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貞祠충정사
인당印璫( ? ~ 1356년) 서북면병마사 참지정사 석성부원군(參知政事 碩城府院君)
충남 당진시 면천면 아미로 368(죽동리 산57)
교동인씨(喬桐印氏)의 중시조
인당印璫( ? ~ 1356년)
교동인씨 41세손
교동인씨(喬桐印氏)의 중시조로 일찌기 문과에 올라 代言(대언)을 거쳐
충혜왕복위 4년(1343년) 12월에 왕명으로(고려 충혜왕 복위 4년)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갈 때 대언(代言) 인당(印璫)이 왕의 폐신(嬖臣)인
임신(林信)ㆍ박양연(朴良衍)ㆍ임이도(林以道)ㆍ남궁신(南宮信)ㆍ최안의(崔安義)ㆍ
김첨수(金添壽)ㆍ민환(閔渙)ㆍ왕석(王碩)ㆍ승신(承信) 등 9명을 함거(檻車)에 싣고 원나라로 갔다.
충목왕1년(1345년) 4월에 밀직사가 되어
충정왕 3년(1351년) 8월에 왜선 130척이 인천부근 섬으로 침입하자
公이 서북면 만호로서 西江에 주둔하여 이를 방비하고 왜적이 남양 쌍부현(현 안산지역)의 침입을 막았다.
공민왕 1년(1352년) 7월에 인당이 왜선을 나포하자
왕명으로 동지(東池)에 띄우게 하여 이를 백성들에게 관람케 하였다.
동년 8월에 포왜사(捕倭使)가 되시어 금군(禁軍)과 東西江 교동의 뱃사공 1천을 거느리고 왜적을 방비하고,
공민왕 3년(1354년) 6월에 전라도만호로서 왜적을 포로로 잡아 국법으로 다스렸으며,
원나라의 내란시에 공민왕의 명으로 원군(援軍)으로 갔으며 이때 석성부원군(碩城府院君)의 봉군을 받았다.
1354년 7월에 유탁, 염제신, 권겸, 나영걸, 김용, 이권, 최영 등과 같이 군사 2천을 거느리고
당시 북경에 살던 고려사람 2만여 명과 함께 참전하였는데 고우성, 육합성 전투에서 용맹히 싸워
장사성(張士誠)과 주원장(朱元璋)을 괴롭혔고 이때 참모로서 활약하시고 이듬해 乙未 5월에 귀국하였다.
공민왕 5년(1356년)에 동지밀직사를 거쳐
공민왕이 친원파 기철, 권겸, 노책을 목베이고 공을 첨의평리로 삼았으며 이어서
원나라가 설치해 놓은 정동행중서성 이문소(征東行中書省 理問所)를 폐지하고 옛땅 쌍성탈환작전을 계획하면서
공을 서북면병마사에 임명하고 부사(副使)로는 신순, 유홍,최영, 최부개 등으로 정하였다.
이에 인당은 동년 6월에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 즉 九連城의 三병참기지를 격파하여
원과의 연락망을 끊어놓고 유인우를 도와 쌍성을 수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원나라는 국경침범을 문책해 오면서 80만대군으로 고려를 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인당장군은 원병을 청하며 이의 방비를 극력 주장하셨고 동년 7월에 조정에서 관제를 고치면서
공을 參知政事(참지정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元의 재차 추궁에 당황한 공민왕에 의하여
서북면 병마사 인당(印璫)이 죄를 뒤집어쓰고 1352년 7월 30일 목이 베어졌다.
개성 남대문 종경에 '첨의평리 사사 인당'이란 여덟 자가 새겨져 내려오고 있다.
公의 부인은 해주최씨로서 판밀직사사 崔安道(최안도)의 따님이며, 면양군 具藝(구예)의 외손녀이다.
인당 장군의 묘소는 개성 북산 효청동에 있다 하고, 충남 당진군 면천면 죽동리에 공의 사우가 있다.
교동인씨 충정사 표석
整禮文정예문
追慕碑추모비 敬慕齋경모재
碩城府院君印璫將軍追慕碑
석성부원군인당장군추모비
교동(喬桐)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원래 고구려의 고목근현(高木根縣)으로서 해중(海中)의 섬이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교동현으로 개명하여 해구군(海口郡)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도 계속 교동현이라 하고, 1629년(인조 7년)에 부(府)로 승격되었으며 수사(水使)가 부윤(府尹)을 겸임하였다.
1895년(고종 32년)에 강등(降等)되어 강화군(江華郡)에 예속되고,1914년 군을 폐하고 강화(江華)로 합(合)했다.
교동인씨(喬桐印氏)는 중국 계통으로「좌씨전(左氏傳)」과 「계고집성(稽古集成)」에 의하면
중국 정(鄭)나라 목(穆)의 증손 7명 중에 자장(子張)의 아들 단(段)이란 사람이
조부의 이름인「자인(子印)」의「인(印)」자(字)를 따서 성(姓)을 인씨(印氏)로 삼았다고 한다.
단(段)의 후손인 인 서(印 瑞)가 진(晋)나라 풍익(馮翊)의 대부(大夫)로서
297년(신라 유례왕 4)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한 것이 우리나라 인씨(印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그 후 33세손 빈이 고려 인종(仁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교수(喬樹)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교동(喬桐)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文獻)에 나타난 인씨(印氏)의 본관(本貫)은 23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 고려 충령왕의 비)를 배종(陪從)하고 들어와
검교정승(檢校政丞)을 지낸 원(元)나라 사람 후(候)를 시조(始祖)로 하는
「연안인씨(延安印氏)」와 「교동인씨(喬桐印氏)」를 제외한 나머지는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전한다.
僉議評理司事 碩城府院君 印璫將軍追慕碑
첨의평리사사 석성부원군 인당장군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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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사 후면의 승사랑 인희윤, 배위 신평이씨 묘역
承仕郞喬桐印公希尹 配端人新平李氏 之墓
승사랑교동인공희윤 배단인신평이씨 지묘
承仕郞喬桐印公 宜人新平李氏 之墓
승사랑교동인공 의인신평이씨 지묘
6대조 판이부상서 인규(印 珪) 문과(文科)
5대조 응양위대장군 호부상서 인현원(印玄元)
고조부 평장사 석성군 충정공 인정(碩城君 忠貞公 印貞)
증조부 병부상서 수문전태학사 인대신(印大紳)
조부 문하시중 평장서 인공수(印公秀)
조모 광산김씨(光山金氏), 판삼사 김지숙의 따님
아버지 동지밀직사 전법판서 인주(印 做)
어머니 청주이씨, 이정(李 挺)의 딸
동생 봉정대부 이조판서 인관(印琯)
서북면병마사 참지정사 석성부원군 인당(碩城府院君 印璫)
배위 해주최씨, 판밀직 최안도(崔安道)의 따님, 면양군 구예(具藝)의 외손녀
장남 전리판서 연성군 인안(延城君 印安)
차남 이부시랑 인해(印 海)
손자 고려말 대장군 인영보(印榮寶)
소용장군 판삼사사 인중수(印重秀)
병조판서 인인기(印仁奇)
호조전서 인광보(印光寶)
판밀직사사 함산군 인원보(咸山君 印原寶) 최영 귀양시 측근으로 적소에서 3년 후 참사,
태조(太祖) 2년인 1393년 10월 29일에 원등을량 원종공신녹권, 봉 함산군
산장군 인중보(印重寶)
벽암 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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