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락정 (고창읍성 입구의 정자)
고창 문화의 전당
갇혀있는 사람
고창읍성高敞邑城 , 일명 모양성(牟陽城)
사적 제145호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산 9[모양성로 1]
탑성놀이상
고창읍성에서 모양성밟기가 진행되고 있다.
탑성놀이 민속은 윤년에 한 번 윤달에 고창 읍성을 찾아가 성을 밟으면서 극락왕생을 서원하는 의식으로서
1778년 윤삼월에 고창 현감 이항(李恒)이 모양성 개축을 주도하면서
성곽 축조의 기원과 고을 보호의 방편으로 불교의 탑돌이와 다리밟기를 차용하여 주민들에게 권장한 듯 하다.
고창읍성의 성밟기 놀이는 작은 돌을 하나씩 머리에 이고 성을 도는 것으로서
한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바퀴를 돌면 극락승천한다는 전설이 있다.
桐里申在孝先生追念碑 晩汀金素姬女史 國唱紀念碑
동리신재효선생추념비 국창김소희여사 국창기념비
신재효申在孝 (1812년(순조 12년) 11월 6일~1884년(고종 21년) 11월 6일)
본관은 평산(平山), 字는 백원(百源), 號는 동리(桐里)이다.
1812년(순조 12년) 11월 6일 전북 고창에서 신광흡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경주 김씨는 마흔 살이 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자
인근에 있는 정읍의 내장산 영은사에 가서 치성을 드린 끝에 신재효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고창현의 형방을 지냈던 아버지 신광현의 후광으로
1852년(철종 3년)에 고창 현감으로 부임한 이익상 밑에서 아전 노릇을 했고,
말년에는 관속이나 광대, 기생들을 관리 감독하는 호장(戶長)의 직임에 있었다.
그러므로 신재효는 평소 판소리나 춤 같은 기예에 매우 익숙했을 것이다.
신재효의 가정생활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26세 때 첫째 부인 진주 김씨가 자식도 없이 죽었고,
둘째 부인 밀양 박씨도 결혼 2년 만에 외딸만 남기고 죽었다.
셋째 부인 당악 김씨는 아들 신순경과 두 딸을 낳고 36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56세까지 세 명의 아내를 잃은 그는 이후 재혼하지 않았다.
고창에서 태어나 아전이 되어
천석꾼 중인으로 신분상승을 꿈꾸며
50세 중반 가옥을 동리정사桐里精舍로 칭하고 소리꾼을 육성하다.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하며
판소리의 이론을 정립하고
여제자 진채선에 대한 애틋한 연서 〈도리화가〉라는 사모곡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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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창 만정 김소희 國唱 晩汀 金素姬
본명 김순옥(金順玉)
號 만정(晩汀)
1917년 전남 고창에서 태어나 1995년 졸, 슬하 1남 2녀
만정(晩汀) 김소희(金素姬)여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인간문화재
그녀는 일세를 풍미했던 여류명창 박녹주(朴錄珠)·박초월(朴初月)여사 타계 이후
남성 일색이던 판소리계에 남아 있던 유일한 여성 기능보유자이기도 했다.
1917년 전남 고창에서 태어난 그녀는 12세때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의 노래를 듣고 감명받아 소리의 길에 들어서서
당시 국창(國唱)이던 송만갑(宋萬甲)·정정렬(丁正烈)선생에게 심청가·흥보가를 사사하여
송흥록(宋興祿)->송광록(宋光祿)->송우룡(宋雨龍)->송만갑으로 이어지는 동편제 판소리 계보를 이어받았으며
일찍이 金여사의 재능을 알아본 송만갑은
『요런 애물은 천에 하나 나오기 힘들제』하며 수업료를 일절 받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판소리 외에도 김종기(金鍾基)·강태홍(姜太弘)에게 가야금을,
정성린(鄭成麟)에게 『살풀이춤』을 사사했으며 서예로도 국전에 3회 입선한 경력이 있는 재주꾼이었다.
36년 당시 19세의 나이로 일본 빅터 오케이 레코드社의 전속 판소리 가수가 돼 춘향전 전집을 취입했는데,
당시 전속금은 월80원. 쌀 50가마 값의 파격적인 금액이었다.
金여사는 49년부터 여성국악동호회 이사장을 지냈으며,
54년 민속음악의 본산 국악예고의 전신인 민속예술학원을 설립, 초대 원장을 역임했다.
59년 국악입문 30년을 기념하는 첫 판소리 독창회를 정동 원각사에서 개최했으며,
국립국극단 부단장, 한국 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한 뒤
71년부터는 창악전수소를 설립해 본격적인 후학양성에 나섰다.
69년 일본 요미우리 신문 주최 일본순회 공연을 가진 후 72년 美카네기홀에서 판소리 독창회를 개최했고,
뮌헨 올림픽 문화축전에도 한국대표로 참가하는 등 판소리를 세계무대에 소개하는데 앞장서온 인물이었다.
79년 세종문화회관에서 판소리 50년 기념공연에서 『춘향가』의 눈대목을 열창했으며,
민요에도 관심을 보여 82년 공간사랑에서 남도민요 32곡으로 첫 민요발표회를 가졌다.
85년 호암아트홀개관기념 공연때는 「덧뵈기춤」으로 숨겨놓은 춤솜씨를 과시하기도 했다.
제자는 성창순(成昌順), 신영희(申英姬), 안향연(安香蓮), 오정숙(吳貞淑), 안숙선(安淑仙), 강정숙(姜貞淑)등이다.
1995년 4월 17일 세상을 떠난 여사의 유족으로는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며,
특히 맏딸 박윤초(朴倫初)씨는 판소리, 춤, 연기 등 폭넓은 재능으로 판소리와 연극무대에 진출했고
극단 자유의 「무엇이 될꼬하니」로 유럽연극제에도 참가하는 등
어머니의 뒤를 이어 국제무대에서 만능소리꾼으로 활약중이다.
생전에 정인보, 미당(未堂) 서정주의 시를 좋아했던 그녀가 태어나서 자란 고창의 한 공원에는
그녀의 판소리 50년을 기념하는 「김소희여사 국창 기념비」에 서정주 시인이 쓴 시비가 세워져 있다.
『만정 그대의 노래소리에는/
고창 흥덕의 옛날 못물에/
몇만년 이어핀 연꽃물이 들어 있도다/
만정 그대의 노래소리에는/
이조백자의 희다 겨운 옥빛이/
누군가 간절히 이어가야 할/
이나라의 큰 곡절이 배어있도다』
拱北樓공북루
공북루는 1646년(인조24) 수재(守宰) 이정방(李庭芳)이 건립하고
1678년(숙종4년) 고창현감 이항(李恒)이 중수하고
1724년(경종4년) 고창현감 유완(柳浣)이 개축하였으며
1853년(철종4년) 고창현감 이익상(李益相)이 대 보수를 하였다 한다.
공북루의 현판은 현감 이익상이 보수할 때 湖南의 名筆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7)이 썼다고 한다.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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