
아버지 임용래(林溶來)
어머니 송악 왕씨
의병장 돈헌 임병찬 遯軒 林炳瓚
배위 임천조씨, 조준극(趙俊極)의 따님
계배 여산송씨, 송상희(宋祥喜)의 따님
아들 임응철(林應喆)
손자 임진(林鎭)
동학혁명 총관령 김개남 장군(金開南, 1853년철종4~1895년고종32)(도강김씨道康金氏)
정읍문화원 김희선 사무국장은
“논란이 되는 ‘밀고’는 당시 두 사람의 암묵적 동의에 의한 것”이라며
“밀고했다는 사실만을 놓고 동학농민혁명의 배신자로 낙인찍어서는 안 된다”는 상반된 평가를 내렸다.
김 사무국장은 “당시 동학을 이끌던 손화중 총관령도 ‘나는 곧 죽을 목숨’이라 말했듯,
동학의 주축들은 모두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임병찬(林炳瓚) 장군과 김개남(金開南) 장군은 친구 사이며,
김개남 장군을 해할 목적으로 관에 밀고를 한 것이 아니라 고육지계
(苦肉之計: 적을 속이려고 자신의 희생을 무릎 쓰며 꾸미는 책략)를 쓴 것으로 보인다.
즉 체포당하기 전에 김개남 장군은 더 많은 동학농민군을 살리기 위해
임병찬 장군과 상의 후 자신이 동학의 대표로 사형 당한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고 말하며
“이를 뒷받침해줄 구체적 자료를 수집하는 중이다”고 설명했다.
역사적 사실관계로 따지자면
‘임병찬이 역사적 의의가 큰 동학농민혁명의 주축인 김개남을 밀고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고,
이 사실을 근거로 ‘서로 간 나라를 구하려는 방법이 달라 일어난 비극’이라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그 내면에 ‘김개남 장군이 동학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이 대표로 희생하려 했고,
합의하에 임병찬 장군이 이를 도와준 것이다’는 주장도 있어
임병찬 장군과 김개남 장군의 관계가 역사적으로 정립이 안 된 상황이다.
節制使 權公昌燮 永世不忘碑
절제사 권공창섭 영세불망비
구 군산세관본부
舊 群山稅關本館
전라북도 군산시 해망로 244-7[장미동 49-38]
구 군산세관 본관 건물은 1908년(순종2년) 군산항 개항 초기에 건립되어 군산세관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옛 서울역 역사와 한국은행 본관보다 앞서서 건립된 것이다.
건립 당시에는 감시계 청사, 감시 망루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본관과 창고만 남아있으며
본관은 관세청 호남관세박물관으로 사용한다.
1994년 8월 10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87호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8월 6일 사적 제545호로 지정되었다.
호남 관세 박물관
湖南 關稅 博物館
초분 草墳
전북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리 산 75-2
초분 草墳
초빈(初殯)·가빈(家殯)·초장(草葬)이라고도 한다.
입관 후 출상한 뒤 관을 땅이나 평상 위에 놓고 이엉으로 덮어서 1~3년 동안 그대로 두고,
해마다 명절이나 기일에는 그 앞에서 간단한 제사를 지낸다. 초분의 이엉은 해마다 새것으로 바꿔준다.
초분에 모신 시신은 탈육(脫肉)되고 나면 뼈만 간추려 일반 장례법과 동일하게 묘에 이장한다.
매우 원시적인 형태의 장묘법으로 유교식 장례법이 관철되기 전의 토속장례의 전형성을 보여준다.
근래까지도 전라도 남해안 및 서해안 일대 인근 도서지역에서 광범위하게 행해져왔으나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초분장을 하는 경우는 호상일 경우에 많이 행하며 임신중인 부인이 죽었을 때도 반드시 초분으로 한다.
전염병으로 죽어서 시신의 균이 주위에 옮길 여지가 있을 때도 격리 차원에서 일단 초분으로 가묘를 만든다.
익사자도 시신의 물을 빼기 위하여 초분으로 하며,
초분의 형태는 평지장(平地葬)이라고도 부르는-------- ----------------------------뉘움초분,
돌을 쌓고 시신을 올려두는 ------------------------------------------------------고임초분,
초분에서 육탈된 뒤에 특별한 사정으로 유골을 매장하지 않고 백지에 싸서
대설작이나 종이상자 혹은 비닐포대에 넣고 새끼나 노끈으로 동여매는 ---------------세움초분,
파묘에서 거둔 유골을 비교적 빠른 기일 내에 이장하기 위해서 편의상 하는 방법인 -----유지방이초분이 있다.
이장하는 시기는 대개 2월 영등할머니가 오는 달을 택하며,
전라남도 진도의 경우에는 반드시 씻김굿을 하여 망자의 넋을 위로해준다.
대장교
군산시 옥도면 대장도리 대장봉 정상에서
군산시 옥도면 대장도리 대장봉 정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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